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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8.12.31
북클럽문학동네 송년키트로 받은 에필로그 북에는 매달 생일시가 실려 있었다.
나도 생일 선물로 책 한 권과 생일시가 적혀있는 카드를 받았었는데,
4월에 내가 받은 시와 함께 4월부터 11월까지 실려 있는 시들이다.
4월
어떤 경우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5월
우리의 죄는 야옹
길상호
아침 창유리가 흐려지고
빗방울의 방이 하나둘 지어졌네
나는 세 마리 고양이를 데리고
오늘은 울음을 연습하다가
가장 착해보이는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앉았네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
들키고야 말 일을 미리 들킨 것처럼
페이지가 줄지 않는 고백을 했네
죄의 목록이 늘어갈수록
물의 방은 조금씩 무거워져
흘러내리기 전에
또 다른 빗방울을 열어야 했네
서로를 할 퀴며 꼬리를 부풀리던 날들,
아직 덜 아문 상처가 아린데
물의 혓바닥이 한 번씩 핥고 가면
구름 낀 눈빛은 조금씩 맑아졌네
마지막 빗방울까지 흘려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되어
일상으로 폴짝 내려설 수 있었네
6월
괄호 속의 생
이사라
가끔 삶이 마디가 된다
괄호 속의 생을 누가 알까
그것은 빈 세상이 아니고
우리들 속에서 튕겨져나간 탄력들이
되돌아오지 못하는 것이고
경계는 마냥 가볍게 이쪽저쪽 너울거리고
그들이 살았던
검은 액자들이 속울음처럼 들썩이고
괄호 속의 생은
말없음표의 긴 행렬 속에서 불쑥 튀어오르는
봉분 같아서
괄호 속의 생은
그냥 빈 세상이 아니고
때로는 앞뒤로 닫히는 삶이 있고
그런 저녁이 있다
7월
여름
권대웅
연못 속에 구름이 살고 있었다
자신이 쏟아부었던 분량의 소나기가
그다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무거운 지게를 지고 살았으면
소금쟁이가 됐을까
1초에 자기 몸길이 백배나 되는 거리의 물위를
가볍게 걸어다니는 소금쟁이가
물 속에 사는 구름의 생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풀섶에서 쓰르라미가 울었다
종일 두 앞 발을 비비며 우는 소리
흐르는 시냇물에 번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여름 한철 온 생을 빌고 있다
그림자 한 점 없는 뙤약볕 시골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루나무 꼭대기
파란 연못에 내 전생이 환하게 보이다
까무룩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무도 없는 시골길
너무 환한 생의 정면과 적막이 무서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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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