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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1. 연재소설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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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란 참 이상하구나. 


지원은 베란다 쪽 창을 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뻐근한 뒷목과 어깨, 등이 차례로 소파에 닿았다. 텔레비전의 전원을 끄자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소파에 기댄 채 가만히 앉아있으니 주변의 소리들이 볼륨을 높였다. 누군가 연습하는 피아노 소리가 바람에 실려 15층의 창문을 넘어왔다. 요즘도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치는 사람이 있구나. 피아노 소리가 가느다랗고 둥근 걸 보니 두어 동쯤 떨어진 곳에서 연주하는 모양이었다.


가끔 머뭇거리기는 하지만 연주는 비교적 매끄럽게 이어졌다. 멜로디를 따라가며 지원은 친정집 거실에 있던 낡은 피아노를 떠올렸다. 검은색의 피아노는 표면이 미세하게 긁혔고 손자국이 무성했다. 모서리는 군데군데 까져서 나무의 결이 드러났다. 언니는 오랫동안 피아노를 배웠고 악보의 음표들이 선율이 되어 울려 퍼지는 걸 좋아했다. 방과 후에 노란색으로 된 팝송과 가요의 악보를 사와 능숙해질 때까지 연습했다. 지원은 옆에 앉아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건반 위를 부지런히 오가는 언니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가끔은 서툴게 한 두 마디를 쳐보기도 했다. 둘 다 중학생 무렵이었다. 기다란 피아노 의자를 위로 들면 그 안에 언니와 지원이 사 모은 악보 피스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때 일요일 오후면 아파트 안에는 퉁탕거리던 피아노 소리와 밖에서 공을 차며 놀던 아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장난치는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노는 아이들의 소리는 차츰 볼륨이 줄어들었고 마침내 어둠 속에 잠겨 완전히 들리지 않았다. 지원과 언니도 피아노 뚜껑을 닫고 악보 정리를 한 다음 가족들과 모여앉아 저녁을 먹었다. 그 뒤에는 시시하지만 중독성이 강한 코미디 프로를 보며 몇 번 소리 내어 웃었다.


먼 곳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해가 기울고 창밖이 어둑해지는 걸 보며 지원은 오래 전의 일요일 오후를 떠올렸다. 그때 언니와 같이 피아노 앞에 앉아서 노래를 흥얼거릴 때도, 그 나른하고 평화롭던 순간에도 머릿속 한쪽에는 가방 안에 든 숙제와 월요일에 본다는 쪽지 시험 생각이 곰팡이 꽃처럼 시커멓게 피어있었다. 밤이 되어 책상 앞에 앉아 밀린 숙제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는 월요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때 이미 월요일 자체보다 일요일 속을 서서히 지나가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걸 알았다. 주말을 아무리 즐겁고 왁자지껄하게 보내도, 누군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가졌어도 월요일을 맞는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다. 


피아노 소리가 멈추자 지원은 버릇처럼 텔레비전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지난 일주일 동안 집에서 한 일이라고는 새벽까지 텔레비전을 보다 잠든 게 다였다. 세상에는 볼 만한 드라마나 영화가 너무 많았고 그것에만 빠져 살아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집에 오면 지원은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드라마 다시 보기를 눌렀고 영진이 들어오면 노트북으로 가지고 침실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기 싫어서 드라마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봤고 그 드라마가 끝나면 또 다른 시리즈를 시작했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영진의 방에서는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서랍을 여닫고 부스럭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재혁과 통화하는 소리가 중간 중간 섞였다. 그는 더 이상 조심하거나 의기소침해있지 않았다.


-야. 그쪽으로 가면 어떡해. 

-12시 방향으로 가라니까. ……너 이번 판은 안 되겠다.


낮은 탄식과 웃는 소리와 탄성이 짤막하게 이어졌다. 


지원은 아무 움직임 없는 크림색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방 안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일주일동안 그 방의 문을 열지도 그 방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영진은 깔끔한 편이 아니었으므로 일주일이면 컴퓨터 책상 주변과 키보드, 바닥과 작은 책장을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지난번에도 지원은 숨을 꾹 참고 그 방의 문을 열었다. 일주일은 가정집의 서재가 지하에 있는 오래된 피씨방의 모습과 비슷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원은 뒤집어진 채로 둥글게 말려 방구석을 돌아다니고 있을 검은색과 회색의 양말짝을 떠올렸다. 냄새를 풍기며 아슬아슬하게 쌓여있을 빈 컵라면 용기와 맥주 캔을 생각했을 때까지는 참을 만 했는데 작은 쥐처럼 웅크리고 있을 양말짝을 떠올리자 얼굴에 열이 훅 올라왔다.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그런 것에 화가 난다는 것이, 여전히 그걸 참을 수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원은 닫힌 방문을 벌컥 여는 상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난 일주일동안 그 방 앞을 지나갈 때마다, 이따금 열리거나 닫히는 방문을 볼 때마다, 그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고 밤에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올 때마다 감정이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차올랐다가 비워졌다. 방 안의 영진은 처음에는 조용히, 조심스럽게 움직이다가 점점 평소처럼 쿵쾅대며 시끄럽게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원은 침대에 앉거나 누운 채로 영진이 출근 준비하는 소리를 들었다. 준비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빠져 나갔다. 띠리릭.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면 지원은 거실로 나왔다. 챙겨주지 않으면 영진은 출근 전에 우유한 잔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식탁 겸 탁자로 쓰는 테이블 위는 깨끗했다. 가끔 물 컵이 놓여있는 정도였다. 


지원은 침실과 거실을 간단하게 정리한 뒤 씻었다. 옷을 챙겨 입거나 일상복 그대로 테이블에 앉아 우유에 만 시리얼을 떠 먹거나 퇴근길에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둔 샌드위치나 김밥을 꺼내 먹었다. 딱히 제대로 된 밥을 챙겨 먹고 싶다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동안 밤이면 보온 상태를 유지하던 밥통은 임시 휴업에 들어갔고 냉장고 안의 반찬통은 제 안에서 부패하기 시작하는 내용물들을 속절없이 견뎌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꺼내서 치워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집안일에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야, 이쪽으로, 이쪽으로. ……아 이재혁이 실력 많이 줄었네.


지원이 창밖을 내다보는 동안 게임의 세계에 빠진 영진의 목소리가 방 밖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재혁과 통화하며 게임하느라 그는 잠시 현실을 잊었을 것이다. 현실을 잊으려고 게임에 몰두하는 것이기도 할 테고. 


현실 세계의 일요일 오후는 서서히 저녁으로 변해가고 어둠과 함께 쓸쓸함, 허기가 내려왔다. 예전부터 지원은 외계인이 침공하거나 인류가 멸망하기에 적당한 시간은 일요일 저녁이 아닐까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평화롭고 고요하지만 내면이 어수선한 시간. 휴일의 활기는 햇빛과 함께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안과 죄책감이 점령한다. 놀거나 쉬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비관적인 심정으로 주말이 사라져가고 평일의 노동이 닥쳐오는 걸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다. 개개인의 상황과 특성에 따라 누군가는 소화제를, 누군가는 두통약을, 비타민을 수면 유도제를 삼키며 일요일과 이별한다. 


지구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파악한 외계인들이라면 이 시간대를 놓칠 리 없다. 그렇지 않아도 헛헛한데 일요일의 지구인들은 무언가 커다란 비극이 닥치면 우왕좌왕하다가 맥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앉아있고 영진의 목소리가 들리는 이 1506호라는 세계도, 이 작은 행성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위태로움에 놓여있다고 지원은 생각했다. 


창밖의 피아노 소리는 귀에 익지만 제목을 모르는 몇 곡을 더 연주하다가 엘가의 ‘사랑의 인사’ 로 넘어갔다. 서툴기는 하지만 한 마디를 반복해서 연습하지 않고 유연하게 흘러가서 듣기 좋았다. 지원은 다른 곡들의 제목을 생각해내려고 애쓰다가 포기했다. 이제는 아주 예전의 일과 아주 최근의 일에 대한 기억에만 자신이 있다. 그런 나이가 된 건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그렇게 사는데 익숙해진 건지 애써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밤에 못 잘까봐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어졌다.


지원은 테이블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소음 사이로 희미하게 번져 나가는 피아노 선율에 귀 기울였다. ‘사랑의 인사’는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홀과 신부 대기실에 흐르던 음악이었다. 지원이나 영진이 고른 것은 아니었고 그 예식장에서 기본적으로 틀어놓는 곡이었다. 대기실에 앉아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다 멈추면 그 음악이 잔잔하게 침묵을 메워주었다. 나중에 가족들과 결혼식 영상을 보면서 그 날의 크고 작은 실수와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언니가 그 날의 음악에 대해 말했다.


-그때 우린 가족이라고 일찍 와 있었잖아. 그런데 삼십 분 내내 ‘사랑의 인사’가 흘러나오는 거야. 아, 결혼생활이 이렇다는 거구나. 이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메타포구나, 싶더라고.


지원은 킥킥거리며 웃었고, 메타포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상황 판단이 빠른 아빠와 엄마는 동생이 먼저 결혼한 것에 대해 충격을 받기는커녕 농담이나 하는 큰딸을 좀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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