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너스에게

jupiter13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0.10.29
나는 감히 소리를 내어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어.
“먼저 엄마에게 연락드리렴.”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시간이 늦어 하룻밤 묵겠다고 했어. 엄마는 선선히 그러라고 했지. 최근 양나 씨와 엄마의 관계가 예전의 우정을 회복하는 수준으로 좋아졌기 때문. 엄마는 날더러 양나 씨에게 잘해주라고 한 적도 있었어. 외롭고 힘든 애야, 그러면서. 사실 양나 씨도 엄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현신은 ‘애미’에서 샤워를 했기 때문에 나만 몸을 씻었어.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불러들인 건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밤은 사랑의 밤, 분명한 건 내가 그를 원하는 것처럼 그도 날 원한다는 것. 얼마나 많은 우연과 인연이 겹쳐야 이런 순간을 만날 수 있는 거지? 흐르는 시간 안에는 상처뿐만 아니라 이러한 보석 같은 순간도 숨겨져 있다는 사실. 누구 손에서, 어떤 순간에 빛을 발할지 모르니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봐야 해. 함부로 가볍게 여기지 말고, 함부로 무시하지 말고, 함부로 절망하지 말고, 그러면서도 함부로 기대하지는 말자. 현신의 말처럼 영원한 건 없고,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두 언젠가는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게 되어 있으니까.
“내 첫 경험은 끔찍했어.”
현신이 침대에 걸터앉아 내 양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말했어.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좀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항상 있지.”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현신이 조용히 웃었어.
“그래. 네가 첫 경험을 추억할 때마다 정말 좋았다고 생각하게 해주고 싶어.”
그가 내 양손에 번갈아 입을 맞추었어. 그의 가슴에서 따듯하고 규칙적인 심장 박동소리가 들려왔지. 그 소리가 이 세상 무엇보다 나를 행복하게 했어.
나는 새벽녘에 잠깐 잠이 깼어. 현신이 바로 옆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어. 몸이 밀착된 부분이 더없이 따스했고,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감겼어.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한참을 바라보았어. 비너스. 내가 정말 운이 좋았다는 걸 나도 알아. 앞으로 현신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든, 나는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기억할 테지. 아무리 영원한 건 없다지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은 고이게 마련이니까. 나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어.
*
양나 씨가 공언한 대로 ‘사랑의 밤’을 연 건 그로부터 한 달 뒤. 시끌벅적한 파티가 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그것은 양나 씨의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모은 조촐하고 화목한 소모임이었어.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나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나보았어. 레즈비언 커플 두 쌍이 왔고, 게이 커플도 한 쌍 있었어. 현신과 나도 커플로 참석했으니 게이 커플이 둘인 셈. 그리고 스트레이트 커플 한 쌍, 외로운 싱글 세 명. 그들은 절대로 혼자서는 오지 말라는 양나 씨의 협박 때문에 자신들의 애완동물을 데리고 왔어. 그래서 고양이 한 마리와 개 두 마리까지 참석. 엄마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어.
“난 양나의 친구들이 항상 불편했어. 지금도 아마 그럴 테고. 너나 가서 재미있게 놀다 와.”
“그날 엄마는 뭐 할 건데?”
“데이트.”
이번엔 정말 괜찮은 상대인 것 같냐는 내 질문에 엄마는 어깨를 으쓱했어.
“항상 상대가 문제였던 게 아니야. 내가 변함이 없다는 게 문제지. 그리고 난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지 마.”
현신은 어른이야, 비너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고.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 나는 그에게 한 말을 잊지 않고 있어. 지금이 아니라면 기다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을 찾아갈 거라고. 나는 현신과 연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그 말을 되뇌고 있어. 아무리 사랑이 대단하다 한들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 묶을 수는 없기 때문이야. 억지로 멈추려 드는 순간 사랑도 끝이 나겠지.
양나 씨의 파티에 모인 게이, 레즈비언, 스트레이트, 바이 들은 아무런 편견이나 오해의 소지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표현하고, 농담을 던지고, 즐겁게 웃었어. 나는 그 파티에서 나온 많은 말들이 일반적인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심지어는 내 가장 친한 친구 영무와도 절대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나는 아마 앞으로 말할 수 있는 것보다는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훨씬 많을 것이며 그로 인해 종종 거짓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오직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양 징징대지는 말자. 세상 그 누가 자신의 깊이를 모두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안에 숨겨진 감정의 소용돌이를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어. 그것은 나뿐 아니라 모두가 지고 가는 천형의 무게,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한 평생 답해야 하는 삶의 묵직한 질문일 테지. 그렇다 해서 ‘사랑의 밤’이라는 양나 씨의 파티가 무의미하거나 허무한 것도 아니야. 현신과 나는 나란히 앉아 가끔씩 손을 잡으며 서로의 눈을 보고 이야기했어. 그리고 현신은 가끔씩 몸을 기울여 나를 안아주었어. 아마 우리는 길을 걸으며 손조차 마음대로 잡지 못할 테지만, 우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러한 시간과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존재의 의미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사는 게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될 거야. 지금의 내가 서서히 깨달아가듯.
파티가 끝난 후 우리는 현신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었어. 나는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그를 안아주고, 그는 마지막 사랑인 양 나를 안아줘. 정말로 그렇게 되는 것은 단지 우연과 시간의 결과물. 하지만 그런 것인 양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사랑의 결과물. 모든 현명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사는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니까, 우리는 우연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사랑을 하고 있는 거야.
엄마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미성년자 한정이라고 했어. 내가 성년이 되려면 아직 2년하고도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내가 할 일은 무언가를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듯 내 삶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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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