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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4.11.1
[eBook] 파친코 2
- 글쓴이
- 이민진 저
인플루엔셜
아주 오랜만에 천 쪽에 가까운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아주 신기한 경험을 했다. 디지털 책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책에 몰입하기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는 놀라운 흡입력을 가졌다. 주변에 어떤 소음이 있든, 책의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시작하든 나는 불과 십초 내에 책의 현장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총 3대의 가족이 등장하고 시간과 장소가 여러 번 전환되는 대서사인 만큼, 파친코를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지면의 한계와 나의 내공 부족으로 겨우 몇 가지의 이야기만 할 수 있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먼저, 소설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얘기해보고 싶다. 작가가 이 책을 완성하는 데에는 자그마치 몇십 년이 걸렸다고 했다. 처음 잡았던 방향을 완전히 틀었고, 더 사실에 다가가기 위해 그곳에 살며 수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래서 였을까, 소설 속 묘사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그 시대, 그 장소에 가본 적 없던 내가 책만 펴면 단 몇 십 초 내로 그곳에 있었다. 묘사 하나 하나가 생생함을 넘어서 정성스러웠다. 어떤 것도 허투루 표현하지 않았다. 색깔, 냄새, 형상,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총동원됐고 그 순간의 분위기와 공기의 흐름까지 표현되었다. 또, 아무렇지 않은듯 담담하게 서술하는 방식이 좋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했고, 흥분하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목소리 때문에 나는 작중 인물들의 죽음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고, 더 슬펐다. 그리고 이 담담한 목소리의 이면에는 인물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더욱 몰입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려 한다. 한마디로 이민자 혹은 이방인의 삶일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의지와 관계없이 타국에서 생을 이어간다. 저마다의 생존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일, 혹은 불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그들에게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재일 교포 1세대로 일본에 정착한 선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한다. 가난했고 행색이 추레했으며,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부산 사투리의 말씨는 그녀가 일본 땅에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존재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직접 본 이가 아니라면 그런 이들이 살고 있다는 걸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둘 째 아들인 모자수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형 노아는 일본인이 될 수 없는, 더러운 야쿠자 조선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는 운명을 바꿀 수 없음에 좌절하고 자살하지만 모자수는 바꾸려했다. (이 둘 모두 방향이 어찌 되었든 유일한 선택지가 파친코였다는 사실은 슬픔이자 아이러니다.) 모자수는 파친코 사업으로 부유해졌지만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는 다른 삶을 열어주려 했다. 서양인, 일본 상류층과 서구화된 교육을 받게 하고 외국 생활을 하게 한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을까,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또렷해질 뿐이었다. 솔로몬은 이 땅에 살기 위해 지문을 등록해야 했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곳의 사람들과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야 했다. 보이는 차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더 무서운 법이다. 솔로몬 가족의 힘을 빌어 원하던 부동산을 손에 넣었던 일본인 가즈는 그에게 억울한 오명을 씌운 채 하루 아침에 해고해 버린다. 결국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했고,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줄 알았던 솔로몬의 마지막 종착지도 파친코가 되었다. 노아도, 모자수도, 솔로몬도,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놈 취급을 하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방인의 삶은 이런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기 위한 허락을 구해야 하는 삶. 우리는 선자와 그녀의 3대의 가족들이 살아낸 삶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도 바꿀 수 없는 벽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이민자가 되어버린 이들의 아픔은 누가 보상해 주는가, 가만히 생각해본다.
조승연 작가와의 짧은 인터뷰 영상을 보고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이방인이 아닌 삶을 사는 나에게 타국의 동포들이 인종을, 출신을 이유로 차별 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 낯선 사실이었다. 이 책을 접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장면이기도 했다. 우리 각자의 정체성은 누가 정하는가?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고 한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한국인의 핏줄을 받았다고 해서 미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이방인들의 아픔은 타인의 정체성을 함부로 규정하는, 우리의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인 시각에서 비롯된다. 영상 속 이민진 작가가 언급했던 'Global Citizenship'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세상 어디에도 차별이 없는 낙원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아갈 수 있다.
이 글의 끝에 '파친코'의 의미에 대해 떠올려 본다. 파친코는 다른 번듯한 직업을 얻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재일 교포들에게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한편으로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완전한 일본인이 되려고 했지만 자살을 택한 노아에게도, 재력으로 운명을 바꾸어보려 했던 모자수에게도, 큰아버지/아버지와 달리 부유하고 서구화된 환경에서 자란 솔로몬에게도 마지막 종착지는 늘 파친코였다. 또, 파친코는 일본인들이 재일 동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했다. 기계를 조작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게임 업장. 왠지 모르게 찝찝하고 불법이 자행될 것만 같은 의심어린 시선. 그들이 견뎌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친코는 인생이라고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다이얼을 돌려 조정할 수는 있지만 변수들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하지만 내가 행운의 주인이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자꾸만 걸게 하는. 불확실성과 희망의 집합체말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나지만, 나는 이민진 작가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한국인을 애정 가득 담은 시선으로 본다. 책 속 주인공 한 명 한 명에 대한 정성스러운 묘사도, 그녀가 자이니치를 소설의 소재로 삼은 이유도, 모든 것이 그녀의 애정을 대변한다.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도 나는 놀라웠다.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자신을 이루는 한국이라는 요소에 대한 그녀의 진심이 결국 인종과 출신을 불문하고 어우러지는 세상을 추구하는 멋진 가치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먼저, 소설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얘기해보고 싶다. 작가가 이 책을 완성하는 데에는 자그마치 몇십 년이 걸렸다고 했다. 처음 잡았던 방향을 완전히 틀었고, 더 사실에 다가가기 위해 그곳에 살며 수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래서 였을까, 소설 속 묘사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그 시대, 그 장소에 가본 적 없던 내가 책만 펴면 단 몇 십 초 내로 그곳에 있었다. 묘사 하나 하나가 생생함을 넘어서 정성스러웠다. 어떤 것도 허투루 표현하지 않았다. 색깔, 냄새, 형상,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총동원됐고 그 순간의 분위기와 공기의 흐름까지 표현되었다. 또, 아무렇지 않은듯 담담하게 서술하는 방식이 좋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했고, 흥분하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목소리 때문에 나는 작중 인물들의 죽음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고, 더 슬펐다. 그리고 이 담담한 목소리의 이면에는 인물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더욱 몰입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려 한다. 한마디로 이민자 혹은 이방인의 삶일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의지와 관계없이 타국에서 생을 이어간다. 저마다의 생존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일, 혹은 불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그들에게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재일 교포 1세대로 일본에 정착한 선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한다. 가난했고 행색이 추레했으며,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부산 사투리의 말씨는 그녀가 일본 땅에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존재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직접 본 이가 아니라면 그런 이들이 살고 있다는 걸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둘 째 아들인 모자수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형 노아는 일본인이 될 수 없는, 더러운 야쿠자 조선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는 운명을 바꿀 수 없음에 좌절하고 자살하지만 모자수는 바꾸려했다. (이 둘 모두 방향이 어찌 되었든 유일한 선택지가 파친코였다는 사실은 슬픔이자 아이러니다.) 모자수는 파친코 사업으로 부유해졌지만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는 다른 삶을 열어주려 했다. 서양인, 일본 상류층과 서구화된 교육을 받게 하고 외국 생활을 하게 한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을까,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또렷해질 뿐이었다. 솔로몬은 이 땅에 살기 위해 지문을 등록해야 했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곳의 사람들과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야 했다. 보이는 차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더 무서운 법이다. 솔로몬 가족의 힘을 빌어 원하던 부동산을 손에 넣었던 일본인 가즈는 그에게 억울한 오명을 씌운 채 하루 아침에 해고해 버린다. 결국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했고,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줄 알았던 솔로몬의 마지막 종착지도 파친코가 되었다. 노아도, 모자수도, 솔로몬도,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놈 취급을 하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방인의 삶은 이런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기 위한 허락을 구해야 하는 삶. 우리는 선자와 그녀의 3대의 가족들이 살아낸 삶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도 바꿀 수 없는 벽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이민자가 되어버린 이들의 아픔은 누가 보상해 주는가, 가만히 생각해본다.
조승연 작가와의 짧은 인터뷰 영상을 보고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이방인이 아닌 삶을 사는 나에게 타국의 동포들이 인종을, 출신을 이유로 차별 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 낯선 사실이었다. 이 책을 접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장면이기도 했다. 우리 각자의 정체성은 누가 정하는가?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고 한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한국인의 핏줄을 받았다고 해서 미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이방인들의 아픔은 타인의 정체성을 함부로 규정하는, 우리의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인 시각에서 비롯된다. 영상 속 이민진 작가가 언급했던 'Global Citizenship'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세상 어디에도 차별이 없는 낙원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아갈 수 있다.
이 글의 끝에 '파친코'의 의미에 대해 떠올려 본다. 파친코는 다른 번듯한 직업을 얻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재일 교포들에게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한편으로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완전한 일본인이 되려고 했지만 자살을 택한 노아에게도, 재력으로 운명을 바꾸어보려 했던 모자수에게도, 큰아버지/아버지와 달리 부유하고 서구화된 환경에서 자란 솔로몬에게도 마지막 종착지는 늘 파친코였다. 또, 파친코는 일본인들이 재일 동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했다. 기계를 조작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게임 업장. 왠지 모르게 찝찝하고 불법이 자행될 것만 같은 의심어린 시선. 그들이 견뎌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친코는 인생이라고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다이얼을 돌려 조정할 수는 있지만 변수들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하지만 내가 행운의 주인이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자꾸만 걸게 하는. 불확실성과 희망의 집합체말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나지만, 나는 이민진 작가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한국인을 애정 가득 담은 시선으로 본다. 책 속 주인공 한 명 한 명에 대한 정성스러운 묘사도, 그녀가 자이니치를 소설의 소재로 삼은 이유도, 모든 것이 그녀의 애정을 대변한다.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도 나는 놀라웠다.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자신을 이루는 한국이라는 요소에 대한 그녀의 진심이 결국 인종과 출신을 불문하고 어우러지는 세상을 추구하는 멋진 가치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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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