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연하선경
- 작성일
- 2007.12.3
소설 목민심서 3
- 글쓴이
- 황인경
삼진기획
금정찰방에서 용양위 부사직으로 발령받은 약용에게 정조는 다시 우부승지를 제수하였다. 그러나 약용은 이를 거부한다. 약용은 왜 어의를 거스렸을까?
정조는 약용으로 하여금 이존창 사건을 크게 알리고 약용의 공을 선전하여 곧 판서까지 맡길 생각이었다.
허나 약용의 생각은 달랐다.약용의 나이 이제 35세, 그 나이로 노대신과 꿋꿋이 국사를 다룬다는 것은 사실상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권을 잡은 노론은 남인의 씨를 말리려 하지 않는가?
약용은 결국 곡산부사를 맡게 되었다. 당시 곡산은 큰 혼란에 놓여져 있었다. 전국적으로 지방사령들의 부패는 극에 달해있는데 그중에서도 곡산의 부패는 더욱 심각했기 때문이다.
약용은 훗날 나라의 녹을 먹는 공직자들의 자세에 대해 저술한 학자답게 진정한 목민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나간다.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푸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 여긴 약용은 백성을 위해서는 왕명도 거스를 정도였다. 여기에 반대파들이 가만 있겠는가? 하지만 왕과 신하의 마음은 서로 통했다. 약용은 명사또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온 나라가 곡산처럼만 관리되었다면, 나라에 약용만큼 청렴한 관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약용의 실학정신이 그대로 정치 경제에 반영되었더라면 아니 영,정조의 탕평책이라도 제대로만 이루어졌다면 큰 학자의 약용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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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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