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의 사례

위젤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8.6.12
상담을 하다보면 <내가 가진 이러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다> <이러이러한 제약들 때문에 나는 성공할 수 없다, 제약들을 먼저 다 제대로 다루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많은 분들을 봅니다.
때로 자신의 삶에서 원치 않는 것들은 그저 제쳐 두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그 하나를 향해 나가는 겁니다!
한걸음, 한걸음......
외팔이 격투사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팔이 하나 없다는 것은 격투기에 있어서 치명적인 핸디캡입니다.
그것은 팔을 새로 만들어 붙인다던지 해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챔피언이 되기 위해 전진합니다.
그리고, 여기 성룡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화려한 성공 뒤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나는 안돼" "나는 왜 이럴까" 라고 말하며 울며 주저앉아 있는 것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이러한 이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이 꽤 깁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우리 모두가 진정한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기를 바라며...
- 마법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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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감독, 제작자, 무술인, 가수, 사업가 중 어느 것이 성룡 (48세 成龍, Jackie Chan) 의 모습일까. 사실 모두 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영화를 가장 사랑한다.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면 영화 찍는데 목숨을 걸겠는가. 그 역시 사람들이 자신을 영화인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나의 십대 시절부터 함께 해온 성룡의 이미지는 청년의 이미지였다. 현재 내가 이십대 중반에 들어선 시점에 그의 나이는 사십대 후반에 도달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이미지는 청년, 젊음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계속해서 도전하는 모습과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불사르는 액션을 보면 감동이 안느껴질 수가 없다.
성룡은 어린시절 부모에게 버림 받았으며, 초등학교 교육밖에 받질 못했다 (사실 정상적인 학교도 아니었다). 글씨를 못 읽는 난독증 환자이기도 하다. 굶기 싫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학교에 남아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순수한 꿈을 꾸고 있었다. 스턴트맨 ! 그것이 당시 그의 꿈이었다. 1970년 [대소황천패]로 스크린에 대뷔한 그는 수많은 엑스트라와 스턴트를 연기했다. 당시 이소룡의 영화에 종종 출연했다 (편당 몇초씩). 그는 이때부터 영화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이때가 배고팠지만 행복한 시기였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소룡이 죽은후 그는 큰 실의에 빠져서 홍콩을 떠난다. 이때쯤 성룡은 한국에서 3년간 지낸다. 한국 영화의 무술지도를 하며, 당시 홍콩보다 앞서있던 한국 영화계에서 수련을 쌓는다. 성룡의 말에 의하면 가장 고생했던 시기가 이때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이 또 다른 고향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1996년 [홍번구]가 미국에서 박스 오피스 1위를 하며 성룡이 헐리우드 스타로 등극이 되자, 스타의 거리에 손도장을 찍을 때 거기에는 영어, 중국어, 한국어 3개국어로 이름을 썼다. 기회가 된다면 한글로 큼직하게 "성룡" 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성룡의 한국 사랑은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 되고 있다. (현재 성룡은 명예서울시민이다)
성룡은 이소룡에게 칭찬받기도 했고, 이소룡을 존경하기도 했지만 이소룡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이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원화평이다. 원화평은 촬영장에서 항상 폭소를 자아내는 성룡의 유머스러운 면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그 점을 살려서 영화를 찍는다. 1978년 [취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홍콩 영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한국에서도 1980년 당시 서울에서만 90만명이라는 기록을 세웠는데 그 기록은 십여년간 깨지지 않았다. 1979년 [소권괴초]에서 그는 은밀히 감독 수업을 받는다. 성룡의 영화에 대한 열정이 극대화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 뒤 1981년 [용소야 : 성룡의 공식적인 감독/주연작]를 찍을때는 그의 스타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영화에 사용되는 필름분량의 3배를 소비하고 온갖 부상을 당하고 하는 모습들이 그것이다. 이때 성룡은 편집된 필름이 아까워서 재미있는 장면들만 모아 엔딩 크레딧에 삽입한다. 그것이 팬 서비스의 관점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성룡 영화의 기본 구성이다. 그것을 축으로 아시아를 점령한 성룡은 헐리우드 진출을 시도하지만 좌절된다. 1983년 [프로텍터]를 후에 홍콩에서 다시 편집한 것을 보면 확연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 뒤 헐리우드가 성룡을 이해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80년대초 헐리우드 진출에는 실패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용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1985년 [폴리스스토리]는 성룡에게나 성룡팬들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성룡이 설립한 자신의 영화사에서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이고, 홍콩 영화 50주년 기념작으로 대대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금전적인 면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님). 그리고 가장 많은 성룡의 열정이 깃든 작품이다. 아마도 이런 영화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이 영화는 그해 금장상에서 거의 대부분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작품상, 주연상 등등 많은 부분을 휩쓴다. 성룡도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라고 고백했다. 이 영화는 후에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음 해에 성룡은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를 겪는다. [용형호제] 촬영도중 부상을 당해 뇌수술을 한다. 그것은 성룡의 인생관에 큰 변화를 준다. 현재 그가 하는 많은 사회사업은 이 사건의 영향이 크다. 자신이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성룡은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자선 사업엔 남다른 투자를 한다. 또, 성룡은 1983년 대만 배우 임봉교와 결혼하는데, 결혼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본에서 여러명의 여고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뒤 성룡은 자신의 결혼 사실을 부인하고 최근에 와서야 공개했다. 성룡은 사회적으론 성공한 인물이지만 가정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현재 임봉교와의 사이에 진조명 (17세) 이라는 아들이 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일년에 몇 번 뿐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나쁜 남편, 나쁜 아버지라고 한다. 한번은 외국출장에서 돌아와 아들을 놀래켜주려고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학교로 가서 한참동안 아들을 기다리는데 나오질 않았다고 한다. 집에가서 아내한테 얘기를 하니까 한달전에 다른학교로 전학갔다고 하더라고.
성룡만큼이나 강력한 스타일리스트 또한 없는 것 같다. 그의 영화철학 중 하나는 남녀노소 누구라도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쉬워보이기 하지만 사실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모두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성룡은 관금붕의 [로즈] 나 [완령옥] 같은 영화를 제작(Producer) 하기도 했는데, 이런 영화를 제작하는 것 보다 자신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한다. 그는 액션과 폭력을 구분짓는 요소가 폭소라고 말한다. 액션에서 폭소가 빠지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영화에는 선혈이 낭자한 폭력은 없다고 밝힌다. 성룡이 좋아하는 영화나 배우들을 보면 그가 긍극적으로 추구하는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감이 온다.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진 캘리",…. 같은 배우를 좋아하며 그들처럼 되려고 한다. 많은 미국인들은 성룡의 액션을 "춤" 처럼 느낀다고 하는데 이런 것을 보면 성룡의 의도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은 아닐까.
최근 성룡은 헐리우드 영화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 영화의 단결을 요구하며 아시아 영화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아시아 필름 펀드]의 회장인 그는 "아시아 문화로 세계를 깨끗이 정화하고 싶다"고 말하고 제1호로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의 제작지원을 하고 있다. 성룡은 영화적으로 또 다른 꿈이 있다. 자신이 호금전이나 관금붕처럼 영화사에 기억 되기를 말이다. 1989년 성룡은 저주받은 걸작을 탄생시킨다. 바로 [미라클]이다. 이 작품은 당시 아시아 전체에서 엄청난 실패를 해서 성룡이 영화계를 떠날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던 영화다. 1930년대의 홍콩을 고스란히 재현하기 위해 문고리, 옷걸이 심지어 휴지통까지 고증을 거쳐 제작되었으며, 돈으로 가격을 매길 수 없는 클래식카를 영국에서 30대를 들여오고 그 중 3대를 부숴뜨린다. 또한 당시 홍콩에서는 최초로 화질을 좋게하는 최신형 카메라를 미국에서 들여와 카메라 기사가 1달동안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이 카메라의 특징인 엄청난 조명량으로 인해 [미라클]이 촬영될 때는 골든 하베스트 스튜디오에서 다른 영화는 촬영을 중단 해야 했다. 6개의 발전기 모두를 모두 써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성룡이 추구했던 것은 중국 전통 예술인 "경극" 과 "영화"의 만남이었다. 당시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관객들에게 외면을 당했지만 최근 재평가를 받고 있다.
성룡은 [미라클]에서 매염방이 창밖을 바라보는 약 20초간의 단순한 장면을 찍기 위해 36번이나 촬영했다. 1983년 [프로젝트A] 에서는 원하는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 30m 높이의 시계탑에서 맨땅에 30번이나 맨몸으로 떨어졌다. 그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인 것이다. 그래서 스텝들은 그와 일하는 것을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다. 홍콩에서 재촬영을 가장 많이 하는 감독으로 통한다. 또한 그의 시나리오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촬영중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계속 수정한다. 그래서, 나중에 영화가 완성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된다고 한다. 계속되는 관여와 일정변경 때문에 종종 스텝진들과 불화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특유의 인간성으로 위기를 잘 넘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 세계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많은 팬을 갖고 있는 성룡의 최고의 매력은 스턴트맨을 쓰지 않는 리얼 액션이 아닌가 한다. "전 특수 효과를 쓰지 않아요. 제가 바로 특수 효과에요. 사람들은 저를 보러 오는 것이지 스턴트맨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죠." 성룡이 자주 하는 말이다. "그의 영화를 보면 당장 그처럼 하고 싶어 집니다. 최고의 배우 재키찬을 소개합니다" 이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한말이다. 성룡이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게 영화를 찍기를 바라며, 자신의 자서전 "I AM JACKIE CHAN" 중 프롤로그로 글을 맺을까 한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의 팬이다.
나는 지금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위치한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사무실 빌딩의 옥상에 서있다. 나와 저 아래의 콘크리트 도로와는 21층의 허공만이 있다. 나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려고 한다. 점프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 스턴트맨 동료들은 추락해도 안전하다고 내게 말한다. 글세 아마도 안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는 조금 덜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단지 16층 높이로부터 점프를 시도했을 뿐이다. 어제밤 나 혼자 제작 사무실에서 테스트 필름을 보았을 때 나는 16층에서의 점프는 누구나 예측가능한 것이라는것을 알았다. 너무나 가능해......
제작자는 언론에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스턴트가 될 것이라고 자랑을 해왔다. 만약 내가 그 언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누가 만족시킬 것인가? 성룡이 아니지...그래서 나는 스튜디오에서 감독과 동료, 제작 이사진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5층의 높이를 더 올리기로 했다. 그곳은 60피트 이상 더 올라간 높이에 공기마저 매우 희박한 곳이다. 그곳에서 내 45세의 몸이 슬라이딩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카메라에 몇 초의 조금 더 긴박한 장면을 담기 위하여, 그리고 흥분하기를 열망하는 관객들에게 조금 더 환호성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공식은 간단하다 : 내 동료와 가족이 더 고통스러워 하면 할수록 내 팬들은 더 만족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는 전부다. 그들은 재난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죽는 순간에서도 얼굴에 미소를 띄는 영웅을 갈망하며 극장을 찾는다. 누군가 실제로 관객들에게 유일하게 두려운 것은 두려움 자체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왔던 어느 누구도 로테르담의 이 빌딩 옥상 위에는 서 있지 않았으며 250 피트 아래의 목적지를 보기 위하여 이 마천루의 한쪽 구석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 보지는 않았다. 여기서 보면 매트리스는 마치 우표 위에 찍혀있는 도장정도의 크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얼굴 앞으로 손을 올렸을 때 매트리스는 거의 가려졌다.
난 피곤했다. 내 심장은 뛰고 있었다. 내 몸은 나에게 지난 40년동안 내가 그들에게 해왔던 만용에 대해 소리 지르고 있으며 심지어는 내가 발음조차 할 수 없는 내 신체 일부분까지도 내가 그들을 얼마나 학대해 왔는지에 대해서 불평을 하고 있다.
수백명의 네덜란드 해병들과 소방대원들 그리고 경찰들이 걱정스러워 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점프가 정말 필요한 것인가? 그러나 나의 대답은 내가 질문을 던지자마자 YES였다. 왜냐하면 이 점프는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프는 단지 내 팬과 흥행성적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점프는 스프트 라이트 속에서 고통스러워 하고 아파하지만 오늘날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한 사람 내 스승 Yu Jim-Yuen을 위한 것이다. 그는 일주일전에 LA에서 장례식을 치루었다.네덜란드에서 캘리포니아로의 여행은 제작의 중단과 제작사인 골든 하베스트사에게는 거의 25만불의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낭비되는 비용이 한 방울의 피와도 같았지만 나를 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난 기억한다. 겁에 질린 7살 소년이 그의 아버지 손을 잡고 어둡고 곰팡이 슨 China Drama Academy의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을.... 그 안에서 소년은 어린 소년 소녀들이 점프하고 덤블링을 하며 소리지는 것을
천국이야.....
"Jackie! 너는 여기서 얼마나 머무르고 싶니?"
"영원히요..." 소년은 대답했다.
그 이후로 십년동안 난 스승 아래에서 땀과 피를 흘렸으며 울었다. 난 매일밤 스승의 이름을 저주하며 잠자리에 들었으며, 매일 아침 깰 때마다 그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삼켜왔다. 그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했으며 우리는 그에게 주었다. 부상의 고통과 심지어 죽음하에서도.그러나 성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스승이 우리에게 이자와 함께 모든것을 되돌려 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성룡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스승 Yu Jim-Yuen이었다. 그 스승 때문에 오늘날의 내가 있고, 또 오늘 내가 하려는 점프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점프는 은혜에 대한 마지막 보답으로 또한 스승에 대한 마지막 도전장의 제스처로서 그의 기억 속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 등 뒤에서 내게 준비가 되었는지를 물어보며 손뼉을 쳤다. 난 간신히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셋트장에서는 누군가 조용히 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갑자기 바람소리와 내 귓가를 흐르는 피의 흐름만이 유일한 소리로 남았다. 내 심장은 마치 커다란 드럼처럼 울리고 있다.
"Camera!"
"Rolling!"
"Action!"
하늘로 몸을 던졌다...난 날고 있다. 난 기억한다.
1954년 4월 7일 출생 (본명: 진항생)
1961년 중국 경극학원 입학. 부모님은 호주로 이주.
1970년 대소황천패로 스크린 데뷔. (예명: 진원룡)
1976년 원화평과 계약. (예명: 성룡으로 개명)
1979년 소권괴초에서 감독, 주연, 각본, 무술지도함. 그 뒤 지금까지 100여편의 영화를 주연, 감독, 제작.
때로 자신의 삶에서 원치 않는 것들은 그저 제쳐 두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그 하나를 향해 나가는 겁니다!
한걸음, 한걸음......
외팔이 격투사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팔이 하나 없다는 것은 격투기에 있어서 치명적인 핸디캡입니다.
그것은 팔을 새로 만들어 붙인다던지 해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챔피언이 되기 위해 전진합니다.
그리고, 여기 성룡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화려한 성공 뒤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나는 안돼" "나는 왜 이럴까" 라고 말하며 울며 주저앉아 있는 것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이러한 이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이 꽤 깁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우리 모두가 진정한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기를 바라며...
- 마법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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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감독, 제작자, 무술인, 가수, 사업가 중 어느 것이 성룡 (48세 成龍, Jackie Chan) 의 모습일까. 사실 모두 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영화를 가장 사랑한다.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면 영화 찍는데 목숨을 걸겠는가. 그 역시 사람들이 자신을 영화인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나의 십대 시절부터 함께 해온 성룡의 이미지는 청년의 이미지였다. 현재 내가 이십대 중반에 들어선 시점에 그의 나이는 사십대 후반에 도달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이미지는 청년, 젊음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계속해서 도전하는 모습과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불사르는 액션을 보면 감동이 안느껴질 수가 없다.
성룡은 어린시절 부모에게 버림 받았으며, 초등학교 교육밖에 받질 못했다 (사실 정상적인 학교도 아니었다). 글씨를 못 읽는 난독증 환자이기도 하다. 굶기 싫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학교에 남아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순수한 꿈을 꾸고 있었다. 스턴트맨 ! 그것이 당시 그의 꿈이었다. 1970년 [대소황천패]로 스크린에 대뷔한 그는 수많은 엑스트라와 스턴트를 연기했다. 당시 이소룡의 영화에 종종 출연했다 (편당 몇초씩). 그는 이때부터 영화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이때가 배고팠지만 행복한 시기였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소룡이 죽은후 그는 큰 실의에 빠져서 홍콩을 떠난다. 이때쯤 성룡은 한국에서 3년간 지낸다. 한국 영화의 무술지도를 하며, 당시 홍콩보다 앞서있던 한국 영화계에서 수련을 쌓는다. 성룡의 말에 의하면 가장 고생했던 시기가 이때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이 또 다른 고향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1996년 [홍번구]가 미국에서 박스 오피스 1위를 하며 성룡이 헐리우드 스타로 등극이 되자, 스타의 거리에 손도장을 찍을 때 거기에는 영어, 중국어, 한국어 3개국어로 이름을 썼다. 기회가 된다면 한글로 큼직하게 "성룡" 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성룡의 한국 사랑은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 되고 있다. (현재 성룡은 명예서울시민이다)
성룡은 이소룡에게 칭찬받기도 했고, 이소룡을 존경하기도 했지만 이소룡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이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원화평이다. 원화평은 촬영장에서 항상 폭소를 자아내는 성룡의 유머스러운 면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그 점을 살려서 영화를 찍는다. 1978년 [취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홍콩 영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한국에서도 1980년 당시 서울에서만 90만명이라는 기록을 세웠는데 그 기록은 십여년간 깨지지 않았다. 1979년 [소권괴초]에서 그는 은밀히 감독 수업을 받는다. 성룡의 영화에 대한 열정이 극대화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 뒤 1981년 [용소야 : 성룡의 공식적인 감독/주연작]를 찍을때는 그의 스타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영화에 사용되는 필름분량의 3배를 소비하고 온갖 부상을 당하고 하는 모습들이 그것이다. 이때 성룡은 편집된 필름이 아까워서 재미있는 장면들만 모아 엔딩 크레딧에 삽입한다. 그것이 팬 서비스의 관점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성룡 영화의 기본 구성이다. 그것을 축으로 아시아를 점령한 성룡은 헐리우드 진출을 시도하지만 좌절된다. 1983년 [프로텍터]를 후에 홍콩에서 다시 편집한 것을 보면 확연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 뒤 헐리우드가 성룡을 이해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80년대초 헐리우드 진출에는 실패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용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1985년 [폴리스스토리]는 성룡에게나 성룡팬들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성룡이 설립한 자신의 영화사에서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이고, 홍콩 영화 50주년 기념작으로 대대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금전적인 면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님). 그리고 가장 많은 성룡의 열정이 깃든 작품이다. 아마도 이런 영화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이 영화는 그해 금장상에서 거의 대부분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작품상, 주연상 등등 많은 부분을 휩쓴다. 성룡도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라고 고백했다. 이 영화는 후에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음 해에 성룡은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를 겪는다. [용형호제] 촬영도중 부상을 당해 뇌수술을 한다. 그것은 성룡의 인생관에 큰 변화를 준다. 현재 그가 하는 많은 사회사업은 이 사건의 영향이 크다. 자신이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성룡은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자선 사업엔 남다른 투자를 한다. 또, 성룡은 1983년 대만 배우 임봉교와 결혼하는데, 결혼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본에서 여러명의 여고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뒤 성룡은 자신의 결혼 사실을 부인하고 최근에 와서야 공개했다. 성룡은 사회적으론 성공한 인물이지만 가정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현재 임봉교와의 사이에 진조명 (17세) 이라는 아들이 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일년에 몇 번 뿐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나쁜 남편, 나쁜 아버지라고 한다. 한번은 외국출장에서 돌아와 아들을 놀래켜주려고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학교로 가서 한참동안 아들을 기다리는데 나오질 않았다고 한다. 집에가서 아내한테 얘기를 하니까 한달전에 다른학교로 전학갔다고 하더라고.
성룡만큼이나 강력한 스타일리스트 또한 없는 것 같다. 그의 영화철학 중 하나는 남녀노소 누구라도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쉬워보이기 하지만 사실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모두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성룡은 관금붕의 [로즈] 나 [완령옥] 같은 영화를 제작(Producer) 하기도 했는데, 이런 영화를 제작하는 것 보다 자신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한다. 그는 액션과 폭력을 구분짓는 요소가 폭소라고 말한다. 액션에서 폭소가 빠지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영화에는 선혈이 낭자한 폭력은 없다고 밝힌다. 성룡이 좋아하는 영화나 배우들을 보면 그가 긍극적으로 추구하는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감이 온다.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진 캘리",…. 같은 배우를 좋아하며 그들처럼 되려고 한다. 많은 미국인들은 성룡의 액션을 "춤" 처럼 느낀다고 하는데 이런 것을 보면 성룡의 의도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은 아닐까.
최근 성룡은 헐리우드 영화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 영화의 단결을 요구하며 아시아 영화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아시아 필름 펀드]의 회장인 그는 "아시아 문화로 세계를 깨끗이 정화하고 싶다"고 말하고 제1호로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의 제작지원을 하고 있다. 성룡은 영화적으로 또 다른 꿈이 있다. 자신이 호금전이나 관금붕처럼 영화사에 기억 되기를 말이다. 1989년 성룡은 저주받은 걸작을 탄생시킨다. 바로 [미라클]이다. 이 작품은 당시 아시아 전체에서 엄청난 실패를 해서 성룡이 영화계를 떠날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던 영화다. 1930년대의 홍콩을 고스란히 재현하기 위해 문고리, 옷걸이 심지어 휴지통까지 고증을 거쳐 제작되었으며, 돈으로 가격을 매길 수 없는 클래식카를 영국에서 30대를 들여오고 그 중 3대를 부숴뜨린다. 또한 당시 홍콩에서는 최초로 화질을 좋게하는 최신형 카메라를 미국에서 들여와 카메라 기사가 1달동안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이 카메라의 특징인 엄청난 조명량으로 인해 [미라클]이 촬영될 때는 골든 하베스트 스튜디오에서 다른 영화는 촬영을 중단 해야 했다. 6개의 발전기 모두를 모두 써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성룡이 추구했던 것은 중국 전통 예술인 "경극" 과 "영화"의 만남이었다. 당시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관객들에게 외면을 당했지만 최근 재평가를 받고 있다.
성룡은 [미라클]에서 매염방이 창밖을 바라보는 약 20초간의 단순한 장면을 찍기 위해 36번이나 촬영했다. 1983년 [프로젝트A] 에서는 원하는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 30m 높이의 시계탑에서 맨땅에 30번이나 맨몸으로 떨어졌다. 그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인 것이다. 그래서 스텝들은 그와 일하는 것을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다. 홍콩에서 재촬영을 가장 많이 하는 감독으로 통한다. 또한 그의 시나리오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촬영중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계속 수정한다. 그래서, 나중에 영화가 완성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된다고 한다. 계속되는 관여와 일정변경 때문에 종종 스텝진들과 불화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특유의 인간성으로 위기를 잘 넘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 세계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많은 팬을 갖고 있는 성룡의 최고의 매력은 스턴트맨을 쓰지 않는 리얼 액션이 아닌가 한다. "전 특수 효과를 쓰지 않아요. 제가 바로 특수 효과에요. 사람들은 저를 보러 오는 것이지 스턴트맨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죠." 성룡이 자주 하는 말이다. "그의 영화를 보면 당장 그처럼 하고 싶어 집니다. 최고의 배우 재키찬을 소개합니다" 이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한말이다. 성룡이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게 영화를 찍기를 바라며, 자신의 자서전 "I AM JACKIE CHAN" 중 프롤로그로 글을 맺을까 한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의 팬이다.
나는 지금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위치한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사무실 빌딩의 옥상에 서있다. 나와 저 아래의 콘크리트 도로와는 21층의 허공만이 있다. 나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려고 한다. 점프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 스턴트맨 동료들은 추락해도 안전하다고 내게 말한다. 글세 아마도 안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는 조금 덜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단지 16층 높이로부터 점프를 시도했을 뿐이다. 어제밤 나 혼자 제작 사무실에서 테스트 필름을 보았을 때 나는 16층에서의 점프는 누구나 예측가능한 것이라는것을 알았다. 너무나 가능해......
제작자는 언론에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스턴트가 될 것이라고 자랑을 해왔다. 만약 내가 그 언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누가 만족시킬 것인가? 성룡이 아니지...그래서 나는 스튜디오에서 감독과 동료, 제작 이사진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5층의 높이를 더 올리기로 했다. 그곳은 60피트 이상 더 올라간 높이에 공기마저 매우 희박한 곳이다. 그곳에서 내 45세의 몸이 슬라이딩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카메라에 몇 초의 조금 더 긴박한 장면을 담기 위하여, 그리고 흥분하기를 열망하는 관객들에게 조금 더 환호성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공식은 간단하다 : 내 동료와 가족이 더 고통스러워 하면 할수록 내 팬들은 더 만족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는 전부다. 그들은 재난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죽는 순간에서도 얼굴에 미소를 띄는 영웅을 갈망하며 극장을 찾는다. 누군가 실제로 관객들에게 유일하게 두려운 것은 두려움 자체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왔던 어느 누구도 로테르담의 이 빌딩 옥상 위에는 서 있지 않았으며 250 피트 아래의 목적지를 보기 위하여 이 마천루의 한쪽 구석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 보지는 않았다. 여기서 보면 매트리스는 마치 우표 위에 찍혀있는 도장정도의 크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얼굴 앞으로 손을 올렸을 때 매트리스는 거의 가려졌다.
난 피곤했다. 내 심장은 뛰고 있었다. 내 몸은 나에게 지난 40년동안 내가 그들에게 해왔던 만용에 대해 소리 지르고 있으며 심지어는 내가 발음조차 할 수 없는 내 신체 일부분까지도 내가 그들을 얼마나 학대해 왔는지에 대해서 불평을 하고 있다.
수백명의 네덜란드 해병들과 소방대원들 그리고 경찰들이 걱정스러워 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점프가 정말 필요한 것인가? 그러나 나의 대답은 내가 질문을 던지자마자 YES였다. 왜냐하면 이 점프는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프는 단지 내 팬과 흥행성적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점프는 스프트 라이트 속에서 고통스러워 하고 아파하지만 오늘날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한 사람 내 스승 Yu Jim-Yuen을 위한 것이다. 그는 일주일전에 LA에서 장례식을 치루었다.네덜란드에서 캘리포니아로의 여행은 제작의 중단과 제작사인 골든 하베스트사에게는 거의 25만불의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낭비되는 비용이 한 방울의 피와도 같았지만 나를 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난 기억한다. 겁에 질린 7살 소년이 그의 아버지 손을 잡고 어둡고 곰팡이 슨 China Drama Academy의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을.... 그 안에서 소년은 어린 소년 소녀들이 점프하고 덤블링을 하며 소리지는 것을
천국이야.....
"Jackie! 너는 여기서 얼마나 머무르고 싶니?"
"영원히요..." 소년은 대답했다.
그 이후로 십년동안 난 스승 아래에서 땀과 피를 흘렸으며 울었다. 난 매일밤 스승의 이름을 저주하며 잠자리에 들었으며, 매일 아침 깰 때마다 그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삼켜왔다. 그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했으며 우리는 그에게 주었다. 부상의 고통과 심지어 죽음하에서도.그러나 성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스승이 우리에게 이자와 함께 모든것을 되돌려 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성룡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스승 Yu Jim-Yuen이었다. 그 스승 때문에 오늘날의 내가 있고, 또 오늘 내가 하려는 점프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점프는 은혜에 대한 마지막 보답으로 또한 스승에 대한 마지막 도전장의 제스처로서 그의 기억 속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 등 뒤에서 내게 준비가 되었는지를 물어보며 손뼉을 쳤다. 난 간신히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셋트장에서는 누군가 조용히 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갑자기 바람소리와 내 귓가를 흐르는 피의 흐름만이 유일한 소리로 남았다. 내 심장은 마치 커다란 드럼처럼 울리고 있다.
"Camera!"
"Rolling!"
"Action!"
하늘로 몸을 던졌다...난 날고 있다. 난 기억한다.
1954년 4월 7일 출생 (본명: 진항생)
1961년 중국 경극학원 입학. 부모님은 호주로 이주.
1970년 대소황천패로 스크린 데뷔. (예명: 진원룡)
1976년 원화평과 계약. (예명: 성룡으로 개명)
1979년 소권괴초에서 감독, 주연, 각본, 무술지도함. 그 뒤 지금까지 100여편의 영화를 주연, 감독,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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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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