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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n8236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9.11.23
1859.5. 22~1930.7.
영국의 추리작가.
국적 : 영국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영국 에든버러
■기본적 사항
코난 도일은 1859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시 피커디 플레이스에서 아버지 찰즈와 어머니 메어리의 넷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찰스 에드몬드 도일은 에든버러시의 건설 사무소 공무원으로 일요일에는 그림을 그렸고 어머니 메리는 프랑스어가 특기고 취미는 문장(가문,단체 등을 상징하는 표시)학이었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저명한 시사만화가였고 그의 작은아버지 역시 풍자 잡지 [펀치 Punch]의 표지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도일이 대학에 다닐 때에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입원했고, 가족은 가난한 생활을 해야했다. 도일은 한때 성직자를 목표로 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장학금을 받고 에든버러 의과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후 의사 자격을 얻어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는 화물선 선의로 승선했고, 1882년 포츠머드시의 변두리인 사우드시라는 곳에서 병원을 개업 했다. 그러나 환자가 찾아오지 않아서 한가할 때 글을 써서 잡지에 투고해 그 원고료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에든버러 의과대학 시절 "진단에는 눈과 귀와 손과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치며 진찰실에 들어온 환자가 말하기도 전에 무슨 병이라는 것을 알뿐만 아니라, 증상에서 지금까지의 생활 태도까지도 학생 앞에서 맞춰 보이곤 했던 은사 조셉 벨 교수를 모델로 한 추리 소설을 써보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하여 1886년 사립탐정 셜록홈즈와 그의 절친한 친구며 조수인 와트슨이 등장하는 홈즈 이야기의 첫 작품 "주홍색 연구"가 완성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출판해줄 곳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고 1887년 간신히 원고료 25파운드라는 조건으로 비튼의 크리스마스 애뉴얼(Beeton's Christmas Annual)'에 발표할 수 있었으나 반응역시 거의 절망적이었다. 그러던 중에 미국의 리핑코트잡지사(Lippincott’s Magazine)의 편집자가 <주홍색 연구>를 읽고 홈즈와 와트슨이 활약하는 추리소설 속편을 써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래서 도일은 제 2작인 <네 개의 서명>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굉장한 호평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후 도일은 당시 안과 학의 중심지였던 빈으로 유학을 갔고 1891년 3월 돌아와서는 베이커가에서 가까운 어퍼 윔폴 가에 안과 병원을 개업했지만 여전히 환자는 없었다. 결국 저술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도일은 A.P왓트라는 인물을 매니저로 삼아 자신의 원고 판매를 맡겼다.
그러자 운좋게 막 창간된 잡지<스트랜드 매거진>에 단편을 연재하게 됐다. 그 첫 작품이<보헤미아의 스캔들>로 매달 1편씩 1년에 걸쳐 연재된 작품들은 큰 인기를 끌어 잡지의 매상도 올라가고 도일의 원고료도 인상되었다. 처음 여섯 작품의 원고료는 모두 200파운드였지만, 홈즈의 인기가 높아지자, 출판사는 그 다음 여섯 작품에는 300파운드를 지불하고 계약을 연장했다.그리하여 1892년에는 처음 발표된 12편의 단편을 모아 <셜록 홈즈의 모험>이 출판된다. 도일은 열 두 작품으로 홈즈의 이야기를 끝내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 때 도일이 제안한 것이 다음 열 두 작품에 1000파운드의 원고료를 지불한다면 계속쓰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엄청난 제안에도 불구하고 출판사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국 도일은 24번째 단편인 <최후의 사건>에서 홈즈를 악의 제왕이자 범죄계의 나폴레옹 모리아티 교수와 대결시켜서 스위스의 라이헨 바흐의 폭포에 떨어뜨려 죽게 만든다. 당시 독자들의 슬픔은 굉장해서 사람들은 홈즈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장을 달고 다녔으며 출판사에는 항의 편지가 쇄도했다. 그러나 도일은 홈즈 이야기를 다시 쓰지 않고 자신이 자랑하는 능력을 발휘하여 .역사소설에 전념하였다.
1899년 10월 보어 전쟁(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둘러싼 전쟁)이 발발하여 도일은 남아프리카 전선에 군의로 파견되었고, 그 뒤 1900년 이 전쟁에서의 체험을 기초로 한 <보어 전쟁>과 <남아프리카 전쟁, 그 원인과 행동>등의 전쟁 기록물도 발표했다.1902년 보어전쟁이 끝나던 해 8월에 도일에게는 국가 사회에 대한 적극적 공헌이 인정되어 기사(Knight)의 작위가 주어졌다.
<마지막 사건>발표부터 8년이 지난 1901년 1월,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몸의 상태가 나빠진 도일은 친구 플레처 로빈슨의 권유로 노포크 주의 크로마라고 하는 온천장에서 휴양하고 있던중 그 때 로빈스에게 들은 다트무어의 마견 전설에서 <바스커빌 가의 개>를 구상했다. 도일은 즉시, 다트무어에 가서 현지 취재를 하고 홈즈 이야기를 다시 쓰기로 했지만 홈즈를 폭포에서 살리고 싶지 않아, 이 사건은 <마지막 사건>보다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설정되어 있다. 당시 독자들의 감격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홈즈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독자들의 성화에 못이겨 결국 1년이 지난 1903년 도일은 홈즈 생환 제1작인<빈집의 모험>에서 와트슨 앞에 헌 책방 주인으로 변장해 나타나게 함으로써 스트랜드 매거진에 연재를 재개했다.
홈즈라는 불멸의 인물의 창조로 도일의 작가로서의 지위는 확고해졌으며, 인기도 얻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일은 추리소설 작가라고 불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역사소설가라고 스스로 칭하고 있었다. 실제로 도일은 역사소설, 과학소설 등을 집필했으며 현재까지도 고전적인 과학소설로 꼽히고 있는 <잃어버린 세계 The Lost World,1912>, <마라코트 심해 The Maracot Deep 1929>등이 있다. 1906년 결핵에 몸져 누워 있던 아내인 루이즈가 사망했고, 1년 뒤에 14세 연하의 지인 래키와 결혼하여 서섹스주로 이사했으며 여전히 집필과 공적 활동이 계속되었다.
1차 대전 끝무렵인 만년에는 심령론을 신봉하며 심령술 연구에 빠져서 그 선전을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또한 1903년 일어난 기괴한 연속 동물 살해 사건과 1912년에 일어난 <오스카 슬레이터 사건>이라고 하는 살인 강도 사건의 용의자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비로 계속 싸워 승리하는 등, 수많은 실제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도일은 1928년 69세의 나이로 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 돌며 강연하다가 1930년 북유럽의 여행에서 돌아온 후 심장 발작을 일으켰는데 그 뒤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윈돌섬의 자택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 도일의 인간과 작품세계
아서 코난 도일은 1859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스티븐슨보다 9년 늦게 태어난 셈이다. 아버지 쪽의 조상은 오랜 옛날 노르만인의 자손으로 후에 아일랜드에 영토를 갖는 경건한 카톨릭 교도로서 알려졌다. 조부인 존은 유명한 정치풍자 만화가로, 집안에서는 '존 경(卿)'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네 아들도 모두 손재가 뛰어나 둘째 아들 리처드는 풍자잡지 <핀치>의 인기 화가이고, 삼남인 헨리는 후일 더블린 국립 미술관의 관장이 되었다. 아서의 아버지인 막내아들 찰스 도일도 *재가 있어서, 본업인 에든버러 토목사무소의 일을 보는 한편으로 꾸준히 그림을 그려 왔는데, 처음에는 목가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나중에는 그의 불우한 심상을 베껴내기라도 하듯 점차 괴기한 환상*를 그리게 되었다.
어머니 메어리는 하숙집 딸로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문장학(紋章學)에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가난한 가운데서도 위로 올라갈수록 찬란히 빛나는 조상의 혈통에 대한 높은 긍지로, 그 금빛 사자의 문장에 빛나는 플란타지넷 왕조의 옛날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가명을 빛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아서 소년에게 들려 주곤 했다. 아서는 이 두 사람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하트 저널>의 편집장으로 저명한 미술 평론가인 백부 마이켈 코난의 이름을 따서 그의 이름이 지어졌다. 이 백부는 소년 교육에 일가견이 있어서 일찍부터 아서에게 그림책 등을 주었고. 5세 때, 검이나 총으로, 벵골의 호랑이를 용감하게 동굴까지 추적해 가는 이야기 등을 썼을 때는 이만저만 기뻐하지 않았다.
9세 때, 이 백부의 권고로 소년은 스토니허스트에 있는 제주이트회(會)의 훗더 학원에 들어갔고, 3년 후에는 스토니허스트 칼리지에 입학했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대체적으로 행복했던 것 같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윌터 스콧의 소설은, 일찍부터 역사를 좋아하는 그에게는 애독서의 하나가 되었는데, 백부의 권유로 읽기 시작한 마코레의 역사는, 자유 분방한 그의 상상력에 더 큰 날개를 달아 주었다. 이런 그에게, 학교 시절 중 가장 큰 모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찾아왔다.
1874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백부가 그를 런던으로 초청해 준 것이다. 15세의 소년은 혼자 런던에 가서, 리처드 백부의 아틀리에를 근거로 거대한 수도 런던을 탐험한다. 먼저 최대의 목적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마코레의 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안개에 싸인 가스등에 떠오른 밤의 거리, 런던탑의 여러 가지 고문 도구, 수정관, 특히 매력을 느낀 것은 마담 터소의 납인형이었다.
"나는 공포의 방이나 살인범들의 용모를 깊은 흥미를 갖고 보았습니다."
그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당시 이 납인형관이 베이커가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한 일치로써 매우 흥미 깊다. 그는 두려워했던 것과는 달리, 대학 입학 예비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1875년 가을, 교장의 추천으로 스위스에서 가까운 오스트리아의 페르트키르히에 있는 제주이트회會의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소년은 스토니허스트에서 지은 시(詩)를 모아 파리의 코난 백부에게 보냈다. 이 노비평가는 소년의 양친에게 이렇게 단언했다.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그 애가 정성들여 쓴 글을 읽어 보았는데, 그야말로 독창적인 신선함과 고아(高雅)한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애는 뛰어난 정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서는 페르트키르히에서 돌아가면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하리라 마음 먹는다. 그것을 제안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서 자신은 어떤 길로 나아가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해보면 의사란 직업도 의외로 재미있으리라는 생각 정도였다. 이 페르트키르히에 머무는 동안 그에게 있었던 가장 큰 충격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이었다. 처음 읽은 작품은 <황금충>이었다.
후일 그는, 마코레와 스콧을 제외한다면, 이 작가만큼 자기의 문학적 경향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고 술회했다. 오로지 포만을 생각하면서 에든버러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파리의 코난 백부를 방문했다. 넓은 얼굴, 짧게 깍은 반백의 수염, 가느다랗게 뜬 오만한 눈, 이러한 백부의 용모는 흡사 고귀한 전통을 가진 아일랜드의 한 족장이었다. 백부의 존재는 혈통의 긍지를 일깨워 소년을 흥분시켰다. 마로니에의 그늘에는 화려한 파리의 거리가 있었다. 그의 마음은 에든버러로, 양친에게로, 누나와 누이동생, 남동생에게로 쉬지 않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서서히 청년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 모험과 자유
1876년 가을, 아서는 에든버러 대학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는 강의 시간이 아니면 학생과 교수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독자적인 학문 분야와 색다른 특징을 가진 교수가 많이 있었다. 앗시리아인처럼 검은 턱수염을 기른 라더포드 교수, 생물의 새 형태를 연구하기 위해 전세계의 바다를 탐험한 C.W.톰슨 경(卿)도 있었다.그 중에서도 외과 담당 조제프 벨 교수. 그는 비쩍 마른 장신에 검은 머리가 항시 위로 뻗쳐 있는데, 진단을 할 때는 눈과 귀와 손과 머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무뚝뚝하게 가르쳤다. 환자가 들어오면 교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왼손잡이 구두 수선공이야."
기쁜 얼굴이 되려는 걸 애써 감추고,
"잘 보게. 무릎 돌에 의해 골덴 바지가 닳아서 해진 데가 있거든. 그것도 오른쪽이 훨씬 더해. 그는 왼손을 쓰기 때문이야."
또 이런 말도 했다.
"이 환자는 니스칠하는 기술자야. 제군은 그의 냄새를 느끼지 못하나?"
아서는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항상 독서를 하고 있었다. 런던 대학의 헉슬리 교수를 존경하는 학생들 사이에 옛 신학에 대한 조소가 번지고 있었다. 아서도 해부실의 알콜 냄새 속에서 그 분위기를 느꼈다. 해부실에서는 인간의 육체가 성령이 깃드는 곳이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1878년에는 가계(家計)를 돕기 위해 의사의 집에 견습으로 들어가 살았다. 런던까지 가서 의사의 조수 노릇을 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은 점점 나쁘게만 되어 갔다. 아버지는 완전히 늙었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다음해의 여름, 진짜 조수의 일을 맡았다. 한 달에 2파운드의 급료로. 그러나 그 해 봄에는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삿사 계곡의 비밀>이란 괴기단편으로, <첸버스 저널>지로부터 3기니를 받았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그는, <고레스소프의 유령농장> 등 몇 가지의 단편을 썼으나, <아메리카인 이야기> 이외는 모두 퇴짜를 맞았다.
그는 견디기 어려운 불안을 느꼈다. 자기를 가두어 놓고 있는 벽을 허물어뜨리고 싶었다. 1880년 2월에 증기포경선 호프 호에 선의로서 승선, 스피트베르겐 제도에서 북극해를 거쳐 9월에 에든버러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50파운드를 바쳤다. 1881년, 그는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앞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자기의 힘으로 개업 자금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8월에 아프리카 서안 항로의 여객선인 마얀바 호의 선의가 되어, 다음해 1월, 리버풀에 귀항했다. 이윽고 그의 장래 문제를 놓고 런던에서 친족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경건한 카톨릭 신자인 그들에게 있어, 불가지론(不可知論)을 믿고 있는 현재의 그는 이단자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미 그들하고는 타인이 된 것이다. 선의 자리는 없었다. 월급장이 외과의 자리도 없었다. 이런 시기에, 프리머스에서 외과의로 성공한 친구로부터 도와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1882년에 그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포츠머스 교외의 주택지 사우스드에서 개업했다. 가구는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유골>이나 <블루맨드다이크 협곡>을 사 준 <런던 소사이어티>의 편집장이 자기의 주머니돈으로 내준 고료의 착수금이 집세로 치러졌다. 하나 둘 환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대로 해나갈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1883년 7월, 괴기한 유조선 메어리 세레스트 호를 소재로 한 <하바쿡 제프슨의 진술>이, 문단의 권위인 <콘힐 매거진>지에 채택되었다. 더구나 다음해 무명으로 발표되었을 때는 한 비평가가 포와 비교하면서 스티븐슨의 작품일 거라고 추정을 하여 그는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개업하고 나서 2년 동안은 그다지 윤택하지는 않았으나 이렇다 할 변화도 없었다. 차츰 경기가 좋아져 갔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지는 않았다. <하바쿡>을 발표하고부터는 왕성한 의욕으로 연달아 새 작품을 써 냈다. 하지만 <콘힐>지는 무엇 하나 채택해 주지 않았다. 다음 1885년, 의학 박사 학위를 획득. 이해의 봄애 루이스 호킨스라는 여성을 알게 되어 8월에 결혼했다. 그녀의 남동생이 수막염에 걸려 그 최후를 지켜본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녀의 몰아적인 정숙함에 이끌린 것이다.
■ 과학적인 범죄학의 확립
결혼은 그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엇다. 본업인 의사도 개업 3년째부터는 수입이 배로 늘어났다. 창작도 멈추지 않아 단편 몇 편을 썼다. 그는 가보리오의 <루콕 탐정>을 읽었다. 윌키 콜린스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시대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새롭고 예리한 것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 사람의 탐정을 중심으로 한 장편 소설은 어떨까?
탐정의 모델은 에든버러에 있었다. 조제프 벨 교수의 추리가 환자를 놀라게 만들었듯 독자도 놀라게 만들 것이다. 그의 탐정은 범인의 추적을 정확히 과학적으로 하는 인물이 아니고서는 안되었다. 불행히도 과학적인 범죄학의 체계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좋다, 내가 탐정이라면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를 상상해서 체계를 창출해 내는 수밖에 없다.
서두는? 이 탐정 소설의 제목은?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름은? 포츠머스에서 의사로 있는 친구인 제임스 왓슨 박사라면 쓸 만할 것 같다.
탐정의 이름은 세리포드 홈스. 아니, 아일랜드계인 셜록이 좋겠다. 이렇게 해서 장편 제1작인 <주홍색 연구>가 형성되어 갔다. 셜록 홈즈라고 하는 개성적인 탐정을 주인공으로 하는 <주홍색 연구>는, 1886년 4월에 씌어져 이곳저곳의 출판사에 보내졌으나 모두 되돌아왔다. 이듬해 워드 록사의 <비튼의 크리스마스 연감>에 가까스로 수록 간행되었으나 독자들의 주시는 끌지 못햇다. 1890년에 발표된 제2의 장편 <네개의 서명>의 운명도 역시 같았다.
이것들이 출판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역사소설에 도전했다. 17세기 말, 카톨릭의 제임스 왕 치하의 역사 소설에서 중심 인물로 등장, 왕위 계승을 노려 반기를 든 몬마스공에 호응하여 검을 잡게 할 것을 생각하고, <마이카 크라크>를 쓰기 시작했다. 이 원고는 거의 1년 가까이 이곳저곳을 돌고 돌다가,1889년 2월에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한데 예상 외로, 간행돼 나오자 곧 비평계로부터 칭찬이 들어왔다.
이것에 힘을 얻은 도일은 중세의 기사도를 테마로 한 역사 소설 <백의단>을 발표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작가의 기대와는 반대로 일반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 무렵 그는, 자기가 나아갈 길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1890년말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비엔나로 눈[眼]을 연구하러 간 것도 그런 망설임의 증거였다. 귀국 후 그는 런던에서 안과 전문의로 개업했는데, 환자는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동안 인플루엔자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병상에서 일어나자 그는 의사를 집어치우고 저작만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교외인 사우스 노스로 이사하여 저작에만 전렴하게 되었다.
1891년 7월부터, 갓 창간된 <스트랜드>지에 도일은 홈즈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을 연재하기 시작했다.첫 작품은 <보헤미아의 스캔들>이었는데, 뜻밖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 도일은 일약 인기 작가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1893년에 이르기까지 2년 동안, 후일 <셜록 홈즈의 모험>과 <셜록 홈즈의 회상>의 두 단편집에 수록된 <붉은머리 연맹> <입술이 비틀어진 사나이> <얼룩무늬 끈> <녹주석보관 사건> <은성호 사건> <머즈그레이브가의 의식문> <해군조약문사건> 등, 오늘날 추리 소설의 명작으로 알려진 단편을 연달아 발표하여 명성은 갈수록 커져 갔다.
그러나 돌연 먹구름이 앞길에 드리워진다. 1893년 10월에 아버지의 부음이 날아든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가 옆구리의 아픔을 호소한다. 의사의 진단 결과 결핵으로 판명되었다. 그것도 급성이어서 앞으로 몇 달밖에는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스트랜드>지의 12월에 발표된 <최후의 사건>에서 홈즈를 폭포 밑으로 떨어뜨려서 연재를 중단하고, 가족과 함께 스위스의 라보스로 옮겨갔다.
■ 새로운 세계
홈즈물은 10년 후 독자들의 끈질긴 요청에 의해 다시 부활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그 동안 작가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나폴레옹 시대와 영국의 섭정 시대 역사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장편 소설을 쓰고자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든 아내의 보양을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 그는 미국에 강연 여행을 하기도 하고, <웨스트민스터 가제트>의 종군 기자가 되어 이집트 동란에 참가하기도 하고, 또한 1899년에는 보어 전쟁에 군의로서 종군하여, 1902년에는 그 공적으로 'Sir'의 칭호를 받았다. 도일로서는 조국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한 것뿐이어서 'Sir' 칭호를 사양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열렬히 원하므로 할 수 없이 그대로 수락한 것이다. 이런 분주한 공적생활 속에서도 도일은 새 역사 소설에 착수하고 있었다.
그는 쓴다. "3년 간, 나는 나폴레옹 시대의 문헌 속에서 살아 왔다. 꾸준히 거기에 전렴하다 보면, 그 이상한 마력이 있는 매혹적인 시대의 몇분의 1쯤은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무언가 가치 있는 책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은 야심을 따라기지 못햇다. 그러므로 오랜 흔미 끝에 나의 그와 같은 고심은 결국 조촐한 한 권의 무인 이야기책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조촐한 한 권의 책'은 아니었다. 후일 <용장 제럴의 공적>이나, <용장 제럴의 모험>등에 수록된 수많은 이야기는,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인을 훌륭하게 부각하고 있다.
1897년 3월, 도일은 제인 레키와 만난다. 도일은 38세, 제인은 24세이다. 두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 도일은 성자는 아니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잘 알 수 있듯, 그는 완고하고 격렬했다. 하지만 그는 한 여성의 남편으로서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환자였다. 그녀에게 상처를 줄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 그는 이렇게 맹세했다. "나는 악마와 싸운다. 그리고 이기는 것이다." 하고 외쳤다. 그의 가슴 속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이다. 비밀은 1906년, 아내가 죽을 때까지 지켜졌다.
1893년 이후, 도일은 악몽처럼 홈즈에게 쫓겨다니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이집트에서도 사람을 만나면 맨 먼저 듣는 것이 홈즈에 대해서였다. 도일 자신은 홈즈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독자의 요청에만은 응하리라 결심했다. 1901년 3월, 요양을 위해 노포크주 크로머의 온천장에 갔을 때, 동행한 친구 프레쳐 로빈슨으로부터 다트무어 고원의 전설을 듣고 <바스카빌가의 개>를 구상하게 되었는데, 여행하는 동안 계속 써 나가, 그 해 8월에서 다음해 10월까지 <스트랜드>지에 연재하였다.
1903년에는 미국에서, 만일 셜록 홈즈를 부활시킨다면, 앞으로 쓰고자 하는 작품 한 편 당 5천 달러를 제공하겠다는 요청을 받고 그는 침착하게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스트랜드>지의 10월호부터 다음해 말까지 <빈집 모험> <춤추는 인형> <여섯개의 나폴레옹상> <금테 코안경> 등이 계속해서 나왔다.
■ 회의와 모색
1906년 7월, 아내 루이스 사망. 49세. 생애중 가장 암담한 나날이었다. 다음해인 1907년 9월, 제인 레키와 결혼. 서섹스주 크로블로의 새 집으로 옮겼다. 이 해, 몇 년 전부터 인종적 차원에서 문제시되고 있던 가축 살해 사건 피의자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진범을 밝혀 내어 용의를 풀어 준다. 1907년, 콩고 내륙에서 있은 벨기에의 압제를 비난한, <콩고의 범죄>를 출판, 전세계에 콩고 문제를 호소한다.또한 1908년, 노처녀 길크라이스트 살해 사건의 용의자 오스카 슬레이터의 무죄를 주장한다 (1928년에 무죄 확정).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소설에 있어서도 장편 <공포의 계곡>이나 나중에 <홈즈 최후의 인사> <셜록 홈즈의 사건집> 등에 수록될 홈즈물 단편 및 <최후의 가리선> 등의 모험 이야기, 또한 첼린저 교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잃어버린 세계> <독가스 *> <마라콧 심해> 등의 과학 소설의 다채로운 필치를 발휘햇다.
특히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의를 높이기 위한 강연이나 집필에 여념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정부의 의뢰에 따라 프랑스 및 이탈리아 전선의 영국군 최전선을 시찰, 그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이 대전에서 아들 킹슬리 코난 도일 대위가 경부에 두발의 탄환을 맞은 뒤 인플루엔자로 병사하고 말았는데, 그 후 그는 모든 시간, 모든 정력, 모든 능력을 심령학에 바칠 결심을 했다. 심령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미 1887년에 나타났는데, 그때, 영매를 통해 사자(死者)의 말을 듣고 놀란 바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열중하기 시작한 것은 1916년부터인데, 이 해에 심령학 잡지 <빛>에 사자와의 교영을 믿는다는 글을 발표하고 나서 더욱 깊이 몰입해 들어갔다. 그래서 그는 심령학 관계의 책, 심령학 관계의 논문·기사 외에 다른 것은 너무 많이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사상에 의하면, 죽음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말해지고 있는 의미로 사람이 죽는 경우, 살아 남는 것은 물질적인 육체가 아니다. 그 물질적인 육체는 무덤 속에 누워 있으면서 최후의 심판일에 징벌이나 보수를 받기 위해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서 살아 남는 것은 영체-즉, 이 지상에서 가장 활발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때의 육체에 싸인 영혼이다. 이 영체는 -어떤 경우엔 즉시, 어떤 경우엔 잠깐 수안이 있은 다음 다른 세계로 떠난다. 이런 신계는, 세부적으로 정의된 일곱 개의 원칙 위에 성립해 잇다.
즉, (1) 신은 아버지라는 것. (2) 인간은 형제라는 것. (3) 인격은 살아 남는다는 것. (4) 사자와 교류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 (5) 개인적인 책임. (6) 보수와 징벌. (7) 영원한 전진. 그리고 이 영원한 전진이, 영체는 수많은 영계-즉, 순환과정을 거쳐 그리스도가 사는 최고의 영계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최후에 도달한 종교적 사상이었는데, 여기서 네 번째 원칙, 사자)와 교령하는 힘, 즉, 영매의 문제에 대해 많은 식자들로부터 논쟁이 집중되었다. 그는 장편과 기타의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오스트레일리아·아메리카·캐나다를 비롯하여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종교로서의 심령학 선전에 노력했다.
이렇게 해서 1930년 7월, 마침내 과로가 원인이 되어 쓰러졌다. 묘표에는 "진실의 검, 정의의 칼날"이라고 새겨졌다. 그는 심령학의 교의를 위해 마음도, 재산도, 마침내는 생명까지도 완전히 바친 것이다.
코난 도일은 근대 추리 소설의 확립자로서, 오늘날 불후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전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이만큼 사랑을 받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명탐정 셜록 홈즈를 주인공으로 하는 일련의 추리 소설에 의해, 그때까지의 범죄 소설에서 근대 소설의 한 장르로까지 추리 소설의 위치를 높혔다. 홈즈물의 과학적인 추리, 그리고 그것에 의해 풀려지는 수수께끼,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가지 트릭의 창안은 지금도 신선한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도일이, "소설가의 첫째 목적은,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데 있다. 이야기할 스토리를 갖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소설가가 되겠는가, 그 사람은 무언가 말할 만한 가치를 갖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면 다른 형식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을 때, 단순히 추리 소설 뿐만 아니라, 그가 본래의 목적으로 삼은 역사 소설이나 과학 소설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관점에서 도일 문학의 전체상을 새롭게 포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화들
- 아서 코난 도일이 살인을 했다(?)
아서 코난 도일이 죽은 지 70년 만에 살인죄로 조사를 받게 됐다. 명탐정의 작가가 살인범이라니 잘 어울리는 듯도 하고, 아이러니컬해 보이기도 한다. 코넌 도일을 살인범으로 지목한 사람은 심리학자 겸 작가인 로저 개릭-스틸인데, 그는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자신의 책 《배스커빌의 집 The House of Baskervilles》에서 코넌 도일이 친구에게서 책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개릭-스틸이 도일이 살인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1989년. 《배스커빌가의 개》의 무대가 됐던 다트무어의 데본마을 플레처 로빈슨의 집으로 이사오면서부터. 개릭-스틸은 로빈슨이 '악마의 개'를 모티프로 한 《다트무어의 모험》을 발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사에 착수했다.
그에 따르면 코넌 도일이 1900년 친구인 로빈슨의 집에 갔다가 '악마의 개' 전설을 듣게 됐고, 그것을 모티프로 한 작품을 1901년에 일부 발표했다는 것이다. 완성된 작품 초판은 1902년 출간됐는데, 로빈슨이 죽은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07년, 서른 여섯 살의 젊은 나이였고 사인은 장티푸스였다.
개릭-스틸이 로빈슨의 죽음에 의혹을 가진 이유는 세 가지. 로빈슨의 사인은 공식적으로 장티푸스였는데도, 죽어서 사망진단서를 받을 때까지 병원에 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장티푸스는 전염병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이 감염되게 마련인데, 로빈슨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세 번째 이유는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은 화장하는 게 당시 관례였는데, 그는 무덤에 고이 묻혀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죽은 곳은 런던이었는데, 시신을 싣고 이플펜까지 왔다는 것은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망하기 직전인 1907년 1월에 찍은 사진에서도 병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죽였을까. 그는 코넌 도일이 의대 출신이며, 작품 속에 드러나 있는 상당한 수준의 독극물 지식을 지적했다. 로빈슨은 매일 조금씩 독극물을 먹었고 그것이 누적돼 장티푸스와 유사한 증세로 죽은 것이다. 물론 공범자가 있었다. 로빈슨의 아내이자 코넌 도일의 정부였던 글래디스가 바로 공범자다. 개릭-스틸은 오래된 일이라 퍼즐 조각 몇 개가 모자라긴 하지만 도일이 확실히 살인범이라며 로빈슨의 부검을 요청했다.
개릭-스틸은 "코넌 도일의 책에 자신의 이름이 조금도 언급되지 않은 것에 대해 로빈슨이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자신의 정원사이자 마부였던 해리 배스커빌은 표지에 금박으로 적혀있는데 말이다." 하며 눙치며 이야기했지만 거기엔 작품의 아이디어를 훔치고도 시치미를 뗀 데 대한 비난이 담겨있다. 영국 경찰이 이 살인사건을 조사할 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 도일 경이 홈즈 시리즈에서 손을 뗀 이유
본래 코난 도일은 역사소설에 관심이 있어서 탐정소설에서 손을 떼고 역사소설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셜록 홈즈의 독자들은 도일이 탐정소설을 포기하는 것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든 시티 판 홈즈 전집의 『事件簿』서문에서 도일은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인기가 지나간 가수가 언제까지나 노래 무대를 떠나지 않는 건 그 이상의 추태가 없을 것이다. 나는 셜록 홈즈가 이런 꼴이 되었다가는 큰 일이라고 걱정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 그는 『주홍색연구』와 『4인의 서명』으로 이 세상에 데뷔한 인물이다. (이건 1887년에서 89년에 일어난 일이며, 단편 연작물 첫번째인 「보헤미아왕국의 스캔들」이 처음으로 <스트란드>지에 게재된 것은 1891년의 일이다.) 이러한 단편은 다행히 독자에게 애호되고 잇달아 요망되었으므로 오늘날까지 36년간에 56편을 헤아리게 되었다.
『모험』『회상』『귀환』『마지막 작별인사』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미 판을 거듭해 왔는데 과거 몇 해 동안에 발표된 나머지 12편이 여기에 「셜록호움즈」라고 제하여 간행되게 되었다. 호움즈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한복판에서 「모험」을 시작하여 단기간이었으나 에드워드 치세의 전시대를 통하여 활약을 계속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최초로 홈즈를 읽은 독자가 생존하고 있어서 그들의 자식들이 같은 『모험』을 같은 잡지에서 읽는 것을 보았다고 해도 결코 거짓이 아니다. 이거야말로 영국 국민의 인내와 성실의 두드러진 예이다.『회상』의 종말에서 나는 홈즈를 매장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나의 문학적 에너지를 단지 한 방향으로만 못박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창백하고 조각적인 얼굴과 사지를 늘어뜨린 모습이 나의 상상력 속에 과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즉 홈즈를 라이헨바하의 계곡에 추락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호움즈의 시체를 검시한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긴 중단기간(1893-1903)을 둔 후에 다시 독자의 호의에 찬 요망에 응하여 나의 경솔한 행위를 「空家」에서 변명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호움즈를 되살린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제 문제로서 이 가벼운 스케치가 다른 여러 가지 문학의 분야 즉 역사, 시, 역사소설, 심리학 연구, 연극에 있어서의 나의 능력 한계를 확인하거나 발견하는 데에 대해서 방해가 되지 않았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만약 호움즈가 이미 전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면, 나는 더 이상 그에 대해서 쓸 수가 없게 되었어야 한다. 어떻든, 독자 여러분, 나는 여기서 <셜록 홈즈, 안녕> 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 기회를 갖게 해주십사한다. 오랫 동안의 끊임없는 애독에 대해서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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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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