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의 기록

생명은 소중해
- 공개여부
- 작성일
- 2020.11.1
만약 누가 나에게 요즘 뭐하면서 지내니? 라고 물으면 나는 "넷플릭스와 심시티"라고 말할 것이다(실제 그렇게 말했다). 요즘 '언텍트'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사실 그 단어는 나와는 그럭저럭 맞는다. 난 전부터 혼자 노는 게 편하고 좋았다. 물론 같이 노는 것도 좋다.
'나의 아저씨'는 그냥 찜해두기만 했다. 한창 '블랙 미러'를 보고 있었으니까. 블랙 미러를 드디어 다 보고 뭘 볼까? 하던 차에.. 어떤 해외 유명인이 '나의 아저씨'를 극찬한 트윗을 올렸다는 뉴스를 봤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박동훈과 이지안.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두 사람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지만 가까워지기 힘든 관계다. 박동훈은 74년생의 부장이고, 이지안은 21살의 계약직이다. 박동훈은 옛날로 말하면 완전 선비다. 정직하게 살아서 손해 많이 봤을 사람이다. 반면 이지안은 사무실 사람들조차 투명인간 취급하고 스스로도 말도 안하고 투명인간 노릇을 한다. 그리고 이지안은 눈치가 빠르고 임기응변이 강하다. 두 사람 사이에 두 가지 우연이 있었다. 첫째는 사무실에서 이지안이 박동훈을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 둘째는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이다.
어느 날 박동훈에게 발신자가 없는 소포가 도착했고, 이지안은 그것과 관련된 기회를 포착했고, 박동훈에게 처음으로 한 마디 한다. "밥 좀 사주죠?"
이후로, 지안은 동훈에게 이 말을 꽤 하는데, 나는 이 문장에서 생소함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밥 사달라고 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 평생 이런 식으로 밥사달라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밥 좀 사주세요?" "밥 좀 사라" "밥 사주세요" "밥이나 사요" 등의 여러 표현이 가능한데, "밥 좀 사주죠?"라는 문장을 사용한 이유가 뭘까?(이걸 영어로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하다). 이 문장은 '요청'의 의미보다는 일종의 '협박'이 들어있다. 듣는 사람은 기분좋을 리 없다. '당신에 대하여 약점을 잡고 있으니 협조 좀 하시죠'라는 의미니까. 실제로 지안은 동훈의 약점을 포착했다.
게다가 지안은 며칠 후 대표이사와 관련된 또다른 기회를 포착한다. 그리고 그 두 기회 사이의 관계까지 파악한다. 지안은 부장과 대표이사의 약점 모두를 알게 된 것이다. 로또가 따로 없었으리라. 이 세상에서 지안 밖에 모르는 두 어른의 심각한 약점이다.
지안은 태연하고 대담하게 행동한다. 거래를 한다. 동훈에게는 한 달 동안 밥사기, 그리고 대표이사에게는 상무와 부장 제거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 그 둘은 응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갈수록 지안은 동훈이 자신처럼 불쌍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불쌍한 사람은 많다. 영화 '레 미제라블'이 '불쌍한 사람들'이다. 쎄고 쎈 게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박동훈이나 이지안이나 사무실 사람들, 박동훈의 형과 동생, 엄마 등등 겉보기에는 불쌍해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그럭저럭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불쌍하더라도 내색하지 않고 모두들 안불쌍한 척 산다. 대부분 그렇게 산다. 멀쩡한 척, 괜찮은 척. 하지만 그렇게 산다고 불쌍한 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저 견디며 살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 중에 안 불쌍한 사람은 거의 없다. 동훈의 엄마는 삼형제 걱정하느라 불쌍하고, 동훈의 형 상훈은 일찍 퇴직하고 백수로 지내며 이혼 위기에 있고, 동훈의 동생 기훈은 변변한 영화 한편 못찍고 있는 감독이자 백수다(기훈을 좋아하는 여배우 역시 엄청 불쌍하다). 동훈의 아내는 나중에 자신의 죄 때문에 엄청난 마음고생을 한다. 술집을 운영하는 동훈의 친구 정희는 27년이 넘게 오지 못할 남자(스님)를 기다리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다. 그리고 동훈이 사는 동네 분들도 다들 변변치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 지안을 때리고 괴롭히는 사채업자의 아들도 결국 알고보면 불쌍한 놈이다. 스스로 제어가 안되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듯한 놈인데, 이 자 역시 스스로를 괴롭힌다. 유일하게 덜 불쌍게 보이는 이는 스님이 된 동훈의 친구와 지안을 도와주는 게임 좋아하는 친구 정도다.
실제로도 안 불쌍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돈이 많다고 안 불쌍한 건 아니다. 친구가 많다고 안 불쌍한 것도 아니고, 성공했다고 안 불쌍한 건 아니다. 다들 불쌍하고 부족하기에 사람들은 같이 사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내가 좀 덜 불쌍하게 느낄 것이고 사는데 좀 더 자신감을 가질테니까.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니까.
박동훈과 이지안이 그런 관계로 발전한다. 같이 밥먹고 술먹다 보니 나처럼 불쌍한 사람임을 알게 되고 서로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미로 같고 죽을 것 같이 힘든 삶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스스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타인의 작은 손길만으로도 그 출구가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둘은 밥을 먹으며 술을 마시며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여백의 미인가?). 누군가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준다는 건 상당한 힘이 된다. 들어주는 것만으로 스스로 답(출구)을 찾을 수 있으니까.
여기서 동훈과 지안에 대하여 얘기해 본다.
동훈은 구조기술사다. 건물이 지진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게 주된 임무인 듯 하다. 실력은 회사에서 알아준다. 하지만 아내와의 관계는 안좋다. 이건 동훈의 책임도 있는 듯 하다. 맨날 동네에서 형들과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남편을 좋아하는 아내는 별로 없다(어찌보면 답답한 남자). 형태만 부부지, 이미 죽은 부부다. 이 동네(후계동)은 지연과 학연이 아주 끈끈한 듯 하다. 40이 넘는 어른들이 이렇게 똘똘 뭉쳐서 술먹고 조기축구하는 건 요즘 흔한 풍경이 아니니까. 아, 그리고 동훈을 포함한 삼형제는 거의 매일 술이다. 동훈은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신다. 심히 건강이 걱정된다. 술 좀 작작 드시길. 그런데 이런 동훈이 가끔 사람을 진하게 감동시키는 말을 한다. 그렇게 멋진 말들을 속에 담아놓고 있다니. 청소 일하는 형에게 망신 준 빌라업자에게 가서, '프리즌 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도 구조기술사였다며 망치로 두들기는 장면은 정말 멋졌다. 사채업자의 아들 찾아가서 지안의 빚이 얼마냐고 물어보고 싸우는 장면도 정말 멋졌다. 그리고 지안에게 나중에 우연히 만나더라고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관계가 되자고 한 부분도 멋졌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도 멋졌다.
지안은 거짓말하는 법이 없다. 어디까지 죽여봤어? "사람" 동훈을 좋아하니? "예" 자신감일까? 뭔 배짱일까? 어떤 상황 어떤 이에게든 숨기지 않는다. 가난과 빚에 쪼들린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자신감과 배짱이 필요했으니라(일종의 방어막). 동훈과 그 밖의 어른들은 아이 대하듯 하지만 이미 지안은 아이가 아니다.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을 했으니까. 지안의 그 과감함과 태연함으로 이 드라마에서 지안이 모든 열쇠를 가지게 된다. 결국 모든 이들의 운명은 지안의 손에 달려있다. 아무런 존재감 없던 투명인간 취급받던 사무실 잡일이나 하던 계약직이 아무도 모르게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지안만이 그걸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밥 좀 사주죠?"도 일종의 그런 패기(깡)일까? 그리고 지안도 술 좀 적게 드세요. 아, 그리고 밤에 믹스커피 2~3개를 한꺼번에 타먹으면 몸에 안좋아요!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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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안, 삼안E&C, 안한초등학교 -> 모두 '안'이 들어있다. 편안할 '안'인가?
대놓고 광고를 한다. 맥주, 콜드브루커피음료, 자동차는 모두 쉐보레다. 몽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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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잡아봤어?
뻥.
근데 왜 벌레는?
마음에 걸리는 게 없으면 뭘 죽여도 문제없어.
근데 마음에 걸리면 벌레만 죽여도 탈 나.
"난 이상하게 옛날부터 둘째 형이 제일 불쌍하더라.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항상 양심 쪽으로 확 기울어 사는 인간. 제일 불쌍해."
"무당벌레는 그냥 죽이기 좀 그렇지 않아? 어디까지 죽여봤어?"
"사람"
"미안하다. 말시켜서"
어디에 살아?
안한 초등학교 뒤요. 맞아요, 엄청 후진 동네.
아버지는 뭐하시고?
아저씨 아버지는 뭐하세요?
난 아저씨 아버지 뭐 하시는지 하나도 안 궁금한데. 왜 우리 아버지가 궁금할까?
아, 그냥 물어봤어.
그런 걸 왜 그냥 물어봐요?
어른들은 애들 보면 그냥 물어봐, 그런 거.
잘사는 집구석인지 못사는 집구석인지. 아버지 직업으로 간보려고?
미안하다.
실례예요, 그런 질문.
그래, 실례했다.
짐작가는 것도 없어요?
아나 보지, 뭐. 내가 자기 싫어하는 거.
왜 싫어하는데요?
사람 싫은데 뭐 이유 있나. 그냥 싫어.
이유 있던데, 잘 생각해 보면.
왜 싫은지 이유도 생각하기 싫은 사람이 있어.
정말 싫어하는구나.
괴롭겠다. 그런 사람이 잘나가서.
근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은 다 잘돼.
나 좀 싫어해줄래요?
엄청나게, 끝 간 데 없이. 아주아주 열심히.
나도 아저씨 싫어해줄게요. 아주아주 열심히.
근데 선배는 내가 왜 잘라야 돼요?
뭔 죄를 졌나보지. 나한테. 근데 내가 모르고 있나보지.
내가 유혹에 강한 인간이라 여태 사고 안 친 거 같아?
유혹이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모르는 거야. 내가 유혹에 강한 인간인지 아닌지.
재밌냐? 나이 든 남자 갖고노니까 재밌어?
재미는. 그냥. 남자랑 입술 닿아 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그냥 대봤어요.
나만큼 지겨워 보이길래.
어떻게 하면 월 5,6백을 벌어도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가 있을까?
대학 후배 아래서.
그 후배가 자기 자르려고 한다는 것도 뻔히 알면서 모른 척.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여기서 제일 지겹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
나만큼 인생 거지 같은 거 같아서.
입술 대 보면 그래도 좀 덜 지겨울까.
잠깐이라도 좀 재밌을까. 그래서 그냥 대 봤어요.
그래도 여전히 지겹고 재미없고, 똑같던데. 아저씨는 어땠어요?
부모님은 아시냐?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저씨 부모님은 아세요? 아저씨 이렇게 사는 거.
아이, 우리 부장님 이 건물 진짜 좋아해.
이렇게 낡은 걸 왜 이렇게 좋아하세요?
나랑 같애.
예? 아니, 요즘 뭐 몸 어디 안 좋으세요?
74년생.
오, 동갑이네! 아, 이게 건물도 부장급이네, 아유.
이 건물 위치 원래 하천이야.
예? 어디가, 다 시멘트 바닥이구먼.
야, 봐 봐. 물길 따라 지어 가지고 이렇게 휘었잖아.
아, 맞네, 그러네.
복개천 위에 지어 가지고 재건축도 못 하고.
그냥 이렇게 있다가 수명 다하면 없어지는 거야.
터를 잘못 잡았어.
그것도 나랑 같애.
나도 터를 잘못 잡았어.
지구에 태어나는 게 아닌데.
아이, 우리 부장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센치해?
뭐, 경직된 인간이 불쌍하네 어쩌네. 아이, 그래서 뭐 어디에 태어나고 싶은데요?
안 태어날 거다, 새끼야.
시간 좀 있나?
왜, 어디 나가 갖고 한따까리라도 하게?
얘기 좀 하게.
무슨 얘기?
나도 무릎 꿇은 적 있어. 뺨도 맞고 욕도 먹고.
그 와중에도 다행이다 싶은 건. 우리 가족은 아무도 모른다는 거.
아무렇지 않은 척. 먹을 거 사들고 집으로 갔어.
아무렇지 않게 저녁을 먹고.
그래,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무슨 모욕을 당해도 우리 식구만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
근데 어떤 일이 있어도 식구가 보는 데서 그러면 안 돼.
식구가 보는 데서 그러면, 그 땐 죽여도 이상할 게 없어.
에이씨, 말 더럽게 많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우리 엄마가 봤다고.
이제부터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콘크리트, 여기 뚫었냐? 지진 견디라고 해 놓은 거.
너 들락날락 편하려고 건물 척추뼈를 날려?
아, 천장은 뚫어서 계단 내고. 보, 슬래브 다 잘라먹고.
너 옥상도 잘 만들어 놨더라. 나무도 심고.
옥상을 설계할 때 하중을 적게 잡아. 뭐 있을 게 없으니까.
근데 거기다 흙을 1미터씩 쌓아?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삼풍이 무너진 거야!
옘병, 너 뭐, 건축사야?
구조 기술사다.
야, 구조는 해변이나 가서 해, 새끼야.
야, 이 무식한 새끼야.
너 '프리즌 브레이크'도 안 봤냐?
석호필 직업이 구조 기술사야, 건물 구조!
스트럭처럴 엔지니어!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것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야.
아파트는 평당 300킬로 하중을 견디게 설계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학교나 강당은 하중을 높게 설계하고...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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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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