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kirinshoof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9.3.4
딸기밭이여, 영원하리
12월 한 달을, 나는 쉬었다. 1월부터 다시 일하려구요. 주임은 못내 아쉬워했지만 <대입>이란 말에 아, 그래요? 하며 갑자기 존대를 했다. 주임이 아쉬워할 만큼, 12월의 백화점은 세일의 천국이었다. 딱히 입시를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12월이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대학의 누구도 올 것 같지 않은 학과에 원서를 넣었고, 그해도 어김없이 그곳은 미달이었다. 즉
어쨌거나 나는 대학생이 된 것이다. 그래도 대학을 가야 한 이유를 말하자면,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일을 할까 싶어서요. 아, 그래 합격은 했고? 예. 어느 대학? ××대요. 음, 하고 복잡한 미소를 머금던 주임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주부터 나와, 알았어... 요? 라고 했다. 매우 이상한 이유이긴 하지만, 그
요
때문에 나는 대학을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그럴 듯한 학교를 나오고, 그럴 듯한 직장을 얻고, 그럴 듯한 차를 굴리고, 그럴 듯한 여자를 얻고, 그럴 듯한 집에서 사는... 그럴 듯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듯한 인간은 많아도 그런, 인간이 드문 이유도... 그럴 듯한 여자는 많지만 그런, 그녀가 드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럴 듯한 것은 결코 그런, 것이 될 수 없지만
열아홉 살의 나는 미처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두 편의 소설을 그해의 신춘문예에 응모했었다. 그럴 듯한 소설이라 생각했는데 결과가 발표된 지면에는 이름조차 한 줄 나와 있지 않았다. 대신 더 그럴 듯한, 당선작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세상이 원한 것은 더, 그럴 듯한 드라마였다. 고양이는 피부염으로 두 달을 고생했다. 듬성듬성 털이 빠진 고양이를 안고, 일곱 정거장이나 떨어진 동물병원을 오가던 일도 그럴 듯하게 떠오르는 그해 겨울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두 개의 생일선물을 받았다. 하나는 그녀가 손수 짠 목도리였고, 다른 하나는 요한이 선물해 준 비틀즈의 LP였다.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들으며 아마도 그해의 겨울을 보냈다는 생각이다.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요? 난 딸기밭에 가는 중이에요. 실감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고, 머뭇거릴 일도 없죠. 딸기밭이여, 영원하리. LP를 복사한 테입을 워크맨에 꽂고, 하루 종일 그 노래를 들었다는 생각이다. 특히 즐거웠던 것은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요? 난 딸기밭에 가는 중이에요 - 의 부분을 그녀와 함께 듣는 일이었다. 손수 짠 적갈색의 목도리를 두르고, 이어폰을 한 짝씩 나눠 낀 채 그 부분을 듣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던 것이다. 힘들게 이런 걸 왜 짰어요? 뜨개질을 잘 못해서... 그래도 목도리는 제일 쉬운 거예
요
그런데 왜 아직 서로 말을 높이지? 나이도 같잖아? 요한이 추궁했었다. 집요한 추궁 끝에 서로 말을 놓자 얘기가 되었지만 결국 말을 튼 것은 나뿐이었다. 전 이게 편해요. 다음에... 익숙해지면 놓을게요. 요요우스니 요요너스니 또 그런 말로 놀림을 받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 거는? 하고 요한이 볼멘소리를 했다. 난 목은 튼튼해, 또 똑같은 거 하고 다니면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고... 그보다는 장갑이 좋겠다는 생각인데. 더없이 구체적인 주문도 잊지 않았다. 장갑은... 어려워요. 그녀가 속삭였지만 그런 게 통할 인간이 아니었다. 내 손이 얼마나 찬지 알아? 보라구, 찬물로 설거지를 마친 고무장갑도 이보다 차진 않아. 그렇게 냉정한 성격인지 몰랐네. 주변의 외로운 사람에 대한 배려가 요만큼도 없어. 괜찮다고, 하지 말라고 그만큼 말렸지만 결국 요한은 한 달 후에 벙어리장갑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벙어리 좋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요한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버젓이 빨간색 벙어리를 낀 채로 근무를 하던 요한의 몸짓도 생각난다. 요한은 그런,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달부터 정기구독을 신청한 두 권의 잡지가 몰래, 갑자기 그녀의 주소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고개를 숙이던 그녀를 잊을 수 없다. 비틀즈를 들으며, 갑자기 그럴 듯한 인생을 살고 있다 기분이 드는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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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