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본 후에

생명은 소중해
- 작성일
- 2014.4.2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감독
- 웨스 앤더슨
- 제작 / 장르
- 미국, 독일
- 개봉일
- 2014년 3월 20일
친구가 보고싶은 영화가 뭐냐고 묻길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얘기했다. 전같으면 '그냥 아무거나' 이랬을 것이다. 내가 점점 내인생을 찾으려는 것 같아 대견하다. 그리고 친구는 아무말 없이 그 영화를 예매했다.
강남역 11번출구로 나와서 걷는데(강남CGV로 가는 중, 그런데 CGV 홈페이지를 보면 '강남CGV'가 아니라 'CGV강남'이다. 이 둘의 차이는 CGV가 앞에 있느냐 뒤에 있느냐이다. CGV가 앞에 있게 하고 싶구나), 이 거리는 여전히 사람많고(특히 젊은 사람, 특히 젊은 여자) 활기차다. CGV건물에 가까이 왔는데 알라딘중고서점이 보인다. 나는 그 지하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들을 보는데,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가 꽂힌 곳에 다다랐고 그 두꺼운 책들을 한권씩 들어서 저자 사인이 있는지 가격이 얼마인지 봤다. 그런데 저자 사인이 있는 첫 번째 책이 가장 쌌다(7,100원). 나는 그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와 만났고 CGV 건물 뒤쪽으로 이동, 한가한 식당('나무와'-> 관련 글 나중에 올릴 예정)에서 파스타, 피자를 배부르게 먹고 3시 25분 시작 영화를 보러 갔다. 그런데, 영화 시작 전 광고들이 좀 색다르다. 좀처럼 CGV에서 보기 힘든 광고들.ㅎㅎ 관객석에는 반 조금 넘게 자리가 차 있었다. 이 영화가 인기있는 영화가 아니라서 광고가 잘 안들어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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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더 좋았다. 난 이 영화 포스터만 보고 느낌이 왔다. 뭔가 있는 영화라는 걸..

이런 디자인으로 영화 포스터를 만들 수 있는 영화는 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2014년에는. 앞부분에 부다페스트 호텔이 나왔는데 그 커다란 호텔이 온통 핑크색이다.ㅎㅎ 이것 역시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사람은 느낌과 직관을 무시하면 큰코다치거나 기회를 놓치기 쉽다. 나는 내 느낌대로 이 영화를 선택했고 그 느낌은 정확했다.
예전에는 잘 나갔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현재(1950년대) 모습은 그저그렇다. 손님들도 적고 활기도 없고 마치 노인들이 거주하는 요양원같다. 시간은 점점 거꾸로 가서 1940년대 -> 1930년대로 이동한다. 맨처음 나왔던 할아버지 작가가 30대 젊은이로 바뀌고 부다페스트 호텔은 활기로 가득찼다.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또한 구스타프라는 과거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에 대한 영화이다. 사람은 기억으로 시간에게 저항한다. 그럼에도 기억은 왜곡되고 사라진다. 이것에 대한 사람의 또 다른 저항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그것이 왜곡된 것일지라도)에 의존하여 그 기억이 만들어놓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그 사람은 별일 없는 한 스스로의 세계에서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별일이 일어나고 만다. 바로 '전쟁'이다. 구스타프는 나름의 장점과 취향(?)을 살려 나이 많~고 돈도 많~은 여자들을 부다페스트 호텔에 오도록 만든다. 그것이 불륜이든 서비스 정신이든 나는 이해불가지만. 그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부다페스트 호텔을 잘 운영해나간다. 그런데 '전쟁'이 이 안정적인 구스타프 월드에 균열을 만든다(1930년대라면 아마 1차 세계대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담 D의 죽음은 마치 구스타프 월드를 향해 총을 쏜 것과 같다.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실제 목적은 자신에게 남긴 유산이 있나 알아보려고) 구스타프는 로비보이 제로와 함께 기차에 오른다. 유언장(will)에 따르면 마담 D는 구스타프에게 '사과를 든 소년'(boy with apple) 그림을 물려준다. 유족들은 반대하고 구스타프와 제로는 그 그림을 떼어내어 가지고 가버린다. 그리고 부다페스트 호텔 금고에 숨긴다. 그 다음부터 구스타프와 제로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아, 먼저 제로에 대하여 얘기하면, 구스타프가 로비보이에 지원한 소년에게 면접질문을 했다. 경력은? 학력은? 가족은? 결론은 모두 '제로'였다. 그래서 그 로비보이는 '제로'로 불린 듯. 이 로비보이가 구스타프의 맘에 든 것은 왜 부다페스트 호텔에 일하고 싶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최고의 호텔이기 때문이라는 것.
구스타프는 잡혀서 감옥에 간다. 구스타프는 호텔을 잘 운영했듯이 감옥도 나름의 방식대로 잘 운영(?)한다. 구스타프에 대한 호감도는 상승하고 같이 탈옥하자는 제의를 받을 정도다. 결국 탈옥에 성공하는데, 잡힐지 모르는 급박한 순간에도 시를 읆조리고 향수를 안 가져왔다고 제로를 나무란다. 그는 여전히 그만의 세계인 '구스타프 월드'에 살고 있다.
전쟁으로 국경이 폐쇄되어 군인들이 기차를 검문할 때 구스타프는 제로를 위해서 군인들에게 항의를 한다. 첫 번째는 통했다. 군인 중에 구스타프가 아는 사람의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도살장처럼 변해버런 잔혹한 세상에도 희망은 존재한다."
이건 구스타프가 한 말이고, 그는 그 희망 자체였었다고 제로는 회상했다. 이 영화는 늙은 제로의 과거 회상을 부다페스트 호텔에 머물고 있던 작가가 듣는 형식이다. 구스타프가 만든 세상은 얼마나 아늑하고 낭만적이고 인간적인가. 제로를 이민자라고 매섭게 몰아치다가 전쟁 때문에 가족 모두를 잃어서 이곳에 올 수 밖에 없었다고 제로가 말하니, 그럼 이민자가 아니라 망명자라며 구스타프는 제로를 위로한다. 구스타프는 매너있고 예의바르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몸에 베어있다. 그런 가운데 그가 원하는 것들을 얻는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런 그를 누가 미워할 것인가. 그는 어디를 가서든 환영받을 것이고 존경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구스타프는 그만의 세계가 변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아니, 변하는 것들을 외면한 듯 하다. 전쟁이 나고 세상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그는 여전히 과거의 방식대로 사람들을 대하고 과거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군인들에게도 친절하게 때로는 엄하게 대하지만 전쟁상황에서 그게 통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결국 죽는 순간까지 그만의 세계인 '구스타프 월드'라는 환상 속에서 산다간 것이다.
제로는 구스타프를 따라다니며 구스타프를 돕는다. 평소에는 정말 존재가치가 '제로'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제로는 '100%'가 된다. 제로는 구스타프가 '사과를 든 소년' 그림을 가진 후에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줬고, 썰매를 타고 청부살인자를 따라갔고, 청부살인자를 한방에 보내버렸다(구스타프에게 제로는 해결사다). 제로는 어렵지 않게 해결책을 내놨고(근데 제로의 해결책이 특별한 건 아니었다.) 구스타프는 그런 제로가 좋았던 것 같다. 구스타프는 어쩌면 자신이 과거에 얽매어 있어 현실에 적응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제로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시간은 사람의 기억에 곰팡이가 슬게 하거나 먼지를 수북히 쌓이게 한다(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부패한다). 그런 시간의 공격에 대항하며 사람은 습관, 선입관, 편견 같은 성벽을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즉 나이가 들수록) 그 성벽은 두꺼워지고 견고해진다. 그래서 결국 노인들은 자신이 만든 성벽 안에서만 살게 되는 것이다. 이건 일종의 고립이다. 성벽 밖의 새로운 세상은 겁이 나고 생소하다. 노인들은 자신이 만든 매트릭스 세계 안에서 행복하고 싶을 것이다. 그것이 익숙하고 편하니까.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10대에서 30대였을 때 인기가요를 좋아하고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들이 대부분 그런 노래들이다. 나 역시 그렇다. 요즘 최신가요는 왠지 정이 안가고 노래같지가 않다. 왜 그럴까? 나는 몇년이 지나면 40이 되지만 벌써 현실, 새로운 것에 성벽을 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구스타프 같은 사람이 소수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구스타프처럼 과거의 세상 속에 살다가 전쟁같은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을 때 허무하게 무너진 사람들이 여럿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은 점점 왜곡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어찌해야 할까? 구스타프를 비난할 수 없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겼지만 그가 얼마나 인맥을 잘 만들어놨는지 알 수 있다. 여러 명이 전화로 전달 또 전달하여 구스타프와 제로를 자동차에 태워서 기차시간에 정확히 태웠다. 케이블카 두 개가 만나는 지점에서 구스타프를 갈아 태우기도 하고(첩보작전 방불케 함), 수도원 옷을 입히고 고해성사를 들는 형식으로 집사와 만나게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구스타프가 과거 만들어 놓는 단단하고 촘촘한 인맥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그가 산 인생은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인맥 역시 전쟁 같은 급격한 변화, 갑작스러운 태풍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다(인맥 역시 부패한다). 그는 허무하게 갔지만 그는 그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살다 갔다. 그것만으로 구스타프는 만족했을 것이고 행복한 삶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스타일의 영화가 좋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전히 과거에 많이 얽매여 살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배경은 동유럽, 독일쪽 같다. 건물들, 그리고 사람들(특히 군인들)의 모습이 동유럽 스타일이다. 반복을 통한 유머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것이 익살이든, 풍자든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간혹 잔인한 장면들(손가락 네 개가 짤리는, 잘린 여자 머리가 상자에서 나오는)이 있지만 그건 그리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로의 애인인 매들 빵집 여자가 예뻤다. 그런데 왜 그녀의 오른쪽 빰에는 커다란 지도같은 점이 있는 걸까? 영화관에서 제로가 청혼을 하자마자 이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로에게 키스한다. 아, 이 터프함! 제로는 바람둥이인(주로 나이든 여자들을 향한) 구스타프에게 "작업걸지 마세요."라고 거듭 경고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제로는 아가사에게 구스타프가 작업 거는 것 같냐고 물어보고 아가사가 "응"이라고 하자 구스타프는 둘이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이임을 인정한다.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영화 첫장면에 나오는 말이다. 소설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면 아무도 그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그가 듣고 본 것들이 그 안에 녹아 있다. 맛있는 스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가 신선해야 하듯이,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스프는 현실에 기반한 소재들이 신선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군든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건물들, 그리고 건물내부 모습, 전망대, 케이블카, 부다페스트 호텔, 승강기, 자동차 모두 몇 십년 전 것 같다. 이 영화는 DVD로 사서 세세하게 정지화면으로 놓고 보고 싶다. 나는 이 영화 DVD를 살 것이다. 그리고 더 자세히 이 영화를 뜯어보고 싶다.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이든 여자들은 그녀들을 진정 사랑해주는(어쩌면 진정한 사랑으로 가장한) 구스타프라는 남자를 진정 사랑했다. 구스타프와 같이 탈옥한 네 명의 죄수중에 한 명이 유명한 코미디언인데 이 남자가 대사 하나 없다. 구스타프와 제로가 '사과를 든 소년' 그림을 떼어가는 것을 본 하녀의 얼굴이 낯설지 않고 어디선가 본듯 했다. 그래서 누굴까 누굴까 생각하다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엠마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둘은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레아 세아두.
다양한 조연들, 그리고 깨알같은 유머들, 고전 건물과 의상, 잔인한 장면, 구스타프와 제로의 개성, 아름다운 건물과 풍경, 스키타며 내려오는 추격신 등 이 영화는 다양한 양념들이 잘 어울어져 있다. 다양한 맛과 냄새들로 사람들은 정신사납다고 느낄 수 있다. 영화가 끝난 후에야 내가 무슨 영화를 봤지? 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때부터 하나하나 정리가 될 것이다.
나는 구스타프, 제로, 그리고 탈옥한 죄수들, 구스타프를 뒤쫓은 경찰들, 아가사 모두 사랑스럽다. 드미트리와 청부살인자조차도 사랑스럽다(나 역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 자신만의 세계에 살고 다른 세계와 부딪치면 고민하고 방황하는 영혼들. 우리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있는 동시에 끊임없이 다른 이의 세계와 부딪치며 상호작용을 할 수 밖에 없다. 혼자 살지 않는 한 그것은 숙명이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수정하고 풍성하게 만들고 변화시킨다. 그래야 살아남을 것이므로.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이런 삶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가 더이상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위험하다. 마치 구스타프처럼. 불행히도 구스타프같은 사람은 적지 않다(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심하게 말하면 그건(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육체적 사망 이전에 정신적 사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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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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