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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piter13
  1. 비너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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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미’의 거실은 여전히 아늑하고 포근했어.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져서 놀던 커다란 소파와 도라의 지정석(이제 도라도 이곳에 오지 않으니 다른 아이의 차지가 되었을) 흔들의자와 푸른 잎을 드리우고 있는 커다란 나무 화분들 사이에는 현신의 모습이 없었어.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층으로 올라가보았어. 마침 현신이 욕실에서 막 나오고 있었어. 그는 날 보더니 조금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어. 역시 어른.


 


  “여길 떠난다는 게 무슨 소리죠?”


 


  “양나 씨가 얘기하든?”


 


  “네.”


 


  “나도 여길 떠날 준비가 된 것뿐이야.”


 


  “어디로…… 어디로 가죠?”


 


  나는 바보처럼 울먹이고 있었어. 역시 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나, 나는…… 알아야 해요. 내가 갈 테니까, 반드시 당신을 만나러 달려갈 테니까.”


 


  “성훈아.”


 


  “지금은, 지금은 아니라고 당신이 말하니까, 기다릴게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나는 흐느껴 울었어. 지금 그가 아니면 안 된다는 내 감정이, 왜 언제나 이렇듯 허무하게 부정당하는 거지? 어차피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도 없는 모호하고 이상한 감정에 휘둘려서는, 아프고, 울고, 쓰리고, 그러다가는 잠깐 기쁘고, 다시 아프고, 울고, 쓰리고. 내가 정말 어리고 철이 없어 이렇듯 당신을 사랑하는 거라면, 나는 절대로 어른이 되고 싶지가 않아. 언젠가의 내가 지금의 이런 나를 부끄러워한다면, 그 언젠가의 나도 또 언젠가의 나에게 비웃음 당할 것이고, 결국 나는 언제까지나 내 감정을 부끄러워하기만 한 채 진심을 꽁꽁 숨기고 살아가야 하겠지.


  현신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어. 안타까운 듯, 조금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느낌.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어.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달래주는 듯한 포옹이 아니라 연인이 연인을 안아주듯이. 내가 팔을 둘러 그를 끌어안자 우리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었어. 뜨겁고 흥분되고, 어지러운 느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고 다시 밀려들었어. 이상도 하지. 그렇게 불안하면서도 그토록 편안해. 나는 그에게 키스했고 그도 나에게 키스했어. 나는 빨려 들 듯 그에게 달라붙었지만 그는 부드럽게 나를 떼어놓았어. 둘 다 호흡이 거칠었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어.


 


  “성훈. 나중에 다시 얘기해.”


 


  현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어.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 그래서 입을 굳게 다물고, 팔짱을 낀 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어. 나는 그 순간 결심했어. 그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현신이 무척 피곤해 보여서 나는 그를 억지로 소파에 앉혀놓은 뒤 주방으로 들어갔어. 발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 냉장고를 열어 계란과 버섯, 토마토, 양파, 피망 같은 것들을 꺼내 오믈렛을 만들면서도 비현실적인 감각이 내내 나를 지배했어.


  막 오븐에서 오믈렛을 꺼내는데 양나 씨가 들어왔어. 그녀는 와인을 한 병 땄고, 현신과 나 둘 사이에 흐르는 달뜬 공기를 철저히 모르는 척했어. 우리 셋은 식탁에 둘러앉아 큼직하게 자른 오믈렛을 앞에 두고 와인 잔을 들어 하나의 출산을 축하했어. 양나 씨는 무엇보다 ‘사랑의 밤’ 파티를 열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했어.


 


  “그날은 무조건 파트너 동반이야. 하다못해 개미 새끼라도 한 마리씩 달고 오라고 할 거야.”


 


  “양나 씨도 아직 싱글이잖아요?”


 


  현신이 웃으며 말했어.


 


  “날 무시하지 말라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까지 파트너를 구해올 테니까.”


 


  “그래요. 기대할게요.”


 


  “소년! 아무리 입시가 바빠도, 꼭 참석할 거지?”


 


  “그럼요.”


 


  “으이구, 이쁜 것. 나도 너 같은 아들이 있음 정말 좋겠다.”


 


  양나 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어. 그럴 때의 그녀는 정말 쓸쓸해 보여.


 


  “운수도 오라 그래야지. 걔 요즘 연애중이라며?”


 


  “그렇긴 한데, 한 번도 본 적은 없어요.”


 


  “잘됐네. 이번 기회에 얼굴도 좀 보고 하면 좋지 않겠어?”


 


  “글쎄요. 엄마가 뭐라 그럴지는 저도 잘……”


 


  “하여간에 옛날부터 음흉하기는. 나도 네 아버지를 한 번도 못 봤어. 그래도 당시에는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그래서, 소년. 애석하지만 네게 말해줄 게 아무것도 없단다.”


 


  “괜찮아요. 별로 알고 싶은 것도 없고.”


 


  “그래.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지금 네 곁에 있는 것들이 가장 중요해.”


 


  양나 씨가 그렇게 말하자 현신은 씁쓸하게 웃었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와인 잔을 만지작거렸어.


  양나 씨는 시간이 늦었으니 ‘북경’은 여기에 두고 버스를 타고 가라고 했어. 그러고는 현신에게 터미널까지 좀 바래다주라고 했지. 그래서 나는 현신의 자동차에 올라탔고 그와 함께 애미를 나왔어. 현신은 운전을 하면서 음악을 좀 듣겠느냐고 물었어.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어.


 


  “양나 씨가 정말 그렇게 빨리 새로운 연인을 구할 수 있을까요?”


 


  “글쎄.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만남의 기회가 그리 많지를 않아서. 선택의 폭도 좁고. 특히 양나 씨처럼 이런 외진 곳에 있다 보면 더 힘들겠지. 하지만, 누구나 그럴 거야. 정말 인연을 만나는 건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모두 힘들고 어려운 일이야. 양나 씨는 그런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현신의 자동차가 멈춘 곳은 시외버스 터미널이 아닌 그의 진료소 앞. 그는 시동을 끄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어.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에?”


 


  그는 변명하듯 덧붙였어.


 


  “많이 늦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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