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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18.1.16
딴짓해도 괜찮아
- 글쓴이
- 장재용 저
비아북
1. 저자에 대하여
장재용
평범한 월급쟁이지만 부러진 발목으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국내 아흔아홉 번째로 등정했고, 북미 최고봉인 디날리에도 올랐다. 생산성이라는 가치에 자신의 전부를 털리는 회사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꿈에 근거한 상상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극명하게 대비되는 바쁜 직장과 멈춘 시간의 산에서 우리는 어떤 시간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답한다. 집 평수보다는 사유의 지평을, 자동차 배기량보다는 꿈이 주는 마력을 믿는다. 산을 사랑하지만 태어난 곳은 사방이 바다인 섬이다.
에델바이스를 좋아한다. 빙벽과 바위를 오르는
C급 알피니스트다. 조악하여 봐줄 수 없지만 애써 모른 채하고 글을 쓰는 어설픈 작가다.
자신의 신화를 찾는다며 나선 길이 벌써 마흔,
인생 반 고비를 돌고 있다.
STX 조선해양에서 기획 담당,
경영 혁신을 주관하는 부서의 팀장으로 일하다 최근 라오스의 글로벌 대기업으로 옮겨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8기 연구원으로 인문학을 수학했고, 고전에 파묻혀 산다.
통근버스를 타는 하루 두 시간을 오롯이 책 읽는 데 쓴다. 그 시간은 그가 인류와 만나는 유일한 해방구다. (Yes 24 발췌)
2.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우리는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수 있는가? 월급쟁이 8할은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 잘하는 일만 있을 뿐이다. ‘잘하는 일’로는 회사에 쓸모 있는 사람인데 기쁘지 않아 보인다. 회색 얼굴을
하고 다닌다. …. 열 명중 여덟 명에게는 이렇다 하게 명확한 월급쟁이 이후의 계획이 없다. – p29
→ 월급쟁이의 얼굴은 대부분 무표정하다. 어쩌면 살아 있지 못하다. 대부분이 자신의 본 얼굴이 아닌 가면을 쓰고 행동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하는 일이 더 많아야 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인 양 착각하고 사는 것이 대부분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희열에 넘치는 얼굴, 자신에게 그런 얼굴을 할 때가 언제인지는 알고 지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런 순간을 보다 많이 만들기 위해 직장생활을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명민해야 한다. 자른다고 함부로 잘려선 안 된다.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회사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 … 직장을 다니며
딴짓과 일탈을 꿈꾸고 노력하는 사람은 언제고 삶의 윗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 – p31
→ 회사는 사원을 절대적으로 정이나 의리로 대하지 않는다. 단지 목적에 의해서
이익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다. 그것은 사원들도 그래야 한다. 회사가
사원들을 책임져 준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영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회사 생활을 벗어나고 자 하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처음부터 노동력을 제공하고 노동력에 월급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다면 말이다.
생각만 해도 내가 즐거워지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 미래 삶이 한 조각이 될 가능성이 짙다. 그 한 조각을 낚아라.– p41
→ 가만히 생각만 해도 즐거워 지는 일이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만하면 가슴이 뛰고 기쁜 것은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순간을
낚기 위해 매 순간 열심히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고 일상이 되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다. 깊은 바다에서 커다란 물고기를 낚는 것처럼 내 일상에서 즐거운 삶을 낚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자 기쁨이다.
좀 더 깊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자.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때는 사태의 바닥까지 내려가 벌어지는 일들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바닥부터 이해해야 한다. 자신을 먼저 이해하라는 말의 무책임함을 알고 있다.-4p2
→ 우리는 어렴풋이 대충 알고 다 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모든 것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연에 무엇인가 있는 경우가 많다. 자연도 그러할 진대 우리 인생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해서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 깊은 인생을 알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바닥이 어디인지는 먼저 알아야 한다. 자신의 깊은 곳, 자신의
깊은 이해가 있어야 남을 이해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세상에 쫄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고 어디서고 시선을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p49
→ 세상을 만만하게 보아서도 안되지만 너무 겁내거나 쫄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한 곳만 집중하거나 하나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전체를 놓치게 되어 겁을 먹거나 쫄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열심히 좌우를 살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깝게도 멀리도 낮게도 높게도 보는 시야
확보가 우선이다. 그래야 나의 위치를 알 수 있고 세상에 쫄지 않고 맞짱은 아니더라도 당당히 맞설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뼈가 부러져 죽는 게 아니라 절망으로 죽는다 절망은 지옥의 말이다. 언제는 오는 오늘로 인해 세상은 희망을 말하지만 그 오늘이 지금의 오늘이 아니라 허황된 내일의 오늘, 지나간 어제의 오늘이 될 때 우리는 절망의 보균자가 된다. ‘바로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다면 그건 오늘을 허송하는 것이다. 다리가 부려졌든
희망이 사려졌든 나는 역사상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살아야 했다. .– p82
→ 산에서 조난 당하면 뼈가 부러져 죽지 않는다. 단지 부러진 상황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게 되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우리는 늘 오늘을 산다. 하지만
오늘이 ‘바로 지금 여기’가 아니면 안된다. 어제의 오늘이나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오늘을 사는 것은 허송세월을 하는 것이다. 다리가 부러져 있더라도 바로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만이 어려움의 오늘을 극복할 수 있고 희망의 내일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망은 희망이라는 백신에 맥을 추지 못했고 비전이라는 주사에 환부는 가라앉았다.– p87
세상의 값싼 가치에 털려 버린 나에게 산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경쟁에
내몰리고 저항 없이 살아가는 삶에서 일탈하라고 나를 부추긴다. 나를 깊이 선동하는 붉은 산들이 있다. 바삐 돌아가는 직장과 시간이 멈춘 듯한 산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산은
어떤 시간으로 살아야 할지를 알려준다. 그런데 절대 직선으로 말하지 않고 언제나 에두른다. 휘휘 돌아 올라 숨겨 놓은 메시지를 깨닫게 된다. – p99
→ 일상에 지친 직장인에게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조용히 지긋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다. 그리고 한 줌의 바람에 오라고 손 짓만 할 뿐이다.
우리는 직선으로 가고 최단 길로 가기를 원하지만 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서 언덕을 넘어서 깔닥고개를 넘어서 오라고
한다. 산은 직선으로 오기보다는 돌아 돌아서 오기를 바란다. 산
모퉁이에 산이 숨겨 놓은 신이 숨겨 놓은 메시지가 있다.
떠남은 원초적 유혹이다.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무언가에
대한 기대다. 이 기대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유혹했다. 인간의
역사는 이 유혹에 넘어가 홀연히 떠난 이들의 역사다. 길을 떠나고 현실을 떠나고 일상을 떠나는 데서부터
역사의 변곡점은 시작됐다.– p102
→ 떠나야 산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본토와 아비집을 떠나게 하고,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떠나게 한 것처럼 우리는 떠나야 한다. 익숙한
것에서 떠나야만 우리는 살 수 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사람이 역사를 만들었고 길을 만들었고
문화를 만들었다. 우리가 현실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떠나야만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고 발전할 수 있다.
‘지금’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바로 ‘오늘’이다. 오늘 물러서지
않는 것, 그것이 실천이라 믿는다. - p113
→ 지금은 멈추지 않는다. 잡으려고 해도 잡혀지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곧바로
지금은 과거가 된다. 지금을 잡는 방법은 물러서지 않고 맞짱을 뜨는 수 밖에 없다. 미룬다거나 나중이라는 말은 지금이라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이라는 단어는 ‘늘’이라는
항상성을 품고 있다. 그 항상성에서 ‘오’라는 감탄이 지루한 일상을 깨뜨린다. 그러므로 오늘은 지리멸렬하면
안 된다. 비록 우리 삶이 흔적에 지나지 않아도 그래서 오늘도 흔적의 흔적으로 끝나더라도 흔적조차 되지
못하는 바람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p114
→ ‘오늘’은 매일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단어는 하루 24시간동안만 유효한 것이기도 하지만
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늘 있다. 매일
주어지는 듯한 오늘인 것 같지만 늘 같은 것은 아니다. ‘오! 늘(항상)’에는 감탄과 영원한 것 같은 항상성이 있기 때문이다. 늘 감탄하고 새롭게 맞이해야 하며 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오늘’이 있는 것이다.
부르튼 입술이 결국 터졌을 때, 나는 불현듯 허리를 곧추세우고
정좌했다. 그제야 나를 찾아 나선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아차렸다. 두려웠지만, 내 앞에 놓인 내일부터가 진정한 내 영토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나는 오지로 들어서기로 했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나’라는 수수께끼 숲으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내 길이
아니다.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내 자신의 잠재력, 기쁨, 행복을 깨닫지 못할 것 같다.- p122
내게 근사한 저녁 한 번 산 적 없었다. 학교를 가라 해서
학교를 다녔고 돈 벌어야 사람 구실 한다 해서 취직을 했다. 그리하면 나도 여느 어른들처럼 훗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는 순간부터 나는 꼬박꼬박 월급을 받기 위해 회사 이익에만 충실하고
있었으며 이건 부잣집 종살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머리 젖히며 즐거워야 할 ‘지금’은 없고 보이지도 않는 미래가 지금을 가득 채웠다.- p112
→ 너는 누구에게 따뜻한 사람이었냐고 물었던 시가 생각난다. 우리는 정해진 트랙
위를 달리는 경주마처럼 살았던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해서 돈을 벌고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해서 결혼을 했다. 특히 직장 생활은 어떻게 보면 가난한 집 종살이나
부잣집 종살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 오늘을 즐기지 못하고 살기 때문이다.
나도 한번 춤추듯 살아 보리라. 다른 사람이 시켜서 사는
삶이 아니라 내가 내린 결정으로 내 삶을 한번 살아 보리라. 생의 단명한 그 맛을 나는 봐야겠다. 준비되지 않아도 해야 할 때가 있다. 아무도 내가 준비되기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저질러야 비로소 준비되는 때가 있다. 내 혀끝으로
맛보는 인생을 살리라. 실험으로 가득 찬 삶, 그 환장할
우연에 인생을 걸리라.– p126
→ 춤을 춘다는 것은 자신의 박자와 리듬을 탄다는 것이다. 자신의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비트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이다. 춤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어 추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가 내 안에 들어와 내 것이 되어야 진정한 춤이 되는 것이다. 내 박자에 맞추어 추는 춤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박자와 장단에 맞추어 정신없이 춤을 추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자연의 모든 것은 자신의 진동수와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내면이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진정한 내가 되고 살아날 수가 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얻기 힘든 것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른 이에게 산이 주는 깨달음은 없다.
얻기 힘든 것을 쉽게 얻었다면 그건 나의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얻기 힘든 것을 쉽게
얻으려 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다른 것을 잃는다. 에베레스트는 이하 일곱 가지 선물을 의문문으로 고쳐
여전히 나에게 묻고 있다.– p209
→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에 올라간 본 사람은 안다.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올라가야
올라가서 본 풍광이 다 내 것이 되고 모든 것이 감탄으로 바뀌는 것을 말이다. 편하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본 풍광은 사진으로 보는 풍광과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내가 땀을 흘려서 얻은 풍광이 아니라
남이 갖다 준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다.
길은 결국 정상에서 만난다.(그러나 질러간 사람은 못 만날
가능성이 높다. 빨리 가려는 사람을 히말라야가 받아 준 걸 본 적 없다.) 질러간다 해서 정상에 이르는 길이 짧아지는 건 아니다. 산은 빨리
오르는 자를 먼저 받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둘러 가는 이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p209
같은 길을 가더라도 이름 모를 풀과 바람과 얘기하고 눈부신 풍광들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 사람은 그러지
않는 사람보다 깊어진다. 사람들은 빨리 가는 얕은 사람보다 느리게 가는 깊은 사람을 좋아한다. 스토리가 없는 삶에 사람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진실한
두 가지가 있다. 자기 입으로 씹어 삼킨 밥과 자기 발로 걸어간 길이다. 밥은 먹은 만큼 내 몸을 살찌우고 발은 둘러 간 만큼 근육을 만든다. 인격
없는 인간이 볼품없는 만큼 근육과 상처 없는 밋밋한 민다리엔 아무도 업히려 하지 않는다. -p210
→ 산을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력을 거스르는 행동이기에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가는 도중에 많은 풀과 꽃,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많은 돌과 흙을 밟으며 올라가다 보면 많은 이야기 거리가 생긴다. 세상에는
자신의 힘,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것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자기
입으로 삼킨 밥과 힘들여 걸은 길만이 남는다. 그러다 보면 민다리가 근육이 붙은 짱짱한 종아리가 되고
근욱이 생겨 멋있는 몸이 된다. 우리 인생길은 우리에게 작은 상처를 주지만 나중에는 근사한 몸을 선물하는
것처럼 우리가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북극성에 닿을 수 없다. 그러나
북극성은 나침반의 끝을 떨리게 한다. 닿을 수 없지만 내 삶을 떨리게 만드는 삶의 북극성 하나를 상정하는
일은 지루한 삶을 중단시킨다. 계획은 사무적이고 목표는 가깝고 목적은 전략적이다. 꿈은 어떤가. 손에 잡히지 않지만 가슴을 뛰게 만든다.- p210
→ 나침반의 바늘은 북극성을 향해서 몸을 바르르 떤다. 어디서나 북극성을 향해
뱅글뱅글 돌다가도 어두워도 밝아도 늘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도 꿈은 이와 같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지나고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꿈은 우리를 늘 살아있게 전율시키고 힘들어 할 때도
우리 가슴을 떨리게 한다. 그리고 가만히 우리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게 하는 힘이 있다.
시냇물은 숱한 시간을 들여 산을 무너뜨리고 강장동물은 대룩을 만든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바위를 뚫고 한 걸음이 이어져 정상에 닿는다. 주어진 일이 사소한
일로 채워져 있다 원망 말고 오늘의 힘을 믿어라 잗다란 삶이라 폄하 말고 매일의 힘을 믿어야 한다. 오늘
내딛는 한 걸음이야말로 캠프와 캠프를 잇는 문지방이다..- p211
인생에 겨울은 반드시 온다. 화려했던 시기의 기쁨만큼 똑같이
하강을 겪는다. 인생의 겨울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극한 ‘번 아웃’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우리는 인생의 겨울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즉 자기 갱생을 위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 필요한 것이다. –
p216
→ 겨울이 없는 인생은 없다. 겨울이 깊어야 봄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인생이 겨울이 찾아올 때는 겨울이 주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겨울은
모든 것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봄이 오기 까지 내실을 다지는 시간을 선사한다. 계절이 주는 참 의미는 인생을 더욱 잘 살게 하는 데 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겨울, 새로운 것이 오기 전에 우리는 겨울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 그 시간은 그 자리에서 지나온 봄,여름,가을, 초겨울을 돌아보고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을 준다.
딴짓
끝판왕이 제안하는 여섯 가지 불온한 업무
하나. 긴 여행은 회사 다닐 때 하라.
- 우리를 질리게 하는 일상에 나와 르네상스가 들어설 자라는 여행이다.
바로 지금이다
둘. 딴짓에 열중하라.
- 일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는 장소와 시간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자.
셋. 스승과 벗을 찾아 나서라.
- 스승과 벗은 미래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는 최신 버전의 소프트웨어를 우리의 정신에 깔아 준다.
넷. 차선을 선택한 결과가 지금 당신의 모습이다.
- 최선은 자신이 시킨 일이고 차선은 남이 시킨 일이다. 관습과
사례를 무시하고 최선인가를 따져 묻자.
다섯. 벼랑에 서라.
-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도 죽지 않는다. 쫄지 말고 지금
당장 아주 위험한 일 하나를 도모하자.
여섯. 지금의 속도와 시간을 부정하라.
-
성급함은 마귀에서 나온다. 느리더라도
그 나름의 폭과 부피를 가진 심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3. 이 책을 읽고
책의 제목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딴짓’을 해도 괜찮다고 한다. 어디서? 회사
다니면서 말이다. 대부분의 직장이라고 하면 이렇게 들릴 것이다. 너무
회사 일만 하지 말고 딴짓도 하면서 살라고 말이다. 책 표지에 먼 산을 바라보는 배낭을 맨 곰 캐릭터가
다름 아닌 직장인 아니 나 자신이 아닌가 싶다. 배낭에 침낭이나 물컵과 로프를 들고 힘들에 산을 올라서
보니 올랐던 산이 이 산이 아니고 앞에 보이는 산이 목적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리라.
우스개 소리라 ‘이 산이 아닌가 봐’하는 자조 섞인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런 감정과 생각이 들 때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내 기억으로는 회사에
입상에서 5-6년이 지난 때, 회사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갈
때와 나중에 몇 번의 같은 시기에 딴 곳을 쳐다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지금까지 24년간의 직장 생활을 지나 25년 차로 접어들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정말로 ‘딴짓’을 했다. 그것도 열심히 말이다. 딴짓도
여러 가지를 한 것도 아니다. 오직 한가지만 했다. 산이
좋아서 산이 불러서 산에 가고 싶어 산에 가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것도 산에 가기 위해 연습하던
중에 왼쪽 발목과 아킬레스 건이 심하게 다쳐도 그 딴짓은 계속되었다. 아마도 그것은 강한 중독성이 있었나
보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그안에 감추어진 ‘춤’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의 몸이 아니고 결혼하고 아이의 아빠가 되어서도 그 안에 감추어진 나침반의 바늘은 늘 산을 향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산을 향한 그 마음이 딴짓을 계속하게 했다. 바쁜 회사생활을 하고 주말을 온전히 죽을 것 같은 특공대 훈련을 하더라도 그 열정을 계속 뜨거워지기만 했던
것이다. 나도 이런 때가 있었다. 한 때는 변리사가 되기
위해서 약 2년동안 주말을 반납하고 천안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주말을 온전히 민법 법전과 특허법을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학원 공부를 마치고 주말에 다시 천안으로 내려가서 회사 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 하라고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자가 에베레스트에 가기 위해 직장 상사의 허락을 구하는 과정은 생생하게 다가온다. 산이 부르는 부름을 거절하지 못해 모든 것을 걸고 사표를 쓰고 다니면서 산에 가고 싶어한 마음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우리가 해야 할 “딴짓”중에 “딴짓”이다. 같은 산악반을 했던 아내조차도 다 이해하지 못한 그 마음이 전해져 온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것을 걸만한 큰 한 방의 “딴 짓”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모든 것을 다 내 던지고 하고 싶은 ‘딴
짓’이 무엇인지 물어봐야 한다. 죽어서 신 앞에 갔을 때
세상 소풍을 잘 마치고 왔노라고.
얼마 전 지인과 식사할 때 들은 이야기다. 외국 여행 때
탄 비행기가 작기도 하고 너무 흔들려서 비행기가 추락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홀로 마음이 편안하더라는 것이다.
지인은 ‘그래 인생을 잘 살았어. 살만큼 살고
재미있게 후회없이 살았던 것 같아. 죽더라도 사랑하는 남편이 같이 비행기를 타고 있으니 같이 죽어도
후회 없다’고 말이야. 만약에 낙하산을 양보해야 한다는 기회가
온다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이처럼 후회 없이 딴 짓을 시간이 날 때마다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 늘’을
살아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를 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오늘을 못 살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산에 오르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와서도 그는 매 순간 목숨을 걸었다. 딴 짓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고산병에 시달리면서도 높은 고도에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적응을 하면서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딛었다. 오히려 산소가 없는 곳으로 걸어갔다. 엄청 추운 곳으로 올라갔다. 이것은 숨쉬기 편하고 따뜻한 곳이 아닌
곳으로 반대로 갔던 것이다. 이렇게 ‘딴 짓’의 힘은 컸다.
산에 올라 그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왜 삶을 살았는지
알았던 것이다. 그 딴짓을 하고 나서야 삶이 바뀌었다. 아마도
그것은 임계점을 넘은 사람만이 알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전자가 궤도를 이탈하려면 이탈 에너지를 축적해야만
가능하듯이 에베레스트란 ‘딴짓’이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했던
것이다.
나도 삶에 ‘딴 짓’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 딴 짓이 저자처럼 강하게 불러 들일수도 있지만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면서 그 무엇이
부르는지 말이다. 그리고 찾았다고 하면 발목이 산산 조각이 나고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아픔이 겪더라도
참고 견디어서 꿈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마도 그것은 마약보다 더 강한 중독성이
있는 “꿈”을 찾아서 말이다.
직장인에게 있어서 ‘딴 짓’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1. 직장인에게 딴짓은 돌로 쌓은 담벼락의 ‘숨구멍’과 같다.
제주도에 가면 많은 돌로 쌓은 담벼락이나 무덤 주위의 벽을 볼수 있다. 돌로 쌓은 담벼락은 촘촘히 돌로만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돌과 돌사이에 구멍이 나있다. 그 사이로 제주도의 바닷바람이 지나간다. 그 숨구멍이 없다면 제주도의
담벼락은 다 무너졌을 것이다. 이렇듯 직장인에게 있어서 ‘딴짓’은 숨구멍이다. 그 숨구멍으로 스트레스가 지나가게 하고 때로는 한숨과
좌절도 지나가게 하고 듣기 좋은 음악 소리도 지나가게 한다.
2. 직장인에게 ‘딴 짓’은 나침반을 떨리게 하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다.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북극을 향해 움직인다. 어디에 있던, 불빛이 있던 자신이 띠고 있는 자성에 의해 항상 북쪽을 향해 가르킨다. 직장인에게
있어서 딴짓은 회사 업무와 스트레스에 짓눌려 살더라도 가끔씩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파르르 떨게 하는 북극성 같은
존재이다.
3. 직장인에게 ‘딴 짓’은 에베레스트의 ‘베이스 캠프’이다.
에베레스트를 포함한 모든 높은 산은 산 아래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차근 차근 준비하는 기지가 따로 있다. 먹을 식량과 필요한 장비, 그리고 인력을 다 함께 모여서 정상 등반을 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 베이스 캠프이다. 직장인이 자신의 꿈을 잊지 않고 늘 준비하고 필요한 것을 모아 놓은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한다. 베이스 캠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 그리고
돌아갈 곳이 있고 다시 출발할 힘을 주기 때문이다.
4. 직장인에게 ‘딴짓’은 ‘산소통과 산소 마스크’이다
깊은 바다에서 고무 호수를 연결하고 작업하는 잠수부를 머구리라고 한다. 그 머구리에게 생명줄은 다름아닌 배 위에서 공기를 공급하는 고무 호수이다. 직장인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숨을 돌릴 수 있는 산소통과 산소 마스크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려운 환경속에서 일을 하더라도 꿈을 잃지 않고 버티게 해주는 산소통과 산소마스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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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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