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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iwon1018
- 작성일
- 2024.3.15
컬티시
- 글쓴이
- 어맨다 몬텔 저
arte(아르테)
내가 크로스핏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봄이었다. 그렉 글래스만이 창시한 ‘크로스핏’은 여러 종목을 섞어 트레이닝하는 운동인데, 크로스핏에는 일종의 ‘은어’가 있다. 이를테면 체육관은 ‘박스’로, 강사는 ‘코치’로, 그날의 운동은 ‘와드’(Workout of the Day)로 칭하는 것이다. 크로스핏을 시작하고 나서 크로스핏을 하지 않는 대다수의 지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이런 단어들을 무심코 내뱉다가 다시 돌아와 그 뜻을 설명하고서는, 다시 내가 일주일에 얼마나 자주 크로스핏을 가는지와 같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크로스핏에 대한 열정이 담긴 한바탕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나를 운동에 빠진 사람처럼 여기기 시작했는데, 그런 게 나쁘지는 않았기에 그냥 내버려뒀고 살짝 즐기기까지 했던 것 같다.
작년에는 정말이지 쉬지 않고 운동을 이어갔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일주일에 대여섯 번씩 운동을 가고, 어떤 날은 하루에 수업을 두세 개씩 듣곤 했다. 운동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런 기분은 무엇인지. 그러다가 (작년 10월 러닝을 하다 발바닥 문제를 발견한 것에 이어) 작년 12월에는 크로스핏을 하다가 철봉에 손을 세게 부딪혀 오른쪽 손가락이 부러지고 말았다.
[대학 입학을 위해 오리건주에서 LA로 온 열여덟 살 얼리사 클라크는 새로운 운동 프로그램 덕에 살을 쫙 뺀 가족을 만나고는 “세상에, 나도 저걸 해 봐야겠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운동의 이름은 ‘크로스핏’이었고, 마침 얼리사의 기숙사 근처에도 체육관이 있었다. 방학이 끝나자마자 얼리사는 남자친구와 함께 초보자 워크숍에 등록했고, 땀범벅에 근육질인 강사들은 남성적인 열정을 발산하며 얼리사를 듣도 보도 못한 용어의 세계로 인도했다. 체육관은 체육관이 아니라 ‘박스’라고 불렸다. 강사는 선생님이나 트레이너가 아닌 ‘코치’였고, 운동 프로그램은 ‘기능적 움직임’으로 이루어졌다. 모두 각자의 WoD(와드, Workout of the Day), 즉 그날의 운동을 수행하는데, 스내치나 클린앤저크 등의 동작이 포함됐다. 각자의 BP(Bench Press), BS(Back Squat), C2B(Chest to Bar),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DOMS(지연성 근육통)도 있다. 누군들 눈에 쏙 들어오는 약어를 싫어하겠는가? 얼리사는 마치 문화를 공유하듯 끈끈한 크로스피터들의 유대에 매혹되었고, 그들의 은어를 낱낱이 익히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마침 크로스핏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다른 운동들을 접해보면서 크로스핏을 앞으로 계속 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살짝 하고 있던 차에 책의 앞부분을 읽고는 금세 책에 빠져들게 되었다.
1992년생의 젊은 저자 어맨다 몬텔은 3HO라는 요가조직과 크로스핏에 빠진 두 인물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 책 <컬티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컬트 언어’ - 곧 ‘컬티시Cultish’를 다루고 있다. 언어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고, 이는 컬트 집단 혹은 지도자에 의해 활용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어맨다 몬텔은 오늘날 컬트 집단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소속감과 해답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기성 종교로” 향하던 이전과 달리, 밀레니얼 세대는 여러 종류의 ‘컬트’에서 종교의 역할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종교의 역할은 의미, 목적, 소속감, 의례를 제공하는 것인데, 오늘날에는 세속적 ‘컬트’가 기성종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컬트 피트니스’는 자본주의 야망과 자기계발에 대한 숭배와 맞물려 헌신/복종/변화 등의 종교적 요소를 인내심이나 신체적 매력 같은 세속적 이상과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어맨다 몬텔은 컬티시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컬트’에는 공식적인 학문적 정의가 없다는 점 - 컬트는 본질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집단을 묘사하기 위한 경멸의 의미로 쓰이며(저자는 그와 마찬가지 맥락에서 ‘세뇌’(brainwash) 역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간과한다는 점과 검증할 수 없는 가설이면서도 그 사람이 ‘세뇌되었다’는 말 한 마디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탐구할 여지를 막아버린다는 점에서 거부되는 용어임을 짚고 넘어간다), 원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서 ‘세뇌당한 컬트 추종자’보다 자신이 심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또한 (종교 집단이 정당하다고 인식되는 데에는 여전히 문화적 규범성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면서도) ‘컬트’라는 표현이 사회가 승인하지 않는 종교를 쓰레기 취급하는 데 자주 이용된다는 점을, ‘컬트’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으로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크로스핏을 비롯한 컬트 피트니스(5장) 이외에도, “우리 vs 저들 이분법, 로드된 언어, 사고 중단 클리셰 같은 기술들”로 인한 “컬트 폭력의 희생양”(2장), 사이언톨로지를 통해 본 컬트 언어의 힘(3장), 다단계 마케팅(4장), 인스타그램(6장)까지 오늘날의 다양한 컬티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이 전반적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들을 망라하고 있는 데다가(피트니스, 웰니스/뷰티 인플루언서, 인스타그램 등) 섬뜩한 이야기들(신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한 컬트 교주들이나,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컬트 집단들의 이야기 등)까지도 생생히 담고 있어, 술술 읽힌다. 내가 크로스핏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컬트 피트니스’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볼 기회를 얻은 것처럼, 독자가 자신의 삶으로 끌어와 생각해볼 점도 많다.
크로스핏을 컬트라 말한다고? 광신 집단이니 얼른 빠져나오라는 건가?
나처럼 ‘어그로가 끌려’ 책장을 넘기게 된 독자들도 있겠지만, 책을 조금만 읽어보면 저자가 그렇게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어딘가에 속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정의하며, 집단에 소속되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기반을 구성하고, 그 기반을 이루는 재료가 언어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는 “우리 모두가 뭔가를 믿는 일이나 어딘가에 참여하는 일을 거부한다고 세상이 나아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컬트에 당연히 악의적인 측면이 있다고 단정할 것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그는 “현대의 운동은 대부분 우리에게 무엇을 믿고, 어디에 속하고, 어떤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지 선택할 충분한 여지”를 주므로 (예컨대 신도들을 극단으로 몰고 간 컬트 교주의 사례와는 달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고) 다만 “이런 공동체들이 사용하는 수사법과 그 언어가 어떻게 좋거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에 주목하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더 명확한 눈으로 그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어느 한 컬트 집단의 편협한 이데올로기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받은 영향과 경험, 그리고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언어의 넓은 집합체에서 비롯한다는 ‘직감’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서 컬트 집단에 소속되는 것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심지어는 인생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기이하니까, 같은 것을 추구하는 타인 곁에서 뭔가를 믿고 느끼고자 하는 마음을 건강하게 발휘하는 방법으로서, 동시에 여러 ‘컬트’에 속하는 것도 방법이라고까지 말한다.
다시 내가 거침 없이 <컬티시>의 책장을 넘기도록 했던 크로스핏 이야기로 돌아가볼까. 한국의 크로스핏은 저자가 컬트적 요소로 지적한 면들 - “문제는 크로스핏에서 부상이 적절하게 근육 잡힌 몸을 얻기 위한 대가이자 명예의 징표로 여겨진다는 거다”라는 폭로, 크로스핏 창시자 그렉 글래스먼이 2020년 6월 Black Lives Matter 시위 당시 인종차별적 이메일과 트윗을 했으며 그 전에도 수년간 회사가 흑인 회원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의혹을 받아왔다는 사실, “히어로 와드를 통한 경찰 권력 미화” - 이 국경을 건너와 한 차례 씻겨져 나가서인지, 내가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다만, 국내에서도 크로스핏 정식지부가 본사에 1년간 수백만 원의 등록비를 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크로스핏 본사가 취하는 정책이나 포용성 등과 관련하여 보이는 태도는 한국 지부들에서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가 ‘컬트 피트니스 공동체에 들어갔다면, 곧장 자문해 볼 만한 질문들’로 꼽는 아래 내용들에 관해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이 집단이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환영하는가? 아니면 (심지어 수업 밖에서도) 모두와 똑같이 옷을 입고 똑같이 말하라는 과도한 압력을 느끼는가? 운동에 마음 편하게, 시험 삼아 참여하는 일이 허용되는가? 아니면 집단만을 위해 시간과 믿음을 전부 쏟아붓고, 집단의 결정을 바탕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는가? 당신의 몸이 필요로 할 때 강사가 쉬엄쉬엄 운동하라고, 혹은 아예 몇 주를 쉬거나 아예 다른 운동을 시도해 보자고 말하리라 믿는가? 아니면 그저 더 열심히, 더 빨리, 더 많이 운동하라고 말하겠는가? 수업을 빠지거나 그만둔다면, 그 비용은 얼마일까? 자존심? 돈? 관계? 당신의 세계 전체? 당신이 지급할 만한 비용인가?”
다만 박스가 “타인과의 연결과 실물 공동체를 찾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라거나 삶에서 유대감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의미를 찾는 장소로 작용하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이, 어떤 집단의 언어만이 나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내 자신은 보다 통시적이고 폭넓은 경험과 영향, 언어의 집합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직감을 잃지 않는다면, 설령 한국에서의 크로스핏이 컬트 피트니스적 요소를 갖는다고 해도 당장 달라질 점은 없지 않을까.
이미 작년 가을부터 운동 빈도와 강도에 대한 나의 강박을 객관화해서 살펴봤던 것, 작년 겨울 한 차례의 부상을 겪고 운동 강도에 대한 집착을 비로소 내려놓게 된 것만으로도 크로스핏을 내 삶에서 긍정적으로 잘 받아들여왔다고 생각한다. <컬티시>를 통해 사회언어학적 관점과 컬티시라는 오늘날의 현상적 맥락에서 내 개인적 경험에 대해 고찰해본 것도 물론 의미가 있었고 말이다.
저자 어맨다 몬텔은 기자, 작가, 언어학자라고 한다. 나는 그가 <컬티시>에서 <1> 자신의 학부 전공이자 관심 분야인 ‘사회언어학’의 관점에서, <2> 실제 컬트 집단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탈출한 아버지의 경험이라는 개인적 경험에 천착해, <3> 오늘날 우리 사회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4> 그 분석이 자칫 우를 범할 수 있는 부분까지 미리 고려해 논의의 전제로 깔아놓으면서 <5> 실생활과 유리되어 단순히 무용하게 머물지 않도록 독자들에게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자신의 관점을 나름대로 대담하게 제시하였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저작을 만나볼 수 있도록 애써주신 출판사 ‘아르테’와 번역가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작년에는 정말이지 쉬지 않고 운동을 이어갔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일주일에 대여섯 번씩 운동을 가고, 어떤 날은 하루에 수업을 두세 개씩 듣곤 했다. 운동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런 기분은 무엇인지. 그러다가 (작년 10월 러닝을 하다 발바닥 문제를 발견한 것에 이어) 작년 12월에는 크로스핏을 하다가 철봉에 손을 세게 부딪혀 오른쪽 손가락이 부러지고 말았다.
크로스핏을 쉬는 기간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안 해도 잘 살아지네. 그리고, 요즘은 요가와 필라테스 같은 다른 운동들을 경험해보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꼭 내 한계를 시험하듯 미친 듯이 몰아붙이지 않는 다른 여러 운동들도 있네. 운동을 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는데, 박스에서 와드를 하면서 나 자신을 무게로든 속도로든 몰아붙이지 않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는데.
그런데, 우연히 접하게 된 <컬티시>는 실제로 다름 아닌 ‘크로스핏’을 예시로 들어 내가 느낀 것들의 일부를 설명하고 있었다. <컬티시>의 서문은 바로 나를 사로잡았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대학 입학을 위해 오리건주에서 LA로 온 열여덟 살 얼리사 클라크는 새로운 운동 프로그램 덕에 살을 쫙 뺀 가족을 만나고는 “세상에, 나도 저걸 해 봐야겠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운동의 이름은 ‘크로스핏’이었고, 마침 얼리사의 기숙사 근처에도 체육관이 있었다. 방학이 끝나자마자 얼리사는 남자친구와 함께 초보자 워크숍에 등록했고, 땀범벅에 근육질인 강사들은 남성적인 열정을 발산하며 얼리사를 듣도 보도 못한 용어의 세계로 인도했다. 체육관은 체육관이 아니라 ‘박스’라고 불렸다. 강사는 선생님이나 트레이너가 아닌 ‘코치’였고, 운동 프로그램은 ‘기능적 움직임’으로 이루어졌다. 모두 각자의 WoD(와드, Workout of the Day), 즉 그날의 운동을 수행하는데, 스내치나 클린앤저크 등의 동작이 포함됐다. 각자의 BP(Bench Press), BS(Back Squat), C2B(Chest to Bar),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DOMS(지연성 근육통)도 있다. 누군들 눈에 쏙 들어오는 약어를 싫어하겠는가? 얼리사는 마치 문화를 공유하듯 끈끈한 크로스피터들의 유대에 매혹되었고, 그들의 은어를 낱낱이 익히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마침 크로스핏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다른 운동들을 접해보면서 크로스핏을 앞으로 계속 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살짝 하고 있던 차에 책의 앞부분을 읽고는 금세 책에 빠져들게 되었다.
1992년생의 젊은 저자 어맨다 몬텔은 3HO라는 요가조직과 크로스핏에 빠진 두 인물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 책 <컬티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컬트 언어’ - 곧 ‘컬티시Cultish’를 다루고 있다. 언어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고, 이는 컬트 집단 혹은 지도자에 의해 활용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어맨다 몬텔은 오늘날 컬트 집단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소속감과 해답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기성 종교로” 향하던 이전과 달리, 밀레니얼 세대는 여러 종류의 ‘컬트’에서 종교의 역할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종교의 역할은 의미, 목적, 소속감, 의례를 제공하는 것인데, 오늘날에는 세속적 ‘컬트’가 기성종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컬트 피트니스’는 자본주의 야망과 자기계발에 대한 숭배와 맞물려 헌신/복종/변화 등의 종교적 요소를 인내심이나 신체적 매력 같은 세속적 이상과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어맨다 몬텔은 컬티시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컬트’에는 공식적인 학문적 정의가 없다는 점 - 컬트는 본질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집단을 묘사하기 위한 경멸의 의미로 쓰이며(저자는 그와 마찬가지 맥락에서 ‘세뇌’(brainwash) 역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간과한다는 점과 검증할 수 없는 가설이면서도 그 사람이 ‘세뇌되었다’는 말 한 마디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탐구할 여지를 막아버린다는 점에서 거부되는 용어임을 짚고 넘어간다), 원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서 ‘세뇌당한 컬트 추종자’보다 자신이 심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또한 (종교 집단이 정당하다고 인식되는 데에는 여전히 문화적 규범성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면서도) ‘컬트’라는 표현이 사회가 승인하지 않는 종교를 쓰레기 취급하는 데 자주 이용된다는 점을, ‘컬트’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으로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크로스핏을 비롯한 컬트 피트니스(5장) 이외에도, “우리 vs 저들 이분법, 로드된 언어, 사고 중단 클리셰 같은 기술들”로 인한 “컬트 폭력의 희생양”(2장), 사이언톨로지를 통해 본 컬트 언어의 힘(3장), 다단계 마케팅(4장), 인스타그램(6장)까지 오늘날의 다양한 컬티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이 전반적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들을 망라하고 있는 데다가(피트니스, 웰니스/뷰티 인플루언서, 인스타그램 등) 섬뜩한 이야기들(신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한 컬트 교주들이나,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컬트 집단들의 이야기 등)까지도 생생히 담고 있어, 술술 읽힌다. 내가 크로스핏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컬트 피트니스’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볼 기회를 얻은 것처럼, 독자가 자신의 삶으로 끌어와 생각해볼 점도 많다.
크로스핏을 컬트라 말한다고? 광신 집단이니 얼른 빠져나오라는 건가?
나처럼 ‘어그로가 끌려’ 책장을 넘기게 된 독자들도 있겠지만, 책을 조금만 읽어보면 저자가 그렇게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어딘가에 속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정의하며, 집단에 소속되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기반을 구성하고, 그 기반을 이루는 재료가 언어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는 “우리 모두가 뭔가를 믿는 일이나 어딘가에 참여하는 일을 거부한다고 세상이 나아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컬트에 당연히 악의적인 측면이 있다고 단정할 것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그는 “현대의 운동은 대부분 우리에게 무엇을 믿고, 어디에 속하고, 어떤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지 선택할 충분한 여지”를 주므로 (예컨대 신도들을 극단으로 몰고 간 컬트 교주의 사례와는 달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고) 다만 “이런 공동체들이 사용하는 수사법과 그 언어가 어떻게 좋거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에 주목하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더 명확한 눈으로 그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어느 한 컬트 집단의 편협한 이데올로기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받은 영향과 경험, 그리고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언어의 넓은 집합체에서 비롯한다는 ‘직감’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서 컬트 집단에 소속되는 것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심지어는 인생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기이하니까, 같은 것을 추구하는 타인 곁에서 뭔가를 믿고 느끼고자 하는 마음을 건강하게 발휘하는 방법으로서, 동시에 여러 ‘컬트’에 속하는 것도 방법이라고까지 말한다.
다시 내가 거침 없이 <컬티시>의 책장을 넘기도록 했던 크로스핏 이야기로 돌아가볼까. 한국의 크로스핏은 저자가 컬트적 요소로 지적한 면들 - “문제는 크로스핏에서 부상이 적절하게 근육 잡힌 몸을 얻기 위한 대가이자 명예의 징표로 여겨진다는 거다”라는 폭로, 크로스핏 창시자 그렉 글래스먼이 2020년 6월 Black Lives Matter 시위 당시 인종차별적 이메일과 트윗을 했으며 그 전에도 수년간 회사가 흑인 회원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의혹을 받아왔다는 사실, “히어로 와드를 통한 경찰 권력 미화” - 이 국경을 건너와 한 차례 씻겨져 나가서인지, 내가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다만, 국내에서도 크로스핏 정식지부가 본사에 1년간 수백만 원의 등록비를 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크로스핏 본사가 취하는 정책이나 포용성 등과 관련하여 보이는 태도는 한국 지부들에서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가 ‘컬트 피트니스 공동체에 들어갔다면, 곧장 자문해 볼 만한 질문들’로 꼽는 아래 내용들에 관해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이 집단이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환영하는가? 아니면 (심지어 수업 밖에서도) 모두와 똑같이 옷을 입고 똑같이 말하라는 과도한 압력을 느끼는가? 운동에 마음 편하게, 시험 삼아 참여하는 일이 허용되는가? 아니면 집단만을 위해 시간과 믿음을 전부 쏟아붓고, 집단의 결정을 바탕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는가? 당신의 몸이 필요로 할 때 강사가 쉬엄쉬엄 운동하라고, 혹은 아예 몇 주를 쉬거나 아예 다른 운동을 시도해 보자고 말하리라 믿는가? 아니면 그저 더 열심히, 더 빨리, 더 많이 운동하라고 말하겠는가? 수업을 빠지거나 그만둔다면, 그 비용은 얼마일까? 자존심? 돈? 관계? 당신의 세계 전체? 당신이 지급할 만한 비용인가?”
다만 박스가 “타인과의 연결과 실물 공동체를 찾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라거나 삶에서 유대감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의미를 찾는 장소로 작용하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이, 어떤 집단의 언어만이 나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내 자신은 보다 통시적이고 폭넓은 경험과 영향, 언어의 집합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직감을 잃지 않는다면, 설령 한국에서의 크로스핏이 컬트 피트니스적 요소를 갖는다고 해도 당장 달라질 점은 없지 않을까.
이미 작년 가을부터 운동 빈도와 강도에 대한 나의 강박을 객관화해서 살펴봤던 것, 작년 겨울 한 차례의 부상을 겪고 운동 강도에 대한 집착을 비로소 내려놓게 된 것만으로도 크로스핏을 내 삶에서 긍정적으로 잘 받아들여왔다고 생각한다. <컬티시>를 통해 사회언어학적 관점과 컬티시라는 오늘날의 현상적 맥락에서 내 개인적 경험에 대해 고찰해본 것도 물론 의미가 있었고 말이다.
저자 어맨다 몬텔은 기자, 작가, 언어학자라고 한다. 나는 그가 <컬티시>에서 <1> 자신의 학부 전공이자 관심 분야인 ‘사회언어학’의 관점에서, <2> 실제 컬트 집단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탈출한 아버지의 경험이라는 개인적 경험에 천착해, <3> 오늘날 우리 사회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4> 그 분석이 자칫 우를 범할 수 있는 부분까지 미리 고려해 논의의 전제로 깔아놓으면서 <5> 실생활과 유리되어 단순히 무용하게 머물지 않도록 독자들에게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자신의 관점을 나름대로 대담하게 제시하였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저작을 만나볼 수 있도록 애써주신 출판사 ‘아르테’와 번역가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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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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