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벼운 노트

마른풀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0.5.22
잠이 오지 않는 밤. 시집을 연다. 불면이 찾아 올 땐, 늘 그렇듯 상념이 함께였다. 꼬리를 물고 늘어져가는 상념들은 쓸데없는 헛것이 대부분이었으나 나를 괴롭히기에 충분할 만큼 부풀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상념에 시달리는 건지, 꺼지지 않는, 사그라들지 않는 상념 때문에 불면이 이어지는 건지 알 순 없었지만 그것들은 늘 함께였다. 그 때마다 나는 시집을 열거나 혹은 누워 누군가의 시구를 떠올렸다.
잠들지 않는 밤, 잠들지 못하는 밤, 시는 나를 덮어 내렸다. 어둠이 나를 덮기 전, 시가 먼저 나를 감쌌다. 그 밤, 나와 함께 해주었다. 시가 있어 그 시간들이 무섭지 않았다.
#1. 세상이 담겨있기에, 시는 힘이 있다.
시에는 힘이 있다. 세상이 담겨있다. 세상을 노래하기에 시는 힘을 갖고, 각자에게 나에게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그렇기에 시의 언어는 한낱 미사여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문학을 진실 되지 못한 것이기에 ‘거짓’에 불과하다고 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문학은 이데아를 모방한 것을, 다시 모방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문학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 진실로부터 한 번도 아니라 두 단계나 떨어져 있는 ‘그림자를 모방한 것’이었다. 문학의 가치를 존재론적으로 열등한 것이라고 말하며 하염없이 떨어뜨리고 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 우리는 플라톤으로부터 문학을 구해올 수 있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 'real'하지 않지만 좀 더 높은 현실성(reality)을 지닌다고 플라톤의 말을 뒤집는다. 문학은 역사처럼 ‘실제 일어난 일’을 다루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역사보다 더 높은 차원의 현실을, 더 영구적인 사실을, 곧 보편성을 제시한다. 플라톤은 거짓말이라고 치부해버렸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다. 현실을 그려내는 것이기에 오히려 이 안에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진실’의 세상이 담겨 있다. 소설도, 시도, 희곡도 ‘현실의 기록’을 뛰어넘는 ‘현실의 진리’를 포착하고 있다. 시는 압축적인 언어로 세상을 포착하려한다. 이것은 매우 치밀하고 예리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 단어 하나하나에 압축된 세상을, 진실을 담으려 하기에 시는 그 어떤 것보다 날카롭고, 강렬한 힘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노파는 파리약을 타 마시고 죽었다
광목으로 지어 입은 속옷엔 뭉개진 변이 그득했다
입속에 다 털어넣고 삼키지 못한 욕설들이
다족류처럼 스멀스멀 벽지 위를 오르내렸다
어디 니들끼리, 한번 잘살아봐라……
스테인리스 밥그릇처럼 엎어진 노파의 손엔
사진 한 장이 구겨져 있었다
손아귀에 모아진 마지막 떨리는 힘으로
노파는 흙벽을 긁어댔으리라, 뒤집혀진 손톱
그 핏물을 닦아내는 여자의 완고한 표정을
노파는 허연 게거품을 물고 맞서고 있었다
호상이구만 호상, 닭뼈다귀 같은 노파의 몸을
꾹꾹 펼쳐놓으며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코를 막았다
서랍장 곳곳에서 몰래 먹다 남긴
사과며 과자부스러기들이 쏟아져 나온 것 말고도
썩은 장판 밑에선 만원짜리 몇 장이 더 나왔다
발가벗겨진 노파의 보랏빛 도는 입엔
서둘러 쌀 한줌이 꽉 물려졌다
복날이었고
뽑힌 닭털처럼 노파의 살비듬이
안 보이게 날아다녔다
-최금진, <조용한 가족>
새들의 역사
최금진 저 | 창비 | 2007년 10월
최금진의 <조용한 가족>은 노파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사실, 오늘 날 우리에게 이것은 새롭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익숙한 것이 되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신문기사에서 ‘노파의 죽음’을 접하는 것이 아무런 충격을 가져오지 않게 된, 오늘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 저녁에 ‘혼자 살던 노인이 죽은 지 이주가 지나서야 이웃 주민에게 발견되었다.’라는 뉴스가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 크게 놀라워하지 않을 것이다. 익숙한 ‘기사’일 뿐이다. 어제, 며칠 전에 보았던 뉴스를 심드렁하게 바라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시’에 와서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너무나 치밀하고 세밀한 묘사가 이 광경을 낯설고 무서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복날’과 ‘노파의 몸’을 나란히 열거해 놓은 시인의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에, 우리는 죽은 노파를 머릿속에 한참동안 그려보게 된다. 뉴스로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던, 떠올려보지도 않았던 ‘죽은 노파’다. 흙벽을 긁어대는, 쌀 한줌을 입에 문 노파가, 발가벗겨진 노파가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시의 힘이다. 세상을 포착하는 것은 뉴스나 기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리 오랫동안 우리 안에서 머물지 않는다. 여운을 남기고 길게 머무는 것은 시가 가져다주는 효과이고, 그 시간동안 우리는 세상을 돌아보게 된다. 생각하게 된다.
무심코 흘려보내는 우리 삶의 장면들을 시는 고정하고,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 안에는 놓쳐서는 안됐을 삶들이 들어있다.
로또가 얼마나 끔찍한 악몽인지
로또방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나 끝자리를 분석하거나 홀짝의 조합을 분석하는 일은
어느 사무직과 다르지 않다
왜 사느냐, 를
왜 로또를 사느냐, 로 이해해도 무관하다
이 늦은 밤에 왜 또 여기로 왔는가,
자신에게 몰래 질문을 던지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찍는다
로또를 사지 않는 10%의 고소득층은 얼마나 좋을까
로또를 사지 않아도 천사가 지켜주니까
하지만 얼마나 나쁜가, 빈익빈 부익부의 나라에서
왜 사느냐, 를 묻지 않아도 되니까
오십이 더 넘은 사내는
누가 볼까봐 손을 가리고 찍는다
술 냄새에 절어 들어온 사내는 앉자마자 묵상을 한다
갓 스물을 넘은 청년은 줄을 서지 않는 자들을 무섭게 흘겨본다
순서를 어기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앞서 가는 것은
견딜 수 없이 우울하다
번호에 대한 집념은 때 묻지 않은 종이와 같아서
어떤 검은색이든 쪽쪽 빨아들인다
예수를 부르고, 조상님께 기도하고, 아이 생일을 떠올리며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숫자를 체크해나가는 손들
두툼한 돈 뭉치를 한 번만이라도
남의 멱살처럼 당당하게 움켜잡아보고 싶은 불쌍한 분노들
왜 사는가, 왜 로또를 사는가, 묻지 말자
다만 살 뿐이다,
그러므로 로또를 안 사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죄질이 나쁘다
그게 비록 숫자일지라도
단 한 번도 뭔가에 평생을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최금진, <로또를 안 사는 건 나쁘다>
이 시에서 사람들은 로또를 산다. 로또를 ‘사야만’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오십이 더 넘은 사내, 술 냄새에 절어있는 청년, 예수나 조상님께 기도하는 이들 모두 로또를 산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무 말 없이 번호를 찍는다.
‘로또를 사는 모습’에서 삶을, 사람들의 서글픈 삶을 발견해내는 시인의 포착이 놀랍다. 단지 일획천금을 꿈꾸는 사람들로 치부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로또를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삶을 끌어안고 있기에 이 시는 큰 울림을 주었다. ‘두툼한 돈뭉치를 한번만이라도 남의 멱살처럼 당당하게 움켜 잡아보고 싶은 불쌍한 분노들’이 어디 이 시에만 있는가. 그것은 우리들이다. 시를 읽는 우리이고, 우리 집의 가장들이고, 어머니이다.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던 불쌍한 분노들이 시로 들어갔다. 시에 있는 불쌍한 분노들이 우리에게로 온다. 시에 나오는 오십 넘은 사내와 술 냄새에 절어 있는 청년은 단지 시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집에 있다. 바로 옆에 있다. 이 슬픈 분노들을 ‘로또를 사는 행위’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로또를 사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치부할 만한 일이 아니다. 삶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시는 ‘로또를 안사는 것’이 나쁘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그것은 들여다보면 또 진실이다. 로또를 사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그 삶을 나누어 주지 않는가. 다른 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가. ‘로또를 사지 않는 10%의 고소득층은 얼마나 좋을까 로또를 사지 않아도 천사가 지켜주니까’라고 시인은 꼬집는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뭔가에 평생을 걸어 본적이 없는’ 삶들이기에, 나쁘다. 그 삶은 절실하지 않다. 우리만큼 처절하지도, 절실하지도 않다.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은 삶이기에, 로또를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 삶을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이 시는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90%의 우리들에게.
#2. 시는 나를 위로한다.
시는 삶을 담고 있다. 세상을 그리고, 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다. 그러나 모든 삶이 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살아가는 삶들이 시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위로’ 받을 필요 없는 삶은 애써 시로 노래할 필요 없을 것이다. 최금진의 <로또를 사지 않는 것은 나쁘다>는 90%의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들의 삶을 그렸다. 10%의 로또를 사지 않는 이들을 위한, 그들을 위한 시를 쓴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그처럼 큰 울림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내게 있어 시는 ‘위로’였다. 시에서 묻어나오는 아픔과 상처들은 내 것을 대신했다. 내 아픔과 상처에 공감하는 목소리이기도 했고, 나보다 더 아파하고 신음하는 것들이기도 했다. 내가 겪었던 아픔과 상처일 때도 있었고, 경험하지도 않았던 아픔들이기도 했다. 상관없이 모두 나를 위로했다. 내가 겪어 알고 있는 상처에 대해선 ‘공감’해 주었고, 경험하지 않은 것들은 ‘그러니 너는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화자의 목소리는 시에서 머물지 않고, 내게로 온다. 내 목소리와 겹쳐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했을 때 모든 노래가사가 다 내 얘기처럼 들리더라는 것은 경험해 본 모든 이들에게서 나오는 말이다. 시도 그렇다.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을 시는 들여다보고 말한다. 당신의 이야기가 된다. 나의 이야기가 된다. 아름답지 않아서, 차마 노래로 그려지지 않는 ‘삶’들까지 시는 말해준다. 그 삶들을 위로해준다. 당신을. 나를.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 최승자, <일찌기 나는> 일부
문을 걸어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 최정례, <칼과 칸나꽃> 일부
일찍이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는 최승자의 시나,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고, 그때까지 문을 걸어 잠그고 실컷 슬퍼하자고 말하는 최정례의 시는 참으로 아프다. 이렇게까지 내 삶에 아파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은 아파하고 신음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내가 죽어서 슬픔을 이기자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가. 그렇게 말하게 되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아파했을까. 그 아픔이 ‘위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시가 진정성을 띤 채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저 수식이나 미사여구로 치장한 문장으로 느껴졌다면 최정례와 최승자의 시가 위로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오히려 못마땅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척’하는 것만큼 거북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시 속 화자들은 ‘정말로’ 아파한다. 시인이 함부로 글을 쓰지 않은 까닭이다. 치열하게, 아픔을 바라보고 그려냈다.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내일 아침이 살기 싫으니 이대로 쓰러져 잠들리라’(최승자,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고 말하는 다짐에는 지독한 아픔이 들어있다. 오늘 저녁도, 내일 아침도 의미가 없다. 차라리 이대로 쓰러져 잠들어버렸으면 하는 삶이다. 나의 아픔을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그다지 큰 위로를 받을 수 없다. ‘나도 아프다’라고 말하고 있기에, 각자 저마다 자신의 아픔을 말하고 있기에, 우리가 이들에게서 위로 받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시들에서 나는 또 위로받게 된다. 경쾌하고 밝게 상처를 덮어버리는 시들을 읽다보면, 내가 가진 상처나 아픔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넘길 수 있게 된다. 내 상처도 밝고 명랑하게 바라보고 그렇게 여길 수 있을 것 같아진다. 시를 통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든다’(이근화,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고 말할 수 있다. ‘내 이름은 긴 여운을 남기며 싱싱하게 파닥’(박연준,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이므로,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할 수 있다. 김이듬의 ‘명랑하라 팜므 파딸’처럼 한없이 밝고 명랑하게 내 자신에게 명령하게 된다. 징징거리지 말라고. ‘오, 기쁘고 기쁘도다’(김이듬, ‘타블라’)라고!
#3. 사랑을 꿈꾸게 하는 ‘시’
누가 내 옆구리를 곡괭이로 콱 찍었다고 해보자. 갈빗대 서너개가 부러져서 근육을 뚫고 삐져나오고, 한때는 죽은 짐승의 시체와 죽은 식물의 잎새로 채워졌던 나의 내장이 주르르 흘러나왔다고 해보자.
그리하여 시뻘겋게 부릅뜬 내 두 눈은 튀어나올 듯이 이글거리고, 태어나서 한번도 내보지 못한 아니 내 볼 수 없었던 처음이자 마지막인 괴로운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이글거리던 두 눈이 서서히 풀어져 갈 때, 너를 쳐다보거나 죽은 이웃을 바라보는, 아아, 부드럽거나 서러운 그 나름대로의 명백한 눈빛이 아닌,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의 눈빛이 지어질테고, 너를 내 가슴에 안아 입을 맞추거나 허무와 절망에 찌들려서 내뱉던 신음소리가 아닌, 그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신음소리를 낼 것이고, 그리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내 옆구리를 곡괭이로 콱 찍기 전까지는 나는 결코 옆구리를 곡괭이로 찍혔을 때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런 것이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 김영승, <처음이자 마지막>
이 시를 처음 봤을 때의 전율을 기억한다. 설레었다. 정말 사랑에 빠진 것처럼, 누군가에게 한눈에 반한 것처럼, 이 시를 본 순간 나는 두근거려했다.
시는 단어 하나하나에 절절함을 담을 수 있다. 시는 단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단어는 부풀어 사전 밖에서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 새로운 단어로 태어나는 것을 ‘시’는 가능하게 한다. 시는 모든 언어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사랑을 어떻게 이토록 처절하게 노래할 수 있을까. ‘옆구리를 곡괭이로 콱 찍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사실 ‘곡괭이, 내장, 시뻘겋게, 고통’과 같은 시어들로 이 시는 그로테스크하다. 자칫 광기어린 사랑으로 비춰질 수 있다. 매우 강렬한 표현으로 사랑을 노래한다. 지금껏 내가 알던 사랑이 아니었다. 애절하기만 하고, 달콤하기만 하던 사랑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시는 오히려 더욱 가슴 저릿한 사랑으로 다가왔다. 이런 사랑을 단 한번,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을 단 한번이라도 해보고 싶다고 되뇌이게 된다.
처절하고 절절한 만큼, 이 시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진실’되어 보인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진짜 사랑’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랑’을 구체적인 것으로, 그것도 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그려내고 마는 것. 그것이 시이다. 시의 힘이다.
곡괭이로 옆구리를 찍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사랑’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 진실하고 진중한 태도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매 순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사소하게 흘려보내고 관심두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은 순간들이었을 지 모른다. 나는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면서 내 삶을 더욱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다. 보다 진실된 것을 추구하게 된다. 진지하게, 조금은 더 진중하게 살게끔 만드는 것이‘시’이다.
시는 아주 작은 것들에서 삶을 포착해오기도 한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 가운데 삶을 발견한다. 이 때문에 나는 세상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다. 아주 작은 것들, 잊혀져 가는 것들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방법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시는 사랑을 하게 한다.
글이, 시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어릴 때 내게 있어 문학이 하나의 거대한 환상이고 믿음의 세계였을 때, 그 때에는 나는 문학을 ‘신앙처럼’ 믿었다. 문학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제는 시를 절대적으로 신봉하지는 않는다. 내가 믿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환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적어도 문학의 ‘힘’은 믿는다. 변화시키는 것, 각자에게 와 닿는 것, 그리고 위로하는 것의 힘을 믿는다. 내가 문학을, 시를 사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픔과 상처를 덮고, 사랑할 수 있게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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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