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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1. 연재소설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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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인사’가 끝났을 때 방문이 열리고 트레이닝 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영진이 나왔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지원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방으로 들어간 영진은 한참 퉁탕거리는 소리를 낸 뒤 겉옷을 들고 나왔다.


영진이 현관 앞으로 가자 센서 등이 반짝, 불을 밝혔다. 맨발로 현관에 서서 운동화를 찾고 있을 때 지원이 등 뒤에서 그를 불렀다. 


-오빠.


오빠 소리에 영진이 겉옷을 든 채로 천천히 돌아보았다. 잘못 들었나, 의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싸운 지 일주일 만에 누군가를 부르고 서로의 얼굴을 정면에서 쳐다보는 것이었다. 


지원은 결혼 후 상황에 따라 영진을 오빠, 자기야, 여보라고 불렀으나 자기야나 여보는 친밀감과 애정을 드러낼 때 쓰는 특별한 호칭이었다. 평소에는 오빠라고 불렀다. 알고 지내다가 처음 둘이 만나 커피 마시며 얘기하던 날, 영진이 다음에 만날 때는 영진 씨, 말고 오빠라고 불러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요, 라고 얼버무리면서 이 사람은 여자를 잘 모르는 구나, 생각했다. 호칭이 그렇게 중요한가. 촌스럽게 왜 이리 호칭에 연연하시나. 내가 그쪽을 왜 오빠라고 부릅니까, 친오빠도 없는데. 마음이 괜히 삐딱해졌다.


그때 오빠라는 말을 듣고 싶어 안달하던 영진은 지원이 계속 오빠라고 부르자 나중에는 자기야, 라고 불러달라고 졸랐다. 지원이 오빠, 하고 외치듯 부르면 자기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겁이 난다고 했다. 늘 쓰던 호칭으로 상대를 부르면 왜 그 안에는 애정이나 칭찬보다 요구나 책망이 더 많이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것은 부르는 사람의 잘못일까. 듣는 사람의 문제일까. 둘 사이의 애정이 식었기 때문일까.


피아노 소리는 어느새 멈추었고 지원이 부른 오빠, 소리도 거실에 흩어져버렸다. 냉전 중일 때 지원이 먼저 말을 건 적은 없었다. 연애할 때나 결혼한 뒤에도 싸우고 난 뒤 먼저 침묵을 깨는 건 늘 영진이었다. 지원아, 이름을 부르거나 자기야, 람쥐야, 애칭을 부르며 이제 밥 좀 먹자고 말문을 열었다. 영진이 먼저 말을 걸면 지원은 잠깐 뜸을 들였다가 사과했다. 


-그래. 밥 먹자. ……생각해보니까 내가 좀 심했네. 


그동안의 침묵이 갑갑했다는 듯 지원의 사과는 길게 이어졌다. 가끔은 메뉴를 고르고 밥을 먹는 동안에도 사과의 말을 종알거렸다.


-그게 뭐라고.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닌데 참지를 못했어. 화내서 미안해.


지원이 사과하면 영진은 말해봐, 네가 뭘 잘못했는데? 꼬치꼬치 따지며 피곤하게 굴지는 않았다. 영진은 사과하고 화해하면 그 싸움의 페이지는 다시 들춰보지 않는 타입이었다. 다만 싸움의 원인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면서 그걸 바꾸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영진이 페이지를 덮어두는 편이라면 지원은 그걸 들추는 쪽이었다. 이번 싸움에서 나는 이런 부분을 잘못했는데, 오빠는 어때? 다음에는 안 그럴 거지? 복기하고 다짐을 받으려는 지원 때문에 종종 제 2의 싸움이 시작되곤 했다. 자신의 그런 면이 싫어서 고치려고 노력해봤지만 마음뿐이었다. 언제나 말을 꺼낸 뒤에, 영진의 표정이 바뀌는 걸 보고 나서야 후회했다. 그때마다 영진이 싸움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도 노력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런 거구나, 이해했다. 지원을 무시하고 화나게 만들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귀찮아서 버티다보니 싸움이 시작되는 거라고. 그러나 그 이해 역시 그때뿐이었다. 


영진은 겉옷을 든 채로 현관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지원은 테이블에 앉아 현관의 센서 등이 꺼졌다가 다시 켜지는 것을 보았다.


-우리 얘기 좀 해.

-재혁이랑 저녁 먹기로 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순 없잖아.


그 말에는 영진도 반박하지 못했다.


결혼 후 처음 싸웠을 때는 한 두 시간 동안 말하지 않았고 그 다음에는 반나절, 한나절로 늘어났다. 그러다가 냉전 기간이 하루 이틀을 넘어섰다. 반 년 전부터는 일주일씩 말도 섞지 않은 채 각 방을 쓰며 지냈다. 처음 일주일은 서로 자존심을 세우며 시간을 끈 기분이었지만 한 번 일주일의 선을 넘고 나자 그 다음부터는 일주일은 버텨야 자신이 화났다는 걸 입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지난 번 싸움에는 열흘 넘게 냉전 상태가 이어졌고 이번에는 아직 일주일째지만 보름을 가뿐이 넘기며 장기전에 돌입할 것 같은 양상을 보였다.  


영진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재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 다음 지원을 쳐다봤다. 지원도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는 영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사이에 그는 피곤할 때 주로 생기는 왼쪽 쌍꺼풀이 생겼다. 싸움은 격렬할 때도 생활을 가장한 냉전이나 휴전 상태일 때도 심신을 지치게 만든다. 서로 사이가 좋을 때도 출근해서 사람들을 상대하며 밥벌이하고 사는 건 힘들다. 안식처까지 무너지면 마음 붙일 데가 없어서 몸과 영혼이 급속도로 황폐해진다.

   

평소에 지원과 영진은 의견 조율을 하며 잘 맞춰나가는 편이지만 양보하기 힘든 부분에서 의견이 충돌하거나 불만, 문제가 생기면 격렬하게 말다툼을 벌였다. 목소리가 커지고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는 동안 한 사람이 사과하며 물러서지 않으면 감정이 틀어져서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상대의 영역에 뛰어 들어가서 총을 쏘고 육탄전을 벌이며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다가 깊숙한 곳에 묻혀있는 시한폭탄을 발견한 순간, 그것이 지금 나를 날려버리려고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두 사람은 사랑과 관계에 대해 회의하며 가장 차가운 상태로 식었다. 


그때부터 화해하는 순간까지 각 방을 쓰면서 집의 영역을 나누어 쓰는 게 두 사람의 불문율이었다. 주로 지원이 침실을 사용하고 영진이 서재 겸 컴퓨터 방에서 지냈다. 이사 오기 전에는 거실에 있는 화장실 앞에서 어색하게 마주치곤 했는데 새 집으로 이사 온 뒤에는 그럴 일이 없어졌다. 


출 퇴근 시간은 알아서 조절했다. 공무원인 영진이 일찍 출근했기 때문에 지원은 그가 나갈 때까지 방에서 뭉그적거렸다. 저녁에는 각자 편한 시간에 들어왔다. 영진은 작정한 듯 온갖 모임에 참석하며 새벽에 들어왔고 지원은 매장 문을 닫자마자 새로운 저녁거리를 사 가지고 빈 집의 문을 열었다. 월요일에는 순대볶음, 화요일에는 일식 돈까스, 수요일에는 쌀국수를 포장해오는 식이었다. 그걸 먹으며 밤이 깊어 새벽이 될 때까지 다시 보기로 종영된 드라마를 시청했다. 혼자 먹는 밥은 유난히 빨리 식고 열심히 먹어도 줄지 않고 금세 허기가 졌다.


냉전에 돌입하면 집에서는 같이 밥을 먹지도 않고 밥을 해먹지도 않는 게 신혼 초부터 그들이 유지해 온 방식이었다.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 건 공동의 사용 공간인 주방에서 마주치는 걸 최소화해야한다는 암묵적인 약속과도 같았다.  


지원과 영진은 마주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을 켜지 않은 실내는 차근차근 어둠에 잠겼다. 누구도 일어나서 불을 켜지 않았다. 시선을 둘 데 없는 영진이 테이블 중앙에 있는 새끼 손톱만한 얼룩을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거실에서도 그의 이마 라인이 좀 더 위로 올라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투기 전에 두 사람은 탈모 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약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M자형 탈모가 꽤 진행됐다는 지원과 이 정도는 탈모도 아니라는 영진이 팽팽하게 맞섰다. 다른 남자들은 머리가 한 올만 빠져도 호들갑을 떨어서 피곤하다는데 영진은 대체 얼마나 더 이마가 벗겨져야 현실을 인정할지 답답했다. 며칠에 걸친 옥신각신 끝에 영진은 마지못해 탈모를 인정했고 탈모 약을 먹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병원에 갈지 한의원에 갈지, 정말 약을 입에 털어 넣을 때까지는 가야할 길이 멀었다. 그런데 둘이 이런 지경이 됐으니 탈모 약 얘기는 언제 다시 꺼내게 될지 알 수 없는 안건이 되었다.


지원은 일어나서 거실과 주방의 불을 켰다. 그리고 건조대에서 컵을 두 개 꺼냈다. 


-커피 마실래? 녹차 줄까? 허브티?

영진이 멍한 얼굴로 쳐다봤다. 


-아무 거나.

지원은 수납장을 열고 티백과 캡슐을 살펴봤다. 저녁 시간 전이고 둘 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안 했으니 커피나 녹차보다는 따뜻한 코코아가 나을 것 같았다. 


-나가서 뭐 먹을 거야?

지원은 코코아가 든 컵을 영진의 앞에 놓았다.


-재혁이가 먹자는 거 먹으면 되지. ……근데 할 얘기라는 게 뭐야.


그는 마치 그들 사이에 다른 화제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했다. 얼굴빛이 검은 영진은 고단해보였고 목소리와 표정에서 피곤함이 찐득하게 묻어났다. 사과를 주고받거나 진지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았고 그런 걸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중에 다시 얘기할까. 지원은 잠시 고민했다. 영진의 태도에 의욕이 사라진 건 맞지만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이런 냉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이 지나가면 두 사람은 휴전에 들어갈까. 극적으로 화해하게 될까. 영진은 재혁을 만나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와 다시 서재에서 잠들 테고 이 생활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걸 끝내고 멈추자고 얘기하기에는 지금이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커피와 노을이 지는 일요일 저녁과 피아노 연주 때문에 감상적으로 변한 건 사실이지만 감상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이게 뭐 어때서.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는 거지.


다들 깨 볶으면서 사는 거 아니야. 영진은 지원을 쳐다보지 않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가 하는 말도 손 안에서 뭉개졌다.


영진이 싸움에 지쳐서, 지원과 사는데 무감각해져서 이런 상태가 정말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게 두려워서 다들 이런 식으로 산다고 믿기로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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