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명언

위젤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8.6.12
나는 젊었을 때 정치에 뜻을 두고, 여러 가지 쓰라린 일들을 많이 겪었다. 실패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걸어온 덕택으로 이렇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났던 것이다. -루즈벨트
무슨 일에나 움직이지 않는 결단심만큼 기개있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요인은 없을 것이다. 장래 큰 인물이 되기를 원하는 젊은이나 죽은 뒤 큰 인물 축에 끼이고 싶다는 젊은이는 단순히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는 결심만을 해서는 안 된다. 헤아릴 수 없는 반대와 패배를 직면해서도 그 장애를 극복해 보이려는 결심이 필요하다. -루즈벨트
민주주의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행진이다. -루즈벨트
비록 실패하더라도 큰 것을 하는 편이, 훨씬 큰 즐거움이 있으며, 고통도 작은 일일수록 크고, 큰 일일수록 적어지는 반비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큰 일이란 당초부터 승리도 패배도 초월한 마음가짐이 아니고서는 곳 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즈벨트
사람은 기회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기회란 찾아와야만 한다. 전쟁이 없다면 위대한 장군을 가질 수 없고 거대한 사건이 없다면 위대한 정치가는 나오지 않는다. -루즈벨트
얼굴에 두려움을 나타내지 않고 모든 경험에 의해 당신은 힘과 용기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공포를 겪으며 살았다. 나는 또 다른 어떤 일도 모두 감당해 낼 수 있다." 당신은 이제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일을 해야만 한다. -엘리너 루스벨트
오늘 하루 이 시간은 당신의 것이다. 하루를 착한 행위로 장식하라. -루즈벨트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두려움 이외에는 없다. -루즈벨트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기본적 자유 위에 세워진 세계를 갈망한다. 첫째는 세계 각지에서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이다. 둘째는 세계 각지에서의 신앙의 자유이다. 셋째는 세계 각지에서의 결핍에서의 자유이다. 넷째는 세계 도처에서의 공포에서의 자유이다. -루즈벨트
위대한 사람이 되는 일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참 인간이 되는 것은 더욱 멋진 일이다. -루즈벨트
인간은 운명의 포로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에 딸린 포로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인간을 지혜의 힘으로만 교육시키고 도덕으로 교육시키지 않는다면, 사회에 대하여 위험을 기르는 꼴이 된다. - D. 루즈벨트
인생에 있어서 큰 기쁨은 당신은 못해낸다고 세상에서 말한 것을 당신이 해냈을 때이다. -루즈벨트
인생이 주는 최고의 상은 가치있는 일에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루즈벨트
진정한 개인의 경제적 보장과 독립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굶주리고 직업이 없는 국민은 독재가 행해질 그럴 듯한 이유가 된다. - F.D.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
별칭은 Teddy Roosevelt.
1858. 10. 27. 미국 뉴욕 뉴욕 시~1919. 1. 6 뉴욕 오이스터 만.
미국의 제26대 대통령(1901~09),작가·탐험가·군인.
대기업과 노동조합 사이의 쟁의에 직면하여 대통령 및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전체 국민의 이익을 도모했으며 아시아와 유럽 문제에 개입하기도 했다. 1906년 러일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파나마 운하 건설(1904~14)을 추진했다.
초년기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네덜란드계 중산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사 불럭은 위그노(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인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혼혈로 조지아 주 출신이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우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천부적인 지적 호기심을 타고난 몇 안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880년 컬럼비아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곧 역사와 정치에 매료되었으며, 바로 그해 보스턴 출신의 앨리스 해서웨이 리와 결혼했다. 1884년 앨리스가 사망하자 루스벨트는 에디스 커밋 캐로와 재혼했고 뉴욕 주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만에 정착하여 평생 같이 살았다.
어릴 때 몸이 약했던 루스벨트는 운동을 통하여 강인한 체력을 길렀고 평생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도전했으며 이와 같은 에너지를 공직생활에도 불어넣었다. 루스벨트는 23세에 뉴욕 주의회에 진출한 뒤 이내 공화당의 주요 지도자로 부각되었고 타락한 파벌정치에 대항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에게는 연이어 3차례 정치적 불행이 닥쳤다. 다코타 준주(準州)에서 2년간 목장을 돌보던 루스벨트는 다시 정치에 뛰어들었고, 인사위원회 위원(1889~95)과 뉴욕 시 경찰총장(1895~97)을 지내면서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윌리엄 매킨리 행정부의 해군차관으로서 루스벨트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강력히 주장했고 1898년 전쟁이 선포되자 돌연 사퇴하여 '러프라이더 연대'(Rough Rider)로 알려진 제1의용기병대를 조직했다. 그의 통솔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군 내부의 형식주의와 명령까지 무시하면서 산티아고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루스벨트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