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에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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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2-1669, 유화, 262*206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69)





네덜란드화가· 판화가. 레이덴 태생. 1624년 레이덴에 공방(工房)을 열고 재능을 인정받아, 32년 암스테르담에 진출, 명성을 얻었고, 34년 결혼하였다. 42년 아내의 죽음과 함께 회화의 경지는 깊어졌으나, 세상의 평가는 점차 떨어져갔으며, 56년 파산하고 빈곤 속에 암스테르담에서 죽었다. 초기에는 스승 라스트만의 영향이 강하였으나, 점차 절묘한 명암 표현, 인물의 심리묘사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42년의 집단 초상화 〈야경(夜警)〉은 작풍의 깊은 내면적 전환을 보여주었으나 혹평을 받았으며, 역경이 심화됨에 따라 더욱 신비적· 내적인 작풍으로 바뀌었다. 50년대 중반부터는 종교화· 자화상프로테스탄트적 내성(內省)이 뒷받침된 종교적 깊이를 보였다. 그 밖의 작품에 〈3개의 십자가〉 〈돌아온 탕자〉 등이 있다.



[대표작품]





천사 앞에서 뒷걸음질치는 당나귀 라이덴 시대의 렘브란트의 가장 초기에 속하는 작품의 하나이다. 1624년,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고전주의적 역사화가(歷史畵家) 라스트만에게 6개월 동안 사사 (師事)했으며 그곳에서의 수업에서 기초적인 회화기법, 즉 정통적인 화면 구성, 입체적 인체 표현, 정밀한 세부묘사, 무리없는 채색법(彩色法) 등을 익혔다. 이 작품에서는 그와 같은 영향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나, 이미 수업기(修業期)를 지난 렘브란트의 독특한 면모가 약동하고 있다. 즉, 그는 주어진 주제를 하나의 회화작품(繪畵作品)으로 구성할 때, 이야기의 설화적(說話的)인 도식(圖式)을 피하고, 화가 자신이 그 장면의 목격자인 것처럼 리얼하고 직접적인 표현 방법을 추구한 것이다. 천사에게 길을 가로 막혀 주저앉은 당나귀를 채찍질하는 발람에게서 어쩌면 화가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자화상 렘브란트는 63년이라는 길지도 않은 생애에 약 60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겨 놓고 있다. 이 방대한 자화상을 그린 화가는 서양 회화 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으며, 굳이 비길 만한 예를 찾자면, 짧고도 비극적인 생애를 산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반 고호이다. 일반적으로 이처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들은 자기 응시의 화가,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파헤치는, 내향적이자 인간의 정신적 갈등에 남달리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화가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렘브란트에게 있어 자화상은, 렘브란트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와 예술적 편력(遍歷)을 더듬는 이정표(里程標)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연대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나, 다른 자화상과 비교하여 1628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렘브란트의 가장 젊은 날의 초상화이다.





토론하는 두 철학자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 전문가들 사이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그 주제가 어떠한 것이었든, 이 그림은 라이덴 시대에 있어서의 명암의 대비가 강조된 카라바지오풍(風)이 농후한 작품의 하나이다. 네덜란드에 있어서의 카라바지오의 영향은 매우 강력한 것이 었으며, 그것이 렘브란트의 이 작품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은 대조적인 두 인물을 매우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으로 그린다는 모티브, 두 번째로는 인물의 표현이 규범적인 미(美)의 표현이라는 고전주의적 전통에서 완전히 이탈되어 여기에서의 노후의 모습 그 자체가 강조되어 있다는 것, 세 번째로는 명암의 대비로서 대립되는 화면의 인물과 기타의 사물들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렘브란트는 주제의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다가선다.





예루살렘의 파괴를 한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 THE PROPHET JEREMIAH LAMENTING THE DESTRUTION OF JERUSAEM 1630년 板 油彩 58×46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는 1630년을 전후해서 노인의 단독상(單獨尙)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며, 모델은 그의 부친으로 생각되고 있다. 렘브란트의 라이덴 시대는 유채 기술의 훈련기이며, 앞의 작품과 함께 이 작품 또한 그 완성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두운 암굴에서 부각되는 인물, 금속 용기의 반짝임, 묵직한 포목(布木)의 질감(質感)등, 이 모두가 20년대의 생경(生硬)한 광택 (光澤)과는 달리, 은근히 가라앉은 색채 속에 오히려 광채를 빛내고 있다. 작품의 주제는 물론 성서에서 취한 것이나 이 그림과 일치되는 기술(記述)은 없다. 렘브란트가 그 주제를 자유롭게 해석한 것으로 보이며 예언자로서 예루살렘의 불운(不運)을 알고 있던 예레미야는 아직도 예루살렘 사람들의 불행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





여자 예언자 한나(렘브란트의 모친) THE PROPHETESS HANNAH(REMBRANDT'S MOTHER) 1631년 板 油彩 60×48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의 모친은 라이덴의 빵 제조업자의 딸로서, 1589년에 같은 시(市)의 밀가루업자 하르멘, 즉 렘브란트의 부친과 결혼했다. 그녀의 집안은 라이덴에서도 이름난 가톨릭 신자 가족이었으며, 렘브란트도 모친을 통해 종교적 관심을 깊이 했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또 이 작품에 그려진 여인이 모친이라는 데에는 이론(異論)이 없으나, 그것이 여자 예언자 한나 인가에 대해서는 확증이 없다. 어쨌든 이 작품은 라이덴 시대에 렘브란트가 도달한 고도의 유채(油菜) 기술의 숙달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골똘히 책을 읽고 있는 노부(老婦)의 얼굴이며, 책장을 누르고 있는 주름살진 손등의 가식(假飾)없는 사실적 묘사를 통해 노모의 진정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책장에 비쳐진 광선(光線)효과는 아직도 카라바지오풍의 것이다.





사스키아 SASKIA 1633-4년경 板 油彩 99.5×78.8Cm 카셀 국립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이 그려질 무렵,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따라서 주문도 쇄도하고 있었다. 그러한 주문 초상화 제작 틈틈이 그는 아내 사스키아의 초상화를 적어도 10 여점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초상화 모두가 화사한 의상과 모자,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초상화에서 렘브란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창출한 가장 이상적인 여자의 프로필상(像)인 폴라이우올로의 <婦人像>에 필적할 만한 아름다운 여성상을 그려내고 있다. 어두운 바탕 위에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옆얼굴, 정교한 착색(着色)에 의한 의상과 장신구의 리얼한 질감(質感)의 표현 등, 여기에서는 렘브란트가 이제까지 습득한 기법적인 완숙함이 구사되고 있으며, 동시에 사스키아를 통해 이상적인 여성상을 구현시키려고한 것이다.





베일을 걸친 사스키아 SASKIWITH A VEIL 1633년 板 油彩 66.5×49.7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라이덴에서 다시 암스테르담에 나타난 렘브란트는 그 곳 명문의 딸 사스키아와 1633년에 약혼, 이듬해 결혼한다. 이 사스키아상(像)은 약혼 시절의 작품이다. 양가집의 딸 답게 사스키아는 머리로부터 어깨까지 베일을 걸치고 있고, 또 머리, 귀, 목에는 진주가 걸려 있다. 그 밖에도 금빛 레이스가 달린 화사한 의상과 호화로운 장신구,그러나 이와 같은 치장은 오히려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사스키아의 대담한 눈매와 믿음에 찬 표정이 오히려 이 모든 장신구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바야흐로 화가로서의 명성을 떨쳐 가는 렘브란트가 다시 뜻하지 않게 명문과 미를 겸비한 여성을 얻게 된 기쁨이, 사스키아의 모습을 통해 넘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로부터의 降下 THE DESCENT FROM THE CROSS 1633년경 板 89.4×65.2Cm 뭔헨 알테 피나코텍 소장 이 작품은 그리스도 수난전(受難傳) 연작 다섯 작품 중의 두 번째의 것이다. 이 연작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에서 시작하여 <降下>, <승천>, <매장>, <부활>의 5부작으로 되어 있으며, 이 연작의 완성에 7년이 필요했다. 이 7년에 걸친 그리스도 수난(受難) 연작을 통해서 렘브란트가 추구한 것, 그것은 바로 생동하는 인간의 내면적 감동의 표현이었다. 그러한 감동의 표현을 그는 일단은 극적인 명암의 대비로 포착했고, 인물의 자태와 배치에 있어서의 동세(動勢), 그리고 테마 자체가 지니는 비극성을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단출한 화면 구도 속에 압축시키고 있다. 이그림은 아마도 동시대의 바로크 회화(繪畵)의 거장 루벤스의 작품을 의식해서 그려진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리스도의 승천 THE ASCENSION OF CHRIST 1636년 캔버스 油彩 92.7×68.3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소장 이른바 <昇天圖>는 <성모 승천>이 관례적인 것이다. 렘브란트는 이 <승천도>도 그발상(發想)의 원천은 멀리는 티지아노의 <성모 승천>, 가깝게는 루벤스의 같은 주제의 작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이들 그림에서의 성모 마리아를 그리스도로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모 승천>이라는 테마는 바로크 화가들이 즐겨 다루어 온 테마이다. 구름을 끼고 신비로운 햇살이 번지는 하늘, 그것을 떠받치는 천사들, 그것들에 휩싸여 찬란한 빛에 싸여 승천하는 마리아, 이는 장려함과 사실적인 면에서도 유동성을 잃지 않는 바로크 회화의 안성 마춤인 화제(畵題)인 것이다. 1630년대의 렘브란트는 그의 화력(畵歷)에 있어서도 가장 바로크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때이며 그 바로크적 경향이 성모 승천을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이끌어 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CHRIST 1639년경 布 板 油彩 91.9×67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소장 이 작품에 대해서 렘브란트 자신이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고심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는 표현에 대한 해석이 또한 엇갈린다. 즉, 문자 그대로의 화면에서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뜻한다는 해석과, 반대로 물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내면적인 감정의 움직임이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어쨌든 이 그림의 장면은 떠들썩한 혼란의 상태로 그려져 있다. 무장한 경비인 들은 놀란 나머지 갈피를 잃고 있고, 반면에 부활하는 그리스도는 화면 한 모퉁이에서 서서히 신성한 빛을 발하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화면 중앙 전체를 밝히는 천사의 부름에 오히려 슬픔에 잠긴 듯한 그리스도와 부활에 놀라 허둥지둥 하는, 이 고요와 떠들썩함의 대비, 이 드라마는 바로 화가 자신의 종교적 심성(心性)의 표현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가니메데스(미소년)의 납치 THE ABDUCTION OF GANYMEDE 1635년 캔버스 油彩 171×130Cm 드레스덴 국립 회화관 소장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가니메데스는 미소년(美少年) 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 제우스는 그를 독수리를 시켜 납치케 하여 올림퍼스 산에 데려오게 한다. 그렇다면 전통적으로 미소년으로 그려져 온 가니메데스를 렘브란트는 왜 그처럼 공포에 떠는 어린애의 모습으로 그려냈을까? 이작품에서 렘브란트는 신화(神 話)에서 테마를 취하면서도 그것을 한낱 신화적인 세계의 것으로 다루지 않고, 그것을 현실의 한장면으로 묘사하려고 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작품을 위해, 독수리에 채여 공포에 울부짖는 어린애의 스케치를 남겨놓고 있으며, 그것을 그대로 이 그림에 살리고 있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신화의 단순한 서술적인 묘사보다는 인간의 공포감을 보다 리얼하게 표현하려고 했으며, 그것이 특히 1630년대 중반기에 나타나는 그의 특징이기도 하다.





폭풍을 머금은 풍경 STORMY LANDSCAPE 1638년경 板 油彩 52×72Cm 브리운쉬바이크 안톤 울리히侯(후)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의 풍경화는 1630년대 후반에서부터 50년대 전반에 걸친 약 20년 사이에 그려지고 있다. 소묘가 약 250점, 에칭 24점 그리고 유화 17점에 달하는 풍경화는 그다지 많은 작품 수는 아니나 렘브란트의 예술적 전개 과정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분야였다. 그 이유는 자연의 묘사가 그로 하여금 회화 표현상 및 심리 표현상에 있어 새로운 경험을 얻게 하고, 또한 넓이 있는 공간과 아울러 외광의 문제에까지도 눈뜨게 했기 때문이다. 이 <폭풍을 머금은 광경>은 일종의 상상풍경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한 순간의 반짝이는 양광(陽光)으로 언덕 위의 마을이 환하게 물들여져 있다. 그러나 그 양광은 명멸하며 먹구름과 양광 하늘과 대지의 화면에 넘치는 극적인 명암의 대비는 이 그림에 신비감마저 부여하고 있다.





선술집의 방탕아 THE PRODIGAL SON IN THE TAVERN 1636년경 캔버스 油彩 161×131Cm 드레스덴 국립 회화관 소장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가지 해석이 내려지고 있다. 그 해석을 대별하면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 렘브란트의 신혼 생활의 행복한 모습을 그린 것. 둘째, 성서(聖書)에 나오는 방탕아의 역할을 스스로 연기하고 있는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부부. 셋째, 자만심에 대한 경종의 우의(愚意)가 담긴 것. 그러나 그와 같은 해석은 어찌 됐든 이 작품은 렘브란트 자신과 사스키아를 모델로 한 다분히 우의적인 2인 초상화임에는 틀림없다. 이 그림에서는 의기 양양한 렘브란트가 사스키아를 무릎 위에 앉히고 이쪽을 향해 술잔을 높이 들고 있다. 그리고 왼쪽 탁자 위에는 공작이 놓여 있다. 네덜란드의 도덕적 우의(寓意)에 의하면 술잔은 호의호식을, 공작은 오만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렘브란트가 차고 있는 칼도 그 때의 신분으로서는 허용되지 않은 것이었다.





삼손의 혼례식 SAMSON POSING THE RIDDLE TO THE WEDDING GUESTS 1638년 캔버스 油彩 126×175Cm 드레스덴 국립 회화관 소장 혼례식 축하연에 초대된 신부 데릴라의 친지들에게 삼손이 수수께끼를 묻고 있는 장면이다. 이 작품에 대해 당대의 한 문필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주제에 담겨진 이야기를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고대인들은 지금의 우리들처럼 의자에 앉지 않고 대신 자그마한 침대를 사용했다. 한번도 깎아 본 적이 없는 장발의 삼손은 그 손짓 등으로 미루어 열심히 수수께끼를 묻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 그림이 삼손의 혼례식 축하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삼손이 아니라 신부이다. 그림의 거의 중심부에 위치한 신부는 강한 광선을 온 몸에 받으며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정면을 향해 앉아 있다. 그녀는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전체 화면에서 고립되어 있는 듯하며 동시에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王의 편지를 든 밧세바 BATHSHEBA WITH KING DAVIDS LETTER 1654년경 캔버스 油彩 142×142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구약성서에서 주제를 따온 작품으로서 다윗의 아내가 되라는 사자의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모습은 풍만한 여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으나, 동시에 다가올 비극적인 운명을 두려워하는 우수가 깃들어 있다. 그녀는 종단에는 다윗을 배반해야 하는 운명에 있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은 헨드리키에를 모델로 한 누드화이기는 하나 렘브란트의 주요 관심사는 바로 밧세 바의 마음의 갈등을 그려내는데 있었다. 작품의 구도 자체는 고대의 부조(浮彫) 작품을 묘사한 동 판화에서 빌어 온 것이기는 하나 그 구도 이상으로 렘브란트에게 중요한 것이 밧세바의 얼굴 표정이었다. 요컨대 렘브란트는 고대의 구도 원리에 따르면서 그것을 그의 고유한 비극적 드라마로 묘출(描出)한 것이다.





목욕하는 수잔나 SUSANNA SURPPISED BY THE ELDERS 1637년경 板 油彩 47.5×39Cm 덴 하그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소장 <목욕하는 수잔나>라는 주제는 르네상스 이래 즐겨 다루어진 테마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거기에는 나체의 수잔나와 그것을 숨어서 바라보는 두 장로가 등장한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이 작품에서는 두 장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두운 숲 그늘 속에 희미하게 한 장로의 얼굴이 보일뿐이다. 정원에서 막 목욕하려는 수잔나는 인기척에 놀라, 놀라움과 수치심으로 몸을 움츠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풍만하고 싱싱한 육체가 햇볕을 온 몸에 받고 하나의 광선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이작품이 그려지기 일년 전 렘브란트는 역시 여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제작한 '다나메'를 그리기도 했거니와, 이 작품 역시 나부(裸婦)에 대한 관심에서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성가족(聖家族) THE HOLY FAMILY(WITH ANGELS) 1645년 캔버스 油彩 117×91Cm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쥬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는 <聖家族>의 주제를 소묘, 에칭, 유화에서 줄곧 되풀이해 그렸다. 1630년 초기에는 다분히 루벤스풍의 성화(聖畵)를 연상시키는 것이었으나, 40년대 후반기의 이 작품은 종교화라기 보다는 오히려 내밀한 일상적 가족의 정경을 그린 것처럼 느끼게 한다. 1642 년, 사스키아의 사후(死後) 헨드리키에가 렘브란트가(家)에 들어와 자리잡는 40년대 말까지, 렘브란트는 가정적으로 매우 불우했다. 그 까닭에 그는 한층 더 가정적인 행복이라는 테마에 이끌렸던 것이다. 책을 읽다 말고 잠시 모친은 자애로운 눈길을 갓난아기에게 돌리고, 뒤켠에서는 요셉이 목수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왼쪽 위로부터 천사가 날아 내려오고 있음으로 해서 이 일가가 성가족(聖家 族)임을 나타내고 있다. 어린 그리스도의 오른팔, 성모의 책과 얼굴, 내려오는 천사들에게 비쳐진 광선 효과의 연결은 괄목할 만하다.





창가에 앉은 소녀 YOUNG GIRL LEANING ON A WINDOWSILL 1645년 캔버스 油彩 77.5×62.5Cm 런던 덜리치 대학 미술관 소장 한 마디로 렘브란트의 작품치고는 예외적으로 청순 담백한 그림이다. 두 팔 굽을 창가에 기댄 채 약간 경계하는 듯 수줍어하는 눈매로 이쪽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 이 그림의 테마로 보아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비상하게 성행한 풍속화(風俗畵), 즉 일상적인 생활 정경을 화폭 속에 담는 풍속화의 카테고리에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정경 설정의 일상성보다는 모델(모델을 헨드리키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성립되지 않는다)을 바라보는 화가의 날카롭고도 정감어린 눈이며,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하나의 초상화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그림은 기묘하게도 18세기의 화사한 로코코풍의 화가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었으며, 이 또한 렘브란트의 작품 가운데서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에마오의 그리스도 THE RISEN CHRIST AT EMMAUS 1648년 판(板) 유채(油彩) 68×65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같은 주제의 작품으로서, 1630년경의 라이덴 시대의 작품과 이 작품 2점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의 차이가 바로 그간의 렘브란트 예술의 변화를 일목 요연하게 보여준다. 라이덴 시대의 극적인 구도(構圖)와 자세 및 명암법은 사라지고 차분히 가라 앉은 색채와 안정된 구도로 변했는데, 은밀하면서도 위엄에 찬 이 작품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는 화면 약간 왼쪽에 정면으로 앉아 바야흐로 빵을 쪼개려 하고 있다. 그 그리스도의 모습은 탁자 위의 흰 식탁보, 자신의 후광(後光), 그리고 뒤의 벽면의 어두움으로 한층 부각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보여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라이덴 시대의 작품에서와는 달리 숭고하고 자애에 찬 그리스도이다. 렘브란트의 종교화(宗敎畵)의 일대 전환을 가져온 한 작품이 아닐는지...





폐허가 있는 강 풍경 RIVER LANDSCAPE WITH RUINS 1650년경 판(板) 유채(油彩) 67×87.5Cm 카셀 국립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풍경화 중에서도 후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의 풍경화가 상상적 풍경화이자 바로크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면 보다 실경(實景)에 접한 보다 현실감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이 후기의 풍경화이다. 렘브란트는 40년대 초기부터 소묘, 에칭을 통해 자연 실사(實寫)를 매우 활발하게 시도하였다. 따라서 후기의 유채 풍경화는 그와 같은 실경사생(實景寫生)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에서도 아직까지 상상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고는 하나, 풍경 구석구석에서 자연에 밀착(密着)된 보다 높은 현실감이 감지된다. 이 그림은 초기의 극적이고 바로크적인 풍경화에서 차츰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조(觀照)하고, 나아가서 인간 생활을 포함한 보다 보편적인 자연 표현의 전환을 보여주는 풍경화이다.





헨드리키에 스토펠스 HENDRICKJE STOFFELS 1654년경 캔버스 油彩 72×60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는 아들 티투스를 낳은 후 1642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그 후 두 여성이 티투스의 보모이자 가정부로 렘브란트의 생활에 등장하며 헨드리키에는 그 두 번째의 여성이다. 그녀가 언제부터 렘브란트 가정에 들어섰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1654년 그녀는 렘브란트와의 사이에 생긴 딸 코르넬리아를 낳는다. 그 후 그녀는 티투스를 키우고 경제적인 곤경에 빠진 렘브란트를 도우며 때로는 모델이 되기도 하면서 50년대 이후의 렘브란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여성이 되었다. 헨드리키에의 초상화로 확인된 작품은 한 점도 없으나 50년대의 작품 중 적어도 10여 점이 헨드리키에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초상화는 사스키아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 THE ANATOMY LESSON OF DOCTOR JOAN DEYMAN 1656년 캔버스 油彩 100×134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의 출세작이랄 수도 있는 <툴프박사의 해부학 강의> 이후 거의 25년만에 그는 다시 같은 주제의 작품을 다루고 있다. 25년이라면 4반세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아마도 그 동안의 렘브란트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안성 마춤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작품 역시 원화의 3분의 1 밖에 남아 있지 않은 화를 입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위한 여러 가지 소묘로 미루어 보건대,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좌우대칭 구도이고 또, 특히 해부되는 시체의 대담한 단축법(短縮法) 처리이다. <툴프 박사> 의 경우, 시체는 대각선으로 다시 말해서 모로 누워 있는데 반해 이 그림에서는 시체의 머리와 발이 한 시각(視覺) 속에 단축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투시법 기법의 의식적 도입이라고 할까.





도살된 소 THE SLAUGHTERED OX 1655년 板 油彩 94×67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가 이 그림을 통해서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든 이 작품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아름다운 그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들라크로아가 이 그림을 모사(模寫)했고, 도미에는 이에 자극받아 <푸줏간> 연작을 제작했다. 그들은 이 작품을 낭만주의적 사실주의의 핵(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 수틴도 이 작례(作例)에 자극받아 <도살 된 소>의 연작을 제작했으며, 그에게 있어 그것은 표현주의적 작품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이 작품은 그 추한 테마에도 불구하고 그 힘찬 필촉에 의한 색채와 리얼한 표현이 후대의 몇몇 화가를 사로잡은 것이다. 한 마디로 이그림은 렘브란트의 리얼리티의 탐구와 회화적 및 색채적 표현에 있어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화상 SELF PORTRAIT 1640년 캔버스 油彩 102×80Cm 런던 국립 갤러리 소장 렘브란트 34세 때의 초상화이다. 이탈리아 풍의 호화로운 옷을 걸치고 베레모를 쓰고 의연히 앉아 있는 모습은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 화가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화풍으로 보아 이 작품의 중요성은 그것이 렘브란트의 이탈리아 회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있다. 렘브란트는 평생 동안 이탈리아 땅을 밟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에서도 이탈리아 회화에 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리고 이 자화상이 바로 네덜란드에서 본 이탈리아의 두 거장, 라파엘로와 티지아노의 작품에서 촉발되어 그려진 작품이다. 사실 렘브란트는 40년대에 들어서면서 바로크에서 탈피하여 고전적 세계의 전환의 징후를 보이며 그 경향이 이작품에서도 눈에 뜨인다. 그러나 그는 고전을 본뜨면서도 자기 자신의 표현에 귀착하고 있다.





안슬로 부처(夫妻) THE MENNONITE MINISTER CORNELIS CLAESZ ANSLO IN CONVERSATION WITH HIS WIFE 1641년 캔버스 油彩 176×210Cm 西베를린 국립 미술관 회화관 소장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그 후 연이어 수많은 초상화의 주문이 뒤따른다. 그 주문자 중에는 학자, 성직자, 의사, 거상(巨商) 등이 끼어 있었다. 성직자 안슬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도 비록 집단(集團)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부부를 같이 다룬 2 인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 2인상은 이미 <토론하는 두 철학자>, <철학자와 그의 아내>(1633) 등에 서도 다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화풍과 양식(樣式)에 있어서의 커다란 차이가 보여진다. 여기에서는 극적인 제스처는 자취를 감추고 있으며 당당한 품격의 안슬로와 고즈넉한 아내의 자태는 오히려 렘브란트의 시대, 즉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성하고 아늑한 부르조아적 실내화(室內畵)를 연상케 한다.





유태인의 신부 THE JEWISH BRIDE 1655년경 캔버스 油彩 121.5×166.5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 중에서도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그림의 제목이 <유태인의 신부>였느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이 일반화된 제목의 유래는 '유태인의 신부이다. 그녀의 부친이 딸에게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다.' 라는 해석에 의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 성서(聖書)의 이야기가 깔려 있을 수는 있으나, 언제나 처럼 그 이야기가 서술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는 않다. 여러모로 보아 이작품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야 어떻든 화면 전체에 풍기는 엄숙함, 즉 인간 본연의 사랑의 엄숙함이 배어 있으며, 이를테면 성서 속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실제의 인물과의 통합이라는 문제를 이 작품은 어떻게 생각하면 종교적인 차원에서 해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가족 A FAMILY GROUP 1688-9년경 캔버스 油彩 126×167Cm 브라운 쉬바이크 안톤 울리히侯 미술관 소장 여기에 그려진 가족이 어느 가족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렘브란트의 최만년 (最晩年)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면모에도 해석이 구구할 수밖에 없다. 굳이 인물을 식별하자면 오른쪽의 모친은 티투스의 미망인과 그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 왼쪽의 꽃바구니를 든 어린 소녀는 코르넬리아, 기타 인물들은 렘브란트 일가(一 家)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그 테마보다도 여기에서 돋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색채가로서의 렘브란트의 진면목(眞面目)이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다. 큼직한 터치로 겹쳐지는 색조의 층은 그 층을 겹할수록 광휘를 발하며 그것이 엮어내는 미묘한 음영의 대비는 렘브란트가 명암의 대비에서, 그것이 주는 정신적 또는 회화적 드라마를 거쳐 이제 색채의 조화라는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호메로스 HOMER DICTATING TO A SCORIBE 1663년 캔버스 油彩 108×82.4Cm 덴 하그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는 1650년대와 60년대 초에 걸쳐 고대의 인물을 다룬 3점의 작품을 그리고 있다. 호메로스, 알렉산더 대왕,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인물을 다룬 것이다. 그 중의하나인 이 작품은 원래 <두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호메로스>를 테마로 한 것이나 화재로 인한 작품의 파손으로 나머지 부분이 잘라져 나가 오늘의 단 신상(單身像)으로 남았다. 여기에 그려진 호메로스는 장님의 호메로스이다. 렘브란트는 이 장님의 테마를 즐겨 다룬 화가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은 외적 세계보다도 내면적 세계의 광휘를 바라보는, 보다 깊이 있는 정신세계의 눈뜸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볼 때 이 호메로스는 바로 렘브란트 자신의, 모습을 바꾼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화상 SELF PORTRAIT 1657년경 板 油彩 49.2×41Cm 비인 미술사 발물관 소장 작품에는 제작 연도가 적혀 있지 않으나, 1657년 작 이라는 연대 추정이 확실하다면 이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나이 51세의 것이다. 이미 여기에서는 젊은 날의 패기는 없으나 대신 당당한 원숙기의 한 화가의 모습이 유감없이 묘출(描出)되고 있다. 얼굴이며 어깨 부분이며 다같이 불굴의 의지에 넘쳐 있고 인간적인 시련을 겪은 한 인간의 의지가 넘치는 작품이다. 사실 1656년은 렘브란트가 파산 선고를 받은 해이다. 그러한 경제적인 역경과 이에 따르는 갖가지 어려움을 렘브란트는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이 초상화는 극복의 의지가 정력적으로 보이는 마지막 초상화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후의 초상화에서는 노경(老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어느 전문가에 의하면 이 초상화가 그려진 이후의 렘브란트는 급속하게 늙어갔다.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키에 HENDRICKJE AS FLORA 1656-7년경 캔버스 油彩 104×96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는 사스키아를 모델로 한 플로라상(像)을 3점 남기고 있다. 헨드리키에를 모델로 한 플로라상은 이들 전작(前作)과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비교가 되며 때로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대조는 한 마디로 <사스키아像>은 화려하게 치장된 이상화된 아내의 모습이요, 오히려 화려해야 할 이 그림의 플로라상은 검소하다는 데 있다. 이 대조는 비단 이 두 여성의 개성과 취향의 차이에서 왔다기보다는 그 동안에 보다 심화된 렘브란트 자신의 여성에 대한 비전의 변화에서 결과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양식적인 면에 있어서도 어두운 바탕에서 선명하게 부각되는 정밀 묘사의 효과 대신 여기에서는 인물의 그늘이 배경에 희미하게 투영(投影) 되고, 또 의상의 처리 역시 덤덤한 터치로 다루어지고 있다.





책상에 앉은 티투스 TITUS AT HIS DESK 1655년 캔버스 油彩 77×63Cm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뷰닝겐 미술관 소장 14세 때의 티투스의 모습. 사스키아와의 사이에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먼저의 세 자녀는 모두 어려서 사망), 그 역시 렘브란트가 죽기 바로 1년 전인 1668 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이 작품은 아들 티투스의 첫 초상화이다. 큼직한 검은 눈의 이 소년의 모습은 자주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이 그림에서 어린 티투스는 책상 위에 종이를 펴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펜을 든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볼에 짚고 무엇을 그려야 할까 하고 궁리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티투스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공부를 해 왔다. 그림 공부에 한창인 아들의 모습을 렘브란트는 애정어린 눈으로 포착한 것이리라. 어린 소년의 생생한 표정의 묘출(描出)과 함께 대담한 구도와 역시 덤덤한 터치에 의한 정확한 질감(質 感) 처리는 유니크하다.





환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CHRIST WITH THE SICK AROUND HIM 1642-5년 에칭 드라이포인트 뷰랑 27.8×38.9Cm 런던 대영 박물관 소장 렘브란트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소묘와 동판화이다. 소묘는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의 초벌 그림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렘브란트의 그것도 그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못 되었으나 그 독특한 필치는 일단 인정하더라도 그의 동판화는 고금을 통해서 알브렉트 뒤러, 고야와 함께 동판화의 3대 거장의 한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동판화가 필요로 하는 정교한 기법적 훈련이 렘브란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특히 그 흑백의 대비의 미묘한 효과는 렘브란트의 독특한 명암법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동판화 기법을 단순한 복사(複寫)의 방법으로서 만이 아니라 그것을 독자적인 한 예술 형태로 정립시킨 판화영역에 있어서의 한 혁신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두 흑인 TWO NEGROES 1661년 캔버스 油彩 77.8×64.4Cm 덴 하그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소장 흑인이 렘브란트의 회화 속에 독립된 테마로서 다루어 졌다는 사실은 일단 기이하게 보이기도 하겠으나 흑인, 특히 북아프리카의 무어 족(族)의 모습은 이미 르네상스 회화에도 등장하고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해외 무역의 중심지였고 보니 그 중심지인 암스테르 담은 가히 인종의 견본시장(見本市場) 같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렘브란트가 이에 무관심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흑인을 단순한 호기심의 눈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려내고 있으며 이들 인종 특유의 의지적인 용모와 눈동자를 똑같은 인간이라는 공감에서 포착하고 있다. 또 그 때문에 이 작품은 인간 관찰자로서의 초상화가 렘브란트를 과시해주는 작품이거니와 또 한편으로는 차분히 가라앉은 그러면서도 정묘한 색조 변화에 의한 화면 통일은 렘브란트의 회화적 표현의 원숙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로 분장한 렘브란트(자화상) SELF PORTRAIT AS THE APOSTLE PAUL 1661년 캔버스 油彩 91×77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이 자화상이 그려진 1661년은 노년에 들어선 렘브란트 로서는 매우 풍성한 다작의 해이다. 이 해에 그는 다시 성서 시리즈를 그렸으며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작품의 제목은 제쳐 놓고 이 그림의 주인공이 렘브란트 자신임은 틀림이 없다. 그는 한손에는 책을 들고 있고, 망토 깃 밑으로 단검의 손잡이가 비쳐지고 있다. 그는 무엇인가를 묻는 듯 또는 물으면서도 그 대답을 넘겨짚은 듯한 눈초리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눈초리는 노경에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고 있으며 '아직도 나에게 예언하는 힘이 있고 산을 움직일 수 있는 신앙심이 있더라도,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있은 것만 못하다.' 라고한 성 베드로의 말씀을 스스로 터득한 것인지... 그가 남긴 마지막 자화상은 그의 죽음의 해인 1669년의 것이다.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의 레이덴에서 하르멘 헤리트스존 반 레인과 코르넬리아 빌렘
스도히테르 반 소이트브루크의 아들 렘브란트 반 레인이 태어났다. 이 사실은 1641년에 간
행된, 레이덴의 풍물을 소개하는 한 책자에 요하네스 오를러스가 기록한 것으로 렘브란트의
출생을 말해 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렘브란트의 명성과 영광에 이르는 삶을 이야기할 때 우
리는 여러 가지 요소가 불확실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제1장 도제기와 야망

하르멘 헤리츠존(짧게 헤리츠라고 불렀다.)반 레인은 1589년 10월 8일에 코르넬리아 빌렘
스도히테르 반 소이트브루크와 결혼했다. 그녀의 애칭 넬트예 혹은 넬트옌은 그녀가 제분업
자의 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르멘 헤리츠도 제분업자였다. 그의 풍차방앗간은 마을 북쪽의 '구라인강'이라는 뜻의 강
'아우데 레인'의 베데스테그 제방 길에 위치해 있었고, '반 레인'이라는 이름은 그런 그의 풍
차방앗간에서 따 온 것이다.
마을의 상류에는 라인강의 다른 줄기인 '신라인강'이라는 뜻의 '니베 레인'이 갈라져 나와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두 강 사이에는 수로들이 그물망을 이루고 있었는데 바로 여기
에 레이덴이 건설되었다. 16세기 초, 이 도시에는 4만 명 가량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1574년, 스페인의 침략으로 약탈을 겪기도 했지만 부흥에 성공한 레이덴은 레이덴 대학이
들어서고 공업이 발달하면서 전 유럽에 그 명성을 떨쳤다.

반 레인가는 1세기 전부터 레이덴에 살고 있었다
1513년, 반 레인 혹은 반데 레인이라는 사람이 이 도시에서 제분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렘
브란트라는 이름은 외증조모인 레임프톄 코르넬리스드르 반 블란헴의 이름에서 유래한 듯하
다. 또한 이 이름은 매우 유명한 가문인 반 블란헴가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레임프톄처럼 하르멘 헤리츠도 칼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어머니는 카톨
릭을 고집했다.
반 레인가는 대가족을 이루었는데, 이는 가문의 보존을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전염병과
질병과 전쟁이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 갔던 것이다. 렘브란트는 아홉 명의 아들 중 여덟째
였다. 장남 헤리트는 친할아버지를 따라 이름지었고,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제분업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 아드리안은 제화업자가 되었다. 그 밑으로 딸을 셋 낳았는데, 두 명은 어
린 나이에 사망했고 렘브란트와 같이 자란 누이는 그중 마흐텔트뿐이었다. 그와 가장 가깝
게 지내던 남자형제는 형들인 코르넬리스와 빌렘이었다. 코르넬리스보다 빌렘이 손아래였는
데, 그들은 둘 다 이미 17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태어났다. 렘브란트의 아래로는 누이동생인
레이스베트가 있었다.
렘브란트의 가족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제방이 무너졌을 때 하르멘의 풍차가
물을 퍼내는 데 징발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하르멘은 남을 돕는 일에 주저할 사람
이 아니었다. 도시를 휩쓴 전쟁과 화재, 북해의 거센 파도는 네덜란드인에게 단결의 미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화재와 수재, 지속적이고 가공할 위협
네덜란드의 적은 스페인과 바다였다. 1606년까지 이렇다 할 휴전협정이나 조약은 체결되
지 않았지만, 스페인이 퇴각함에 따라 주연합(오늘날의 네덜란드)은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
다. 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빈틈을 주지 않고 위협해 왔다. 겨울철이나 높은 조수가 밀려올
면, 해수면보다 아래쪽에 놓이게 되는 저지대의 주민들은 수백 년 동안 둑이나 제방을 쌓아
바다로부터 그들의 농토를 지켜 왔다. 그렇지만 11월에서 2월 사이에는 영락없이 물이 스며
들어 온 천지에 물이 넘쳐흐르곤 했다. 남자들은 밭을 가는 시간보다 제방을 고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해안가 마을 사람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푯말을 세워 구역을 표
시한 뒤 제방을 감시하는 책임을 나누어 가졌다. 끊임없이 바다에 할퀴고 침식당하는 제방
은 이 지방의 유일한 안전책이었다. 한 프랑스 여행자는 "이곳은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
다."라고 묘사하지 않았던가!
하르멘 헤리츠 반 레인이 살던 베데스테그의 벽돌집은 방앗간에 맞닿아 있었으며,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제방과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하르멘 헤리츠 반 레인 역시 시당국이 지
시한 대로 양동이와 사다리를 현관밖에 두었을 것이다. 네덜란드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레이덴에서도 타르와 송진이 길거리와 운하를 비추는 데 사용되고 있었고, 목조 주택이 많
았기 때문에 화재가 빈번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레이덴의 시민들은 언제나 초긴장 상태에서
생활했다.

즐거움과 기도
겨울이 되어 운하가 얼면 반 레인 가족은 관리나 성직자나 상인 등 모두가 그러했듯이 투
박한 검은색 옷을 입고 스케이트를 탔다. 그들은 스틱과 공을 가지고 게임을 했다. 축제날을
즐기기를 거부하는 청교도가 아니었던 반 레인 가족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유쾌하게 어울
렸다. 바이올린 주자들이 곡조를 켜면 어떤 이들은 북을 울리고 어떤 이들은 플라지올레토
(작은 플루트)를 불어대 장단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광대가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
냈다. 실컷 축제를 즐긴 사람들은 판자 위에 숫자를 기록하며 주사위 게임이나 '거위' 게임
에 빠져들었다. 목사들은 카드놀이를 금했지만 가정집, 길거리, 선술집, 어디건 카드장을 돌
리지 않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하는 시간도 가졌다. <성서>를 읽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고, 기
도를 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일도 없었다. 삶은 고기와 야채를 1주일에 한 번 조리해 그때
그때 데워 먹는 가장 검소한 식사인 '호세포트'를 먹을 때에도 그들은 먼저 기도를 올렸다.

1609년, 마침내 전쟁이 끝나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이자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통치자였던 신성 알베르토는 네덜란드의
북부 7개주와 12년간 휴전을 하고 신교를 허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조약을 오랑예가의
모리츠와 맺었다. 이로써 주연합은 자유를 얻었다.
7개 주의 대표자는 행정부를 구성하고 본거지를 헤이그로 정했다. 군대의 통솔권을 가진
총독이 정부를 대표했는데, 총독은 집행권을 가질 뿐 입법권이나 재정권을 행사할 수는 없
었다. 주연합의 실질적인 주권은 막강한 부를 쌓은 중간 계급의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충
서의 대상이던 오랑예가가 쥐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외 없이 세금을 내야 했고, 재산은 계급
을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무역을 통해 부를 획득하다
1602년,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동인도회사는 배, 부두, 창고, 상점, 작업장 등 네덜란드
의 모든 자원을 흡수했으며, 수천 명의 병사를 지휘하고 상당수의 대형 전함을 관리할 참모
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7년 후, 동인도회사는 대양 너머에 개척한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할
만큼 성장했고, 시민들은 너나없이 향료무역에서 거부를 챙길 단꿈에 젖어들게 되었다.

번영을 구가하는 시민들은 검소했다
여러 해 동안 유럽의 우편망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금융정보가 암스테르담에 집적되고 있
었다. 이로써 1609년 암스테르담에는 외한은행이 설립되었다. 이제 암스테르담은 금융시장으
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항구와 교회와 선술집을 마주 대하고 살던 네덜란드인은 이제 동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행운을 꿈꾸었다. 그들의 삶에는 두 가지 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칼뱅주의적
인 신앙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외무역에 대한 열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는 부와 명
예의 추구에만 탐닉해 있었다.
렘브란트가 태어난 세계, 그가 화폭에 담을 세계는 변화된 세계였다. 프란스 할스(렘브란
트보다 25년 전에 태어남)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자부심에 가득 찬 섭정은 더 이상 예술가
의 모델이 아니었다. 그리고 얀 베르메르(렘브란트보다 25년 후에 태어남)의 그림에서 고요
한 빛에 감싸여 등장하는 인물들은 프랑스의 우아함에 상응하는 미묘함과 세련미를 띠게 된
다.

1613년, 렘브란트는 라틴어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네덜란드어로 읽는 법과 쓰는 법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성서>를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일을 도왔던 형들과 달리 렘브란트는 14세에
레이덴 대학에 들어갔다.
렘브란트가 죽고 6년 후인 1675년, 전기작가 요하킴 폰 산드라르트는, 렘브란트는 네덜란
드어를 읽지 못했으며, 따라서 고전과 예술이론을 습득하는 데에 "책이 큰 도움을 주지 못
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 글도 못 읽는 학생에게 레이덴 대학에서 입
학을 허가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620년 5월 20일 대학 기록에는, "문학과 학생인
레이덴의 렘브란트 하르멘츠는 14세로, 그의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국립대학, 레이덴
레이덴 대학에는 여러 단과대학들이 모여 있었고, 도서관과 유럽 각지에서 몰려오는 학생
들을 위한 기숙사가 설치되어 있었다. 교수들은 시정부의 배려로 베긴교단 내에 마련된 구
빈시설을 거처로 이용했다. 중세적 전통을 고집하지 않는 대학의 교과목에는 과학, 동방어,
그리스어, 점성학, 해부학, 식물학(식물학 연구를 위한 정원이 클루시우스의 주도로 1587년
레이덴에 세워졌다.) 등이 포함되었다. 학생들의 과학 학습을 돕기 위해 도시와 그 주변에는
온도계, 망원경, 기압계들이 설치되었다.
렘브란트가 대학에서 보낸 기간은 몇 개월 되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그는 병역과 포도
주세 맥주세 납세, 그리고 다른 몇 가지 의무를 면제받았다. 그는 라틴어나 스타텐베이벨
(1618 - 1619년 도르트레히트 종교회의가 규정하고 정부 주도로 간행된 '국가의 성경')을 학
습하는 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641년에 요하네스 오를러스는, 렘브란트의 부모가 그의 교육문제에 관련하여 이런저런
근심을 했노라고 기록해 두었다. "렘브란트는 학교공부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오
로지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부모는 렘브란트가 학교를 그만 다니
게 하고 미술의 기초와 원리를 배울 수 있게끔 화가를 하나 붙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리
하여 그들은 자식을 야콥이삭츠 반 스바넨뷔르흐에게 보냈는데, 결국 그가 렘브란트를 가르
치고 다듬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반 스바넨뷔르흐는 평범한 화가였다
초상화나 건축화, 그리고 판타지 등 어느 면모를 보더라도 렘브란트의 첫번째 선생은 히
로니무스 보스의 기법에 충실했을 뿐 그리 훌륭한 화가는 아니었다. 이탈리아에 체류할 때
명성을 얻었던 그는 46세이던 1617년 나폴리 여자인 마르게리타 코르도나를 데리고 레이덴
으로 돌아왔다.
스승의 작업실에서 렘브란트는 목판을 다듬고 캔버스를 준비하고 물감을 빻는 허드렛일부
터 배우기 시작했고, 드로잉, 해부학, 원근법의 기본원칙을 공부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뒤
반 스바넨뷔르흐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1641년에 출간된 요하네스 오를러스의 레이덴 안내서에 렘브란트는 탁월한 학생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는 너무나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전문 화가들조차 놀랐다. 언젠가 그가 유명
한 화가가 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렘브란트의 아버지는 이제 자신의 아들을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는 유명한 화가인 피테르 피테르스존 라스트만에게 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라스트만에게서 더 훌륭하고 강도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피테르 라스트만에게서 렘브란트는 첫 스승에게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반 스바넨뷔르흐와 마찬가지로 라스트만도 이탈리아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그는 로마에
서 아담 엘스하이머를 만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카라바조도 만났을 것이다. 적어도 라스트
만은 카라바조의 작품을 보았고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라스트만은 신화나 <성서>에서 다
룬 주제를 즐겨 그렸는데, 선술집, 야외축제, 길드, 연회 따위 일상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풍경화나 정물화도 그리지 않았으며, 그의 명성은 역사화에서 비롯되었다. 18세 렘브란
트와 41세 스승이 같이 작업을 시작하고 6개월 뒤, 렘브란트는 스승의 주제와 구도법을 완
전히 습득하였다. 이 짧은 기간은 렘브란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레이덴으로 돌아왔다
암스테르담에서 바닥이 평평한 배를 타고 운하를 따라 약 40km쯤 내려오면 레이덴이다.
레이덴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업실을 열었는데 베데스케그에 위치한 아버지의 집에 만들
었던 것 같다. 렘브란트는 한 살 정도 어린 얀 리벤스와 함께 작업했다. 동향인 리벤스는 렘
브란트가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레이덴의 화가
요리스 반 스호텐 밑에서 도제생활을 시작했다.(렘브란트도 그의 작업실에서 배웠을까?) 그
뒤 리벤스는 암스테르담으로 건너가 라스트만에게 그림을 배웠다. 따라서 렘브란트와 공동
작업을 시작한 무렵 18세였던 리벤스는 벌써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던 셈이다.

네덜란드의 화가, 평범한 시민
교회나 정부에서 미술품을 의뢰하는 일은 없었다. 예배당에서 성화나 제단화를 찾아보기
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총독은 왕처럼 많은 재산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화가들
이 그림 주문을 기대할 대상은 보통 시민들이었다.
시민계급은 성서적 삶을 영위하면서 그들의 명예를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화가에게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고객에 불과했지 화가의 후원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특
히 그들은 그림이 그들의 엄격함과 야심을 분명히 표현해 주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그림 속
에서 자신들의 모습은 물론 자신들을 움직이는 정신을 확인할 수 있기를 원했다.

방앗간집 아들,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다
1628년, 위트레흐트의 법률가이자 미술상인 아르나우트 반 뷔헬이 레이덴을 방문했다. 그
는 자신의 저서 <미술품>에서 레이덴의 '방앗간집 아들'을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그러나
아직 시기상조이다."라고 써넣는 걸 잊지 않았다. 반 뷔헬이 본 작픔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 렘브란트의 가장 초기작인 <돌팔매질당하는 성 스데반>일 것이다. 나무에 유채로 그
려진 이 작품은 'Rf 1625'라고 서명과 날짜가 적혀 있다. 그러나 그 무렵이면 이 작품은 이
미 팔려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RH 1626'이라고 서명과 날짜가 적힌 <골리앗의 머리
를 사울에게 바치는 다윗> <염소를 훔쳤다고 토비트에게 질책당하는 안나> <성전에서 상
인을 쫓아내는 그리스도>가 있다. 이 그림들은 모두 1628년에 팔렸을 것이다. 또한 렘브란
트의 형제와 누이들이 모델을 선, 환희에 넘치는 전원생활을 담은 <음악회>일 수도 있다.
이밖에 렘브란트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 작품들로는, 1627년에 그려진 <감옥에 갇힌
성 바울> <두 학자의 논쟁> <이집트로 도피> <삼손과 데릴라>를 꼽을 수 있다. 어쩌면
<상인>이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성 베드로>일지도 모른다.
렘브란트가 작업실 벽에 걸어 두었던 것은 아버지의 초상화였을지도 모른다. 초상화는 짙
은 색깔의 모자를 쓰고 머리를 앞으로 숙인 늙은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늙은이의 흰 수염
은 부분적으로 그림자에 묻혀 있다. 어쩌면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그는
나무 바닥을 드러내 머리카락에 반사되는 빛을 표현했다.(아마 붓의 손잡이로 물감을 긁었
을 것이다.)
렘브란트가 반 뷔헬에게 보여 준 것은 <작업실의 화가>일 수도 있다. 그림에서 이젤 앞
에 선 화가는 팔레트와 한 다발의 붓을 왼손에 쥐고 있다. 그림은 렘브란트의 야심을 표현
한 자화상이다. 이젤에 가로로 걸려 있는 나무 화판은 그 크기나 모양에서 성서적 장면을
그리기에 알맞아 보인다. 캔버스는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1626, 렘브란트는 이미 그려 두었던 성서적 주제를 에칭화로 다시 제작한다
렘브란트는 그해에 <할례> <이집트로 도피중에 취하는 휴식>을, 다음해에는 <이집트로
도피>를 에칭화로 제작했다. 계속해서 그는 어머니의 얼굴과 누더기를 입은 거지들을 에칭
화에 담았다. 주름이나 얼룩, 해진 옷자락 등이 선과 그림자로 표현하기 쉬웠기 때문이었을
까?
렘브란트의 제자 사뮈엘 반 호그스트라텐이 쓴 <미술 아카데미 입문>(1678)은 렘브란트
가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전해 준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연습하는 데 힘써라. 그러
면 너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은 이런 원칙을 고수했을까? 그는 언제나 더 많이 배우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로 에칭을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분명히 빌렘 피테르츠 보
이테베흐, 에사이아스 반 데 벨데, 피테르 빈크본스, 헤르퀼레스 세헤르스의 에칭화를 보았
을 것이다. 또한 그는 자크 칼로의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렘브란트는 조각칼보다 염산
을 통해 훨씬 다양한 기법의 에칭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광택제를 사용하는 법과 염산에 부식되는 깊이를 조절하는 법, 그리고 에칭 바늘을 바꾸어
가며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이것은 끊임없는 연습을 필요로 했다. 그는 이중 바늘을
고안하여 머리카락을 에칭하는 데 사용했다.

20세도 채 되지 않았던 렘브란트는 지칠줄 모르는 정력으로 작업하고 실험했다
1620년대 말경에는 아마 리벤스가 렘브란트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리벤스는
1626년에 콘스탄테인 호이겐스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이 두 예술가보다 10년 정도 나이가
많았던 호이겐스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베네치아 공국의 주연합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후에 런던 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그곳에서 제임스 1세로
부터 작위를 수여 받았고, 1625년에는 총독의 개인비서가 되었다. 그는 라틴어 시와 존 던의
시를 번역했고, 법학과 점성학, 신학을 공부했으며, 르네 데카르트와 3개 국어로 서신을 교
환했다. 그가 기록한 일기도 유명하다.

렘브란트와 리벤스의 비교
1630년경, 호이겐스는 '방앗간집 아들'인 렘브란트와 '자수업자의 아들'인 리벤스가 이미
당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들에 비해 손색이 없으며 얼마 후에는 그들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
고 기록하고 있다. 호이겐스의 글은 계속해서 이들이 비록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
들의 피는 귀족적인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재능은 출신과 밀접한 관계가
없다는 교훈을 도출했다.
또한 호이겐스는 렘브란트와 리벤스를 그들의 스승들과 비교하면서 이들이 스승에게 아무
런 빚도 지지 않았다고 했다. "만약 오늘날 두 화가의 스승들이 그들에게 배운 제자들의 그
림을 본다면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아르키메데스의 스승이 자신들의 제자를 보고 느꼈을 부
끄러움을 똑같이 경험할 것이다."
그는 두 화가를 비교하면서, 리벤스는 독창성이 뛰어난 반면, 렘브란트는 판단력이 탁월하
고 생생한 감정 표현에 장점이 있다고 평했다. 그는 <은화 30전을 돌려주는 유다>를 예로
들며 이 그림이 고대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그 어떤 작품보다 더 훌륭하다고 단언
했다.

로마에 가지 않고 화가가 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호이겐스는 이 젊은 두 화가가 로마에 다녀오지 않은 것에 놀랐다. 17세기 화가치고 로마
경험이 없는 화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 푸생,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 자신의 능력을 로마에
서 확인한 화가들의 목록은 끝이 없을 정도이다. 로마는 화가의 지침자 구상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리벤스나 렘브란트는 두 가지 점에서 로마 여행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이탈리아의 대작을 네덜란드에서도 충분히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이유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들의 태도가 호이겐스를
놀라게 했지만 로마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명성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영국의 국왕 찰스 1세의 개인사절로 로버트 커가 주연합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총독
은 그를 통해 미술품을 영국 국왕에게 선물했는데, 리벤스와 렘브란트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첫번째 제자, 첫번째 거래
헤리트 다우는 렘브란트의 작업실에서 공부한 첫 번째 제자였다. 그는 당시 14세였다. 작
업실을 호이겐스가 방문한 것이나, 제자가 생긴 것이나 모두 렘브란트의 커져 가는 명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에 어떻게 명성을 얻게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렘브란트 사후 50년이 되는 해에 네덜란드의 작가 아르놀트 하우브라켄은 다음과 같이 말
했다. "미술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이들이 렘브란트에게 헤이그에 사는
어떤 신사의 이름을 알려 주며 막 끝낸 작품을 하나 들고 찾아가 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렘
브란트는 그림을 들고 헤이그까지 걸어가 100길더에 작품을 팔았다. 이 화려한 시작이 부를
쌓을 수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작품 제작에 더 열중했고 모든 미술애호가들이 그에게
감탄했다."
1630년 4월 23일, 아버지가 62세로 사망했다. 방앗간은 형들 차지가 되었다. 따라서 렘브
란트는 더 많은 작품을 그리고 팔아야 했을까? 꼭 그때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가 꿈꾸던 것은 명성이었다. 그의 야망을 충족시키기에 레이덴은 좁기만 했다. 요하네스
오를러스는 이렇게 전한다. "1630년 암스테르담의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었고, 그후 여러 차
례 그곳을 방문해 그림을 그렸다. 이것을 계기로 결국 그는 그곳으로 옮겼다."
주로 가족이 모델이 되어 준 레이덴 시절의 초상화는 역사화를 그리기 위한 준비작업이었
다. 렘브란트의 어머니는 <예언자 안나>의 모델이었을 뿐 아니라, <성전에 나타난 그리스
도>의 중앙에 위치한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초상화들은 이미 강력한 표현력을 간직하
고 있으며, 당시까지 부차적인 장르로 머물러 있던 초상화의 틀을 뛰어넘고 있다.

"유럽에서 보기 드문, 인도산 희귀품으로 가득한 배들이 이곳에 도착하오. 이것을 보는 것
이 과수원에서 자라는 과일을 보는 것만큼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소? 화려한 삶과 진
귀한 물건을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소?"
---르네 데카르트

제2장 영광과 비탄

망명 중이던 르네 데카르트는 그의 친구인 작가 장 루이쉬에 드 발자크에게 암스테르담의
'화려함'과 '진귀함'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증
진시키는 데 몰두해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도 평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
다."
참으로 암스테르담의 상업은 번창하고 있었다. 프랑스 작가인 프랑수아 드 살리그낙 드
라 모트 페늘롱이 후에 밝힌 바에 따르면 암스테르담은 세계 각지에서 흥정과 매매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 도시였으며, 암스테르담의 시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상인들'이었다.
항구에는 배들이 너무 많아 멀리서 보면 돛들이 숲처럼 보일 정도였다. 암스테르담에는 '흐
라흐텐'이라 불리는 동심을 이루는 세 개의 운하가 도시의 모습을 잡아 주고 있었다. 렘브란
트의 사후 그의 유골이 묻힌 베스테르케르크 교회가 완성되었고, 제방 위에는 벽돌과 돌로
지어진 집들이 늘어서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은 활기가 넘치는 매력적인 도시로, 안트베르펜
을 추월해 네덜란드 제1의 항구가 되었다.
1631년, 철학교수이자 의학교수인 카스파루스 바를라외스가 저명 인사들을 이끌고 레이덴
을 떠나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그는 암스테르담을 창조와 탐구와 발견을 위한 도시로 만
들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하여 대학이 하나 설립되었다. 네덜란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요스 반 덴 본델의 말에 따르면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왕관'이었으며 '네덜란드의 영혼'이 자
리한 곳이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이 젊은 화가는 곧 자신의 작품에 간단히 '렘브란트'라고 서명하기 시작했다. 혹은 예전처
럼 'R 반 레인'이라고 쓰기도 했다. 과거에 그는 'RHL 반 레인'(R은 렘브란트, H는 하르멘
의 아들이라는 뜻의 하르멘츠, L은 레이덴 사람이라는 의미), 혹은 'RHL'이라고 서명했지만
이제 1630년에 사망한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또한 레이덴을 떠난
상황에서 레이덴을 표기할 필요도 없었다. 곧 이어 그는 '렘브란트' 대신 'f', 'fe' 혹은 'ft'로
서명하기 시작했다. 이 서명들은 라틴어의 'fecit(그가 제작하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야
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탈리아의 거장들인 티치아노, 라파엘로, 미켈
란젤로처럼 세례명으로만 알려지기를 원했다. 25세의 렘브란트는 자신이 이 거장들과 동등
하다고 여겼다.

렘브란트는 중요한 의뢰를 받았다. 그것은 해부학 강의를 주제로 한 집단초상화였다
주문받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렘브란트는 여러 달 동한 정기적으로 레이덴을 떠나 암스
테르담으로 오곤 했다. 이전에 렘브란트와 1,000길더의 계약(1631년 6월 29일에 증인을 대동
하고 계약을 맺음)을 맺었던 암스테르담 화상인 핸드릭 반 월렌보르흐는 렘브란트에게 중요
한 의뢰를 조달해 주었다. 월렌보르흐는 폴란드와 덴마크에서 살다가 1627년부터 암스테르
담에서 활동하게 된 화상으로, 비록 시작은 늦었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전유럽의 미술품을
거래하고 있었다. 렘브란트의 재능을 알아본 그는 렘브란트에게 숙소와 음식을 보장해 주고,
자신의 집에 그의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으며, 렘브란트가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격
려했다.
이 중요한 의뢰는 40세의 니콜라스 피테르스존 튈프 교수가 1632년 1월에 수행하는 해부
학 강의를(사형에 처해진 시체를 사용함) 그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림은 아토니스마르크트의
해부학 극장에서 수행된 튈프 교수의 강의 1주년을 기녀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완성 작품
은 길드 홀에 걸릴 예정이었다. 이 장소는 렘브란트에게 무척 뜻깊었는데, 튈프 교수를 포함
해 명망 있는 인물만이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외과의사요 두 번이나 시장으로
선출되었던 튎 교수는 당시에는 행정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렘브란트가 그려야
할 인물이었다. 그림에는 다른 유명한 사람들도 함께 묘사되었는데 그 가운데 외과의사는
하나도 없었다.

렘브란트는<해부학 강의>가 다른 작품과 비교될 것이며 자신의 경력에서 결정적 의미
를 지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에게 찬란한 미래를 보장했다. 이제 점잔을 빼며 놀란 척 승리를 맛보
는 일만 남았다.
지난 1세기 동안 집단초상화는 네델란드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튈프 교수의 해부
학 강의>는 전통을 따르면서도 이전 작품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전통적인 집단초상화
는 동일한 조명 아래서 딱딱한 포즈를 취하고 앉아 있는 인물들을 표현했다. 이러한 초상화
에서는 그것의 배경이 연회용 탁자이든 회의 탁자이든 혹은 해부학 극장이든 인물을 그리는
방법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경직되어 있는 인물들의 자세는 실제상황에 구애를 받지 않
았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튈프 교수를 중심으로 둘러서 있는 인물들은 실제로 해부학 강의
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들은 조용히 집중하며 시체 위로 몸을 숙이고 절개
된 팔에 드러난 힘줄을 바라본다. 그림의 모델이 된 인물들은 그들의 지명도와 학식을 렘브
란트가 잘 표현해 주기를 원했고, 렘브란트는 그들의 바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렘브란
트는 이 집단의 중심 인물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그려 넣어 그의 중요성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에게 즉각적인 명성을 안겨 주었다.
1632년 7월 26일, 한 하급관리가 렘브란트를 방문했다. 관리는 암스테르담에 사는 명사들
의 건강상태에 내기를 건 사람들의 지시를 받고 일일이 확인작업을 하고 있었다. 결국 렘브
란트는 명사의 대열에 포함된 셈이다.
얼마 후 한 여인이 등장했다. 츠바넨뷔르흐발과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의 모퉁이에서
렘브란트와 같이 생활하던 화상 헨드릭 반 월렌보르흐의 친적이었다. 프리슬란트 출신으로,
아버지가 예전에 프리슬란트의 레바르덴 시장이었던 그녀의 이름은 사스티아였다. 둥근 턱
과 풍만한 가슴을 지닌 이 젊은 여인은 결혼지참금으로 4만 길더를 가지고 왔다. 여느 처녀
들과 달리 사스티아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1633년 6월 5일,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약혼했다.
렘브란트는 꽃으로 장식된 모자의 챙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진 사스키아의 초상화를 그
렸다. 입술에 미소를 띠고 손에 꽃을 들고 있는 그녀가 팔꿈치를 기대고 있는 탁자 아래쪽
의 렘브란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21세 된 아내의 초상화, 우리가 약혼한 지 3일째 되는
날" 렘브란트는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사스키아도 모델로 삼았다.
약혼한 날로부터 1년 후 사스키아의 보호자인 목사 얀 코르넬리츠 사일비우스가 그들과
함께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가 결혼을 보증해 주었다. 렘브란트가 어머니의 승낙을 받았는가
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에 레이덴에서 공증인이 어머니의 승낙을 기재했다. 그들은 네덜란드
북부에 위치한 프리슬란트로 떠났다. 1634년 6월 22일,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결혼했다. 이
보다 몇 주일 전에 렘브란트는, 헨드릭 반 윌렌보르흐의 집에 기거하고 있던 독일 상인 부
르하르트 그로스만의 앨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정의로운 사람은 부도다 명예를 소중히 한
다." 그가 의뢰 받은 많은 주문과 사스키아가 가지고 온 지참금이 그로 하여금 생각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방앗간집 아들인 렘브란트 하르멘츠 반 레인은 이제 변호사이자 고위 관리인 처남을 두게
되었다. 또한 렘브란트의 처제 중 하나인 히스케의 남편은 거부 헤리트 반 로였다. 결혼으로
렘브란트의 사회적 지위는 급속히 변화했다. 이제 '방앗간집 아들'이란 말은 사라지게 되었
다.

렘브란트는 사랑과 부, 그리고 명성을 얻었다.
총독이 렘브란트에게 개인적으로 그림을 주문했다. 1년 후 렘브란트는 그림 의뢰인 역할
을 맡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콘스탄테인 호이겐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자비심 많으신 호이겐스 씨, 각하께 저에게 주문하신 세점의 그리스도 수난화를 완성하기
위해 제가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세 점의 주제
는 각각 그리스도의 매장, 부확, 승천입니다. 이 세 점은 십자가에 세워지는 그리스도(<십자
가를 세우다>)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와 의미상 연결되는 그림입니다 세 점 중
한 점만이 완성되었고 다른 두 점은 반쯤 끝낸 상태입니다. 호이겐스 씨, 제발 저게 완성된
한 점, 아니 세 점 모두가 각하를 기쁘게 해줄 것인지, 그리하여 공작이신 각하의 욕구에 제
가 부응할 수 있을지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언제나 당신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증거로, 존경하는 선생님, 당신에게 저의 최신 작품을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제 희
망을 각하께 전해 주시기 바라며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충직
하고 애정 어린 하인, 렘브란트"
완성해 놓은 그림의 대가를 받고 싶은 렘브란트는 추신을 달았다. "저는 니위베 둘스트라
트의 부렐 연금지구에 살고 있습니다." 사스키아와 렘브란트는 반 월렌보르흐와 암스텔 운
하 그 터에서 2년을 지냈다. 좀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스승과 제자
더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페르디난트 볼, 호바르트 플린크, 야곱 아드리안
츠 바케르 들이었다. 그들 중 몇 명에게 렘브란트는 숙소를 제공했다. 회화와 에칭화를 제작
하고 가르치면서 좀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1635년, 블룸흐라흐트에 면한 낡고 커다란 창
고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같은 해에 사스키아가 처음으로 임신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태
어나 세례를 받은 륌바르투스는 두 달밖에 살지 못했다.
렘브란트는 유화와 드로잉과 에칭화를 제작하면서 제자들에게 신체의 비율을 정하는 법,
동판에 잉크 칠하는 법, 염료 빻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사스키아와 사랑을 나누고, 맥주
와 진을 마셨으며, 자주 경매를 통해 그림을 팔았다.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이
해하려 했다.
렘브란트는 구경 못 할 작품을 연구하고 방문 못 할 도시를 스케치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모사하고 런던과 이탈리아의 풍경을 스케치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사스키아의 포즈, 농부 한 쌍이 힘겹게 떼어놓는 무거운 걸음걸이, 팬케이크를 굽는 여
성 등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렘브란트에게는 꿈이 필요했다. 렘
브란트는 장식이 달린 레이스나 주름 깃으로 치장한 검정색 옷을 입은 모델들을 그려야 하
는 주문 초상화의 단조로운 엄격성에 싫증이 났다. 그래서 그는 터번이나 예복, 그리고 무기
로 치장한 노인을 그의 모델로 삼았다. 그가 그린 것은 예언자도 속물도 아닌 보통 인간이
었다. 그는 이런 초상화를 그리는 데 쓰려고 언월도, 비단 따위를 구입했고, 모사하기 위해
판화와 그림을 사들였다. 처가 식구들은 그의 낭비벽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렘브란트가 아내
의 지참금을 허비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자신이 부자이며 자기 일의
성격이 그런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를 누가 부정할 것인가?

조급한 렘브란트
렘브란트가 1639년 1월 27일 급하게 콘스탄테인 호이겐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총독도 렘
브란트의 채무자였음을 알 수 있다. 편지는 그가 총독에게 보낼 작품 두 점을 포장하고 있
을 때 세리인 얀 오이텐보하르트가 그를 불러 어떤 제안을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말하길, 이렇게 하는 것이 각하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이곳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저
의 그림 값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여쭙겠습니다만 두 점의 그
림값 지불을 가능하면 빨리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돈을 급하게 사용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몇 주가 지난 후, 렘브란트는 더욱 다급해졌다. "경애하는 선생님, 이 편
지로 당신이 곤란을 겪지 않을까 망설여집니다만, 세리인 오이텐보하르트가 지불이 늦어진
다는 저의 부평을 듣고 조언을 해준 일 때문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전에 출납관 볼
베르헨은 1년마다 지불금을 지급한다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요일 오이텐보
하르트는 저에게 볼베르헨이 6개월마다 지불금을 지급하며, 따라서 그의 사무실에 4,000길더
가 준비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존경하는 선생님, 부디 속히
돈을 준비하셔서 제가 열심히 일한 대가인 1,244길더를 빨리 받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렘브란트가 마지못해 수긍했던 한 점당 600길더씩 1,200길더에 상아로 만든 액자
값과 포장비 44길더를 합친 금액이었다. 렘브란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주소를 명기해 두었
다. "저는 빈넨 암스텔의 당과 과자점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여러 주일 머문 데 비르 소이
케르브로덴이라는 이 가게의 집주인은 얀 반 벨데스테인이었다. 이집은 임시 거처에 불과
했다.

렘브란트는 그의 명성에 걸맞는 집을 원했다.
총독이 보내 줄 돈을 조급하게 기다리는 사이 렘브란트는 집을 사들였다. 그 집은 흔히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라 불리는, 브레스트라트의 신트 안토니스테이크라는 부유한 지
역에 위치했다. 1606년에 지어진 이 집은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위에는 층이 진 박
공지붕이 씌워져 있었다. 집주인인 피테르 벨텐과 크리스토펠 테이츠는 집값인 1만 3,000길
더를 분할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매매계약서를 보면 렘브란트가 첫해에 세 번에 걸쳐 대금
의 1/4을 지불했음을 알 수 있다. 완전한 지불은 5년이나 6년 후에 치르도록 되어 있었으며,
잔액에는 이자가 5% 붙었다. 이리하여 1639년 5월 1일,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새 집으로
이사했다. 옆집에는 회상인 반 윌렌보르흐가 살고 있었다. 그곳은 이전에 렘브란트와 사스키
아가 만난 곳이었다.

이탈리아 경험이 없다는 비난을 받던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이탈리아 미술을 발견
했다.
그해 4월 9일, 렘브란트가 경매에서 경쟁자에게 패한 것은 집값에 쪼들렸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화상인 뤼카스 반 위펠렌의 집에서 경매에 붙여진 작품은 라파엘로의 <발다사
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였다.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렘브란트는 이 초상화를 소묘했다. 그는 자신의 드로잉에 라파엘로
그림의 입찰가인 3,500길더를 적어 놓았다. 매입자는 암스테르담의 싱엘흐라흐트에 사는 알
폰소 로페즈로, 다이아몬드와 그림을 거래하는 유태계 스페인 상인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왕
궁과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미술품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의 소장품 중에서 렘브란트는 또
다른 이탈리아 거장인 티치아노가 그린 <아리스토텔레스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로페
즈는 렘브란트의 'RL 1626'이라고 서명된 작품 <발람과 당나귀>도 소장하고 있었다. 렘브
란트는 라파엘로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와 티치아노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초상화>를 모사하며 자기 방식대로 인물의 자세를 재구성했다. 회화는 회화를 통해 창조되
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의 집에서 작업에 열중했다. 그의 작업실은 2층에
있었고 1층에는 가족이 기거했다. 그림과 에칭화는 옆방에 모아 두기 시작했다. 다른 방들은
무기와 이국적인 의상들 그리고 수집품 등을 넣어 두었다. 맨 꼭대기 층에도 몇 개의 작업
실이 있었는데 이곳은 렘브란트의 제자들이 사용했다. 제자들은 동판에 바르는 역청, 밀랍,
송진을 섞는 작업을 하거나 렘브란트의 그림을 모사했다.
복제품도 원작도 아닌 이 그림들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품이냐 아
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리는 것이었다.

코르넬리아라는 이름은 슬픔을 가져왔다.
둘째 아이 코르넬리아는 1638년 7월 세례를 받았지만 3주 후 사망했다. 1639년 말, 사스키
아는 세 번째로 임신했다. 희망이 다시 생겨났다.
1640년 7월에 태어난 이 딸에게도 코르넬리아라는 이름을 붙여졌다. 그러나 2주 후 이 아
기도 사망하고 말았다. 곧이어 렘브란트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가 레이덴에서 사망했다. 그
녀는 유산으로 9,160길더를 남겼다. 몇 달 후 사스키아와 가장 가까웠던 누이 티티아가 사망
했다. 렘브란트가 1640년 초에 도살된 소를 놓고 제작한 정물화는 종교화와 다름없었다. 죽
은 고깃덩어리는 인생의 부질없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당시 렘브란트가 그렸던 다른 우아한
모델들의 피부와는 완연히 다르다. 렘브란트 당대의 사람들 중에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슬픔을 안고 렘브란트는 계속해서 작업했다.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던 피터먼디라는 영국
사람이 그의 여행기에 적어 놓은 유일한 네덜란드 화가는 렘브란트였다. 요하네스 오를러스
도 1641년 간행한 <레이덴 안내>2판에서 렘브란트를 소개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마트하우스 메리안이 바젤에서 출간한 토마소 가르조니의 책 <공공광장>에서
도 관심 있게 언급되고 있다.
자크 칼로나 , 아브라함 보세처럼 렘브란트는 17세기 에칭화의 대가였다. 화가와 에칭화가
로서 렘브란트의 명성은 전 유럽에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비뇽은 알폰소 로
페즈가 소장하고 잇던 <발람과 당나귀>를 보고 렘브란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렘브란트
에게 경의의 뜻을 표하고 화상인 한 친구를 보내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의 그림 몇 점을
사들이도록 했다.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가진 힘은 주문자들이 원하는 것을 집어내는 데 있다
렘브란트는 아첨에 가까울 만큼 숭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인기 화가로 머무는 데 만족
하지 않았다. 1634년, 그는 장갑을 끼고 레이스가 달린 아름다운 옷을 입은 마르텐 솔만스와
그의 아내 우펜 코피트의 화려한 모습을 담았다. 또한 주름 깃을 단 상인 빌렘 뷔르흐그라
프와 그의 아내 마르하레타 빌데르베크도 그렸다. 선주인 빌렘은 손을 그의 선박 위에 올려
놓고 있고, 그의 아내는 그에게 쪽지를 건네고 있는 모습이다. 렘브란트의 초상화들은 주문
자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포착하는 '실용적인' 것들이었다.
1640년에 렘브란트가 그린 도금공이자 액자를 만드는 사람인 헤르만 도메르와 그의 아내
바르첸 마르텐스의 초상화 두 점은 그가 초기에 그린 얀 코르넬리츠 사일비우스와 얀 오이
텐보하르트의 초상화로 되돌아갔음을 말해 준다. 이 초상화들은 모델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
을 묘사하는 대신 주제에 대한 숙고를 담고 있다. 도메르를 그린 이 초상화에서 렘브란트는
당시 미완성상태에 머물러 있던 코르넬리스 클라츠 안슬로의 초상화에서 표현될 강렬함을
담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안슬로의 초상화에서 안슬로는 책이 쌓여 있는 탁자에 앉아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사일비우스, 오이텐보하르트, 안슬로는 모두
<성서>를 읽고 있거나 설교를 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사일비우스는 칼뱅주의자였고,
오이텐보하르트는 아르메니아 교회 소속이었으며, 안슬로는 메노파 신도였다. 이 작품들은
사도나 예언자의 말에 대한 렘브란트의 명상을 담고 있다.

빛과 어둠, 키아로스쿠로
꿈, 명상, 사유를 그리기 위해서 렘브란트는 빛을 이용하는 전혀 새로운 기법을 창안했다.
외부세계는 더 이상 그의 그림의 주제가 아니었다.
렘브란트는 언제나 판화를 사 모았는데, 판화를 통해 이탈리아 미술을 연구했다. 흑백으로
만 표현된 판화들은 오리지널 유화나 프레스코화의 화려함이나 사용된 물감의 찬란함을 아
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판화로 알 수 있는 것은 구도와 배치와 음영의 움직임뿐이다.
에칭화 제작 경험을 통해 렘브란트는 명암을 넣을 때 에칭 바늘로 선을 그리는 방법과 깊
이를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선과 명암과 에칭화를 제작하며 얻은 실질적 경험
에서 나오는 그림 이해는 그의 작품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캔버스에 빛과 그림자를 구성해 넣으려 할 때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유화가 아니라 에칭
화였다. 그는 잉크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릴 때처럼 키아로스쿠로기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색채를 넣어 그림에 더 많은 차원을 부여할 수 있었다. 키아로수로 기법이란 논리적으로 빛
이 그림자를 만들 부분에 그림자를 그리지 않는 것이다. 이 기법은 그림에 강조부분을 만들
어 주며 화가가 바라는 효과를 창출해 준다. 렘브란트가 어깨 때문에 그림자가 져야 할 손
과 장갑에 빛을 주었다면 그것은 손과 장갑이 그 그림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단순
한 재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해 동안 렘브란트는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동시에 특정한 세부묘사를 통해 <성서>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표현하는 기법도 포
기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의 자의적인 사용은 결국 회화를 종말로 이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부부는 새로 태어난 아기와 새로운 그림 주문에 전념했다
1641년 9월 22일, 사스키아와 렘브란트의 네 번째 아이가 조이데르케르크에서 세례를 받
았다. 아기의 이름은 티투스였다. 근심 속에 몇 주가 흘렀지만 티투스는 죽지 않았다.
당시 프란스 바닝 코크라는 야심가가 암스테르담의 명사로 등장했다. 그는 시장의 사위가
되어 야심을 채울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곧 시청의 주요 직책을 맡게 되었고, 아내와 헨드
릭 데 카이세르가 설계한 싱엘흐라흐트의 저택에 거주했다.
코크의 군경력은 꽤 성공적이었으며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비롯한 장교들은 도시를
방어했고 공화국을 기초했던 것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해전이 끝난 뒤 군대와 시민 민
병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퍼레이드를 벌이거나 사격대회를 여는 것 정도였다. 1640년
말, 코크와 부대원들이 렘브란트에게 그들의 집단초상화를 의뢰했다. 이 초상화는 1642년 완
성되었다.
그러는 사이 티투스를 낳고 병석에 누워 있던 사스키아가 약간 회복되었다.

렘브란트의 부대 초상화는 다른 초상화들과 비교되었다
군인들을 주제로 한 집단초상화의 전통은 해부학 강의를 주제로 한 집단초상화보다 더 오
래 되었다. 다시 한번 렘브란트의 그림은 선배들의 그림을 능가해야만 했다. 또한 이 그림은
각기 다른 부대를 그린 다섯 화가들의 집단초상화들보다 우수해야 했다. 그것들은 요하킴
폰 산드라르트가 그린 코르넬리스 비케르 대장의 부대 초상화, 호바르트 플린크(렘브란트의
옛 제자)가 그린 바스 대장의 부대 초상화, 바르콜로뫼스 반 데르 헬스트가 그린 룰로프 비
케르 대장의 부대 초상화, 니콜라스 엘리아츠 피케노이가 그린 반 블로스베이크 대장의 부
대 초상화, 야콥 아드리안츠 바케르(렘브란트의 옛 제자)가 그린 데 그라프 대장의 부대 초
상화이다.
사스키아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렘브란트는 그림 값으로 1,600길더를 받기로 했다. 16명의 군인 한 사람당 약 100길더가
책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구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금액은 달라졌다. 이것은 집단초상
화에 대한 대가로는 그리 많은 금액이 아니었다. 사실상 이 금액은 네덜란드에서 튤립 구근
하나 값보다 적은 금액이었다. 물론 군인들이 계약서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돈을 따로 지
불했을 수도 있다.
사스키아는 몸져누워 있었다. 그녀는 병에 걸렸던 것이다.

렘브란트는 몇 달 동안 그림에만 몰두했다
1642년 초에 이 초상화는 의뢰인에게 인도되었다. 그 제목은 스케치북에 모사해 놓은 수
채화에 붙여진 것과 마찬가지로 <부관 헤르 반 블라르딩엔(빌렘 반 로이텐뷔르흐)에게 부대
출동을 명하는 청년 대장 헤르 반 퓌르메란트(바닝 코크)>였다.
렘브란트 사후 12년이 되는 해에 필리포 발디누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렘브란트는
이런 종류의 그림을 그린 그 누구보다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물들
사이로 한 다리를 들고 마치 걸어가는 듯 서 있는 대장은 손에 도끼창을 들고 있는데 이 잘
묘사된 광경은---누구에게나 이것이 실제 크기라는 인상을 준다. 다른 인물들은 서로 분간
하기 힘든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이 실제 관찰을 통해 그려졌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1642년 6월 5일, 사스키아는 유언장을 통해 마지막 소망을 이야기했다
사스키아는 약 4만 길더를 렘브란트와 티투스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 반이 티투
스에게 할당되었다. 티투스가 성인이 되거나 결혼하기 전까지 이 돈에서 발생하는 이자는
렘브란트의 몫이었다. 단, 그가 재혼하면 무효가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사스키아는 유
언장에서 렘브란트에게 재산목록을 만들 필요는 없음을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렘브란트가
티투스를 고아원에 맡기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6월 14일, 사스키아는 30세로 사망했다. 아마도 결핵이 원인인 듯하다. 5일 후에 매장된
그녀의 시신은 7월 9아 렘브란트가 묘를 마련해 둔 아우데케르크 교회로 운구되었다. 티투
스는 겨우 한 살이었다. 렘브란트에게는 그림 주문이 쇄도하고 있었다.
1642년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는 렘브란트의 명성을 드높여 주었다. 그러나 렘
브란트는 사스키아의 죽음으로 격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비평가들이 뭐라고 말하든 간에 이 그림은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살아 남을 것
이다. 이 그림은 구상이 예술적이고 인물의 다양한 배치가 무척 독창적이며, 무엇보다 강렬
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것과 비교할 때 다른 그림들은 놀이카드처럼 보이고 만다."
---렘브란트의 제자 사뮈엘 반 호그스트라텐
(<야경>으로 알려진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에 대해)

제 3장 고독과 파멸

누구도 렘브란트의 천재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에 대한 비판은 그의 천재성이라
는 문제를 제쳐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판은 주문화에만 의존하여 먹고
사는 화가에게는 불행하게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욕구에만 충
실한 그림'을 그린다고 비난했다. 사람들이 렘브란트로부터 기대한 것은 한 점의 집단초상화
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예술작품을 그렸다. 그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렘브란트의 천재성은 애호가와 수집가를 매혹시켰지만 고객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고객들은 렘브란트의 천재성이 아니라 실제와 똑같은 이미지에 대가를 지불했다. 초상화
는 모델과 똑같아야 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자신의 내면, 파악하기 힘든 본질, 그리고 변
형된 사물을 그리고 있었다. 오히려 렘브란트의 몇몇 제자들이 더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렘
브란트의 욕망은 단지 그림을 그리는 것, 즉 그 자신의 예술적 한계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
다.
사스키아가 죽은 후 몇 달이 지나 렘브란트는 그녀의 초상화 옆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다음 '렘브란트 f 1643'이라고 서명과 연도를 기입한 그림을 제작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죽
음을 부정하고 있다. 그와 사스키아가 함께 서 있는 장면은 그것이 미술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었다. 그에게 이러한 종류의 초상화는 <성서>에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그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즉, 죽음과 부활이라는 동일한 주제가 그의 붓끝에서 표현된 것이다.
렘브란트의 내면에서 '본다'는 것은 사실상 '믿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천재는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해될 수 있었을까?
그의 작품이 받아들여지느냐 마느냐에 개의치 않고 렘브란트는 회화와 에칭 작업을 계속
했다. 렘브란트는 티투스를 돌봐 줄 유모를 고용했다. 게르톄 디르크스라는 유모는 건장한
시골 여인으로 아브라함 클라스존이라는 트럼펫 주자의 미망인이었다.
이로써 렘브란트는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구름이 낀 밝은 하늘 사이로 비스듬하게
햇살이 비치고 있는 풍경화 <세그루의 나무>를 그린 렘브란트는 드러누운 돼지, 사색에 빠
진 철학자, 곡물더미에 소녀를 던지는 수도사, <성서>적 주제들, 거지들, 남자의 나신 등 어
디서나 그림의 주제를 발견했다. 그는 칼뱅주의적인 특성에 맞추어 자신의 영감을 재단하지
도 않았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꿈꾸거나 기도하거나 죄악을 저지르는 인물들은 마
치 렘브란트 자신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 그리고 그는 어린 아들의 유모를 정부로 삼았다.
아르놀트 하우브라켄의 말은 렘브란트에게 알맞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을 풍부
히 하려 할 때 나는 명예보다는 자유를 추구한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목표로 한 삶만을 생
각했다. 그 삶은 그림을 위한 것, 그림을 통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그림에 종속되었으며, 모
든 것이 그림을 위해 희생되었다.

1640년대 말, 렘브란트는 주문 초상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모자를 쓴 노인들이 사슬에 묶여 공상을 하는 그림이나, 팔꿈치를 창턱에 기대거나 손을
문 위에 얹은 채 몽상에 빠져 있는 소녀의 그림 같은 것들은 주문화의 범주에 들 수 없는
것들이다. <성서>의 내용을 그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렘브란트는 <간음한 여인> <요셉의
꿈> <염소를 훔쳤다고 토비트에게 질책당하는 안나> 등 <성서>를 주제로 많은 그림을 제
작했다. 그 가운데 <간음한 여인>과 <할례>는 1646년 11월에 2,400길더에 총독이 구입했
다. 이 그림들은 형태나 크기에서 렘브란트가 7년 전에 그린 것과 거의 같았다. 총독은 꾸준
히 그림을 주문하고 사들였다. 이 때문에 렘브란트가 고객과 맺는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렘브란트가 죽은 뒤 많은 시간이 흐르자 불확실한 일화와 이야기들이 기록되었다
"렘브란트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려면 그 앞에서 2-3개월 앉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알
려지면서 그를 찾아오는 손님이 뚝 끊어졌다. 그의 작업속도가 느린 이유는 처음에 그린 그
림이 마르면 곧바로 그것을 다시 그렸기 때문이다.----작업할 때는 만약 왕이 온다고 하더
라도 작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다는 생각
이 들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했다."(필리포 발디누치)
"(렘브란트는)하나의 얼굴을 캔버스에 그리기 위해 판본을 열 개 정도 만들었다. 그가 가
장 만족스러운 터번의 위치를 잡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때에 따라서는 이틀이 걸렸다."(아
르놀트 하우브라켄)
"어느 날 렘브란트가 한 부부와 아이들의 집단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이 끝날 무렵
렘브란트의 원숭이가 죽었다. 그는 새로운 그림에 착수하는 대신 죽은 원숭이를 집단초상화
에 그려 넣기 시작했다. 당연히 모델들은 이 정나미 떨어지는 사체가 그들 옆에 있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죽은 동물이 창출한 효과가 그에게 커다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렘브
란트는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원숭이를 없애 버리는 대신 작품을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두
었다."(아르놀트 하우브라켄)

렘브란트의 요구는 그가 만족을 주어야 할 고객들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객으로부터 멀어진 렘브란트는 고객 없이 사는 생활을 배워야 했다. 낭비와 추문이 일
상으로 자리잡았다. 렘브란트는 경매장, 화상, 행상인, 의류상인들에게 끊임없이 물건을 구입
했다.
"그는 특이하거나 예술적으로 의미가 있어 보이는 고풍스러운 의상들을 사들이기 시작했
다. 아무리 더럽더라도 그는 이것들을 작업실 벽에 걸어 두었다. 작업실에는 취미로 모아 두
었던 아름다운 골동품들과 더불어 활, 미늘창, 단검, 장검, 단도 등 고대와 현대를 망라하는
온갖 종류의 무기, 엄청난 양의 판화, 메달, 정교한 드로잉,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편 그는 사실상 사치를 부린 것에
불과했지만 통이 크다는 평판이 나 있었다. 그는 이런 좋은 평가를 이용해, 예컨대 여러 분
야의 대가들이 그린 드로잉이나 유화 등, 어떤 물건이든 경매에 붙여지면 매우 높은 입찰가
를 불러 다른 사람들은 감히 그보다 높은 값을 부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자기 직업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발디누치가 소문을 듣고 전한 이 이야기는 사실인 듯하다. 사스키아는 렘브란트에게 약 4
만 길더를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렘브란트가 유산의 일부를 그림에 필요한 낡은 물품이나
오브제의 구입에 사용했든, 혹은 자기 직업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사용했든 아무리 좋게 봐
주어도 그는 무책임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었다. 금융시장과 은행과 상거래의 도시인 암
스테르담에서 낭비는 용인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칼뱅주의적인 암스테르담 사회는 그의 방탕을 마뜩찮게 여겼다
헨드리켸 스토펠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헨드리켸 스토펠스도히톄르 야헤르는 신트 안토
니스테이크에 살던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1649년에 렘브란트의 정부가 되었다. 그의 정부
게르톄 디르크스가 이 관계를 환영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1648년 1월 24일, 게르톄는 티투
스를 상속인으로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로써 렘브란트에게 받은 사스키아의 귀금속을 포함
한 그녀의 전재산은 티투스에게 남겨졌다.
그녀의 이러한 행위는 몇 달 후 그녀가 렘브란트에게 약혼파기 소송을 걸었을 때 유리한
증거로 작용했다. 법정은 그녀의 소송을 기각했지만 유언장을 취소시키는 대가로 렘브란트
에게 1년에 200길더의 돈을 그녀에게 지불할 것을 명령했다.(이전까지 렘브란트는 166길더
를 주고 있었다.)
얼마 후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의 귀금속을 게르톄로부터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빚에 쪼들
리던 게르톄는 이미 귀금속을 모두 전당포에 잡혀 둔 상태였다. 렘브란트는 그녀를 법정에
세우고 그녀의 방탕한 생활을 고발했다. 1649년 10월 23일, 그녀는 12년의 금고형을 선고받
았다. 렘브란트는 그녀를 고우다로 이송하는 비용을 지불했다. 그녀는 그곳에 유폐되었다.
렘브란트는 그녀의 생활비를 계속 지불해야 했다.

렘브란트는 시기심을 느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
헨드리켸 스토펠스는 소송과정의 증인이었다. 당시 그녀는 24세이거나, 아니면 23세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렘브란트는 그녀보다 20년 위였다. 렘브란트는 헨드리켸가 자신의 정부로
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주변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그
의 모델을 섰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결혼은 사스키아가 남겨 준 유
산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계속 돈을 뿌리고 다녔고 빚더미에 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신트 안토니스데
이크 집의 옛 주인에게 아직도 채무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화가로서의 명성은
소송과정이나 경제적 상황 때문에 손상되지 않았다. 1650년 람베르트 반 덴 보스는 마르텐
크레체르의 소장품들을 찬양하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소장품 가운데는 티치아노
나 루벤스의 그림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 렘브란트여! 나는 '렘브란트'라는 이름 하나만으
로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당신의 명성을 굳이 나의 펜을 긁적여 입증하지 않겠습니다."
1650년, 미술감정사 두 명이 신트 안토니스데이크 집의 재산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그를
방문했다. 렘브란트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은 전부 1만 7,000길드로 평가되었다. 또한 렘브
란트가 그린 그림들의 값어치는 모두 6,400길더로 평가되었다. 그의 재산은 채권자들을 안심
시키기에 충분했다.

렘브란트의 작업실에서 상인과 정치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훨씬
지적인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렘브란트와 어울리는 절친한 친구들은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하거나 주석을 달거나 그
림을 그리는, 한마디로 창작자들이었다. 얀 코르넬리츠 사일비우스는 신학자이자 설교가였
다. 헨드릭 마르텐츠 소르흐는 화가였으며 에프라임 뷔에노 박사는 암스테르담의 가장 유명
한 의사이자 작가였다. 렘브란트는 그들의 모습을 에칭화나 유화에 담았다.
또 다른 친구였던 얀 식스는 암스테르담 시장이 되려는 야심을 가진 사람으로 시와 비극
을 쓰고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있는 모습을 한 식스의 첫 초상화를 렘브란트가 에칭으로
그린 다음해인 1648년, 식스는 <메데이아>라는 긴 비극시를 출간했다. 식스는 성 오메르(프
랑스 북부)로 도피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레이덴 대학에서 수학했고 1640년에 이탈
리아 여행을 했다. 1652년에 그는 사업을 포기했다. 가끔 그는 렘브란트를 디메르디케에 위
치한 그의 영지로 초대해 머물게 했다. 그곳에서 렘브란트는 풍경화와 식스의 <알붐 아미코
룸>을 위한 두 점의 드로잉을 그렸다.
렘브란트와 마찬가지로 얀 식스도 고미술품과 에나멜화, 그리고 다른 예술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수집방법은 렘브란트와 달랐다.

렘브란트의 채권자들이 점점 까다로워졌다
채권자들이 잠잠해진 것은 메시나의 귀족인 돈 안토니오 루포가 렘브란트에게 별다른 주
문사항 없이 <철학자>라는 작품을 주문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런 것 같지
는 않다. 렘브란트는 그림에 대해 말했고, 채권자들은 돈에 대해 말했다. 그가 그림을 그린
다는 사실은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1653년에 인내심을 잃은 채권자가 생겼다. 주연합은 영국을 상대로 다시 전쟁에 돌입한
상태였다. 증권시장은 파국에 다다랐다. 렘브란트는 돈을 빌려야만 했다. 얀 식스가 그에게
1,000길더를 빌려주었다. 로데베이크 반 뤼딕은 보증을 섰다. 전 암스테르담 시장인 코르넬
리스 비트센과 상인인 이삭 반 헤르트스베크가 각각 4,000길더씩을 빌려주었다. 직접 그린
그림을 포함한 렘브란트의 모든 재산을 이 빚에 대한 담보로 저당 잡혔다. <붉은 모자를 쓴
사스키아의 초상화>와 <설교하는 세례 요한>은 얀 식스의 소유가 되었다. 렘브란트는 결코
신트 안토니스데이크의 집값을 청산할 수 없었다. 1653년 2월, 옛 주인인 크리스토펠 테이츠
는 렘브란트에게 이자를 포함해 아직도 8,470길더의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법정에 선 렘브란트와 헨드리켸
렘브란트와 헨드리켸는 교회재판소에 소환되었다. 소환에 응하면 그곳에서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이유를 말해야 했다. 그들은 소환을 거부했다. 1654년 7월, 칼뱅교 교회 법원은
헨드리켸만을 다시 소환했다. 왜 렘브란트는 소환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
다. 헨드리켸는 이후로도 계속 소환을 받았지만 모두 무시해 버렸다. 마침내 그녀가 재판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재판부는 그녀에게 부정한 관계를 포기하고 참회하라는 훈계를 늘어놓
았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렘브란트와 살았다.
1654년 10월, 사스키아가 묻혀 있는 아우데케르크 교회에서 렘브란트와 헨드리켸 사이에
서 태어난 딸이 세례를 받았다. 새로 태어난 딸의 이름은 코르넬리아였다.

1654년, 렘브란트는 다시 빚의 지불기한을 넘겨 버렸다
다시 렘브란트 매년 50길더를 지불 받는다는 조건으로 테이츠와 계약을 맺었다. 테이츠는
렘브란트에게 그림 주문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과 렘브란트의 빚의 총액을 알고 있었
다.
코르넬리스 아이스베르트 반 호르는 시칠리아의 귀족 안토니오 루포를 대신하여 렘브란트
에게 500길더를 지불했다. 이것은 1652년에 주문한 그림(<철학자>로 알려진) <호머의 흉상
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대가였다. 하지만 이 그림은 1653년에 제
작한 것으로 서명되어 있다. 이를 통해 렘브란트가 작업한 기간을 알 수 있다.
테이츠는 렘브란트가 고객의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소녀의 초상화를 주문하며 계약금으로 65길더를 주었던 상인 디호 안드라다가 그러한 경
우이다. 잔액은 그림이 인도되면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드라다는 완성된 그림이
소녀와 하나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렘브란트에게 배상을 요구했다. 비판을 참을
수 없었던 렘브란트는 나머지 금액을 요구하며 맞섰다. 고객들은 그의 비타협적인 자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656년 5월, 렘브란트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5월 17일, 렘브란트는 법원에 신트 안토니스데이크 집의 소유를 티투스에게 옮기는 명의
이전 신청을 했다. 그는 부채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신이 떠맡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의 요구를 기각했다. 레이덴에 사는 렘브란트의 한 형제가 극빈자이며 그의 누이는 거의
파산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법정은 티투스와 렘브란트의 재산을 공정하게 나누어 줄 후견인을 지목했다.
1656년 7월 20일, 고등법정이 지목한 프란스 얀스존 브뤼닝흐가 렘브란트의 재산을 정리
했다. 그는 '재산양도'의 원칙을 적용해 달라고 탄원했다. 이 원칙은 보통 채무자의 신용이
믿을 만한 경우에 한해 허용되는 것이었다. 바다에서 입은 피해와 손실이라는 핑계로 탄원
이 받아들여졌다. 렘브란트는 징역형을 살 뻔한 파산의 불명예에서 구제되었다.

1656년 7월 25일과 26일,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 집의 총 재산목록이 작성되었다
363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재산목록은 모든 항목이 꼼꼼히 기재되어 있다. 몇 개만 예를
들어보면 '세탁실의 린네르', '백랍 주전자', '아우구스투스 황제 상', '베개 두 개', '동인도의
바느질 상자', '육지 바다 동물 표본 47점', '우르비노의 라파엘로가 그린 얼굴 초상화', '얀
리벤스가 그린 <나사로의 부활>'등이 있다. 유화로는 아드리안 브라우베르, 앤 리벤스, 헤르
퀼레스 세헤르, 팔마 베키오, 피테르 라스트만, 호바르트 얀츠 플린크, 얀 포르셀리스, 뤼카
스 반 발켄뷔르흐, 야코포 바사노, 라파엘로, 얀 반 아이크, 조르조네 등의 작품이 있었다.
또한 10여 권의 판화 묶음집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형 피테르 브뢰겔, 형 뤼카스 크라나흐,
안토니오 템페스타, 뤼카스 반 레이덴, 루벤스, 야콥 요르단스, 자크 칼로 등의 판화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티치아노,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안니발레 카라치, 조반니 바티스타
로소(피오렌티노), 줄리오 보나소네 등의 작품을 모사한 판화들이 있었다. 렘브란트의 집은
대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재산을 다 잃어 가는 시기에 렘브란트는 두 번째 해부학 강의 그림을 제작했다
토린스 교수는 얀 식스와 튈프 교수 모두와 인척관계에 있었다. 튈프 교수의 후임으로 암
스테르담에 있는 의과대학의 검시관이 된 요하네스 다이만 박사가 렘브란트에게 해부학 강
의 초상화를 의뢰한 것이다. 이 강의는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가 걸린 교실에서 행해
지고 있었다. 다이만의 초상화는 같은 방에 걸릴 예정이었다.
첫번째 해부학 강의 초상화를 통해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명성과 부를 얻었다. 24년
후 역경에 처한 렘브란트는 자신이 아직도 네덜란드의 가장 위대한 화가라는 것을 입증해야
만 했다.

<해부학 강의>를 통해 렘브란트는 예전의 시도와 두번째로 대결하게 되었다
손상되기 전 원화에는 누워 있는 시체 양쪽으로 여덟 명이 그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 다
이만의 옆에 선 조수가 두개골을 들고 있다. 1723년, 화재로 이 작품의 3/4이 소실되기 전에
이 작품을 본 요쉬아 라이놀드스 경은 이 그림의 색채는 티치아노의 것과 흡사하다고 말했
다.
이 그림이 연상시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는 티치아노만이 아니다. 시체가 누워 있는
모습은 만테냐의 그림인 <죽은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재산목록 200
번으로, 재산목록에는 '안드레아 만테냐의 귀중본'이라고 씌어 있었다.

1656년 9월, 렘브란트의 재산이 경매에 붙여지기 시작했다
골동품들이 팔려 나갔다. 미술품들은 1657년 세금으로 징수되었다. 채권자들 간의 견해 차
이로 몇 달 동안 아무것도 팔리지 않다가 1658년 2월 신트 안토니스데이크의 집이 1만
1,218길더의 가격으로 팔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돈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빚을 청
산하기에는 부족했다.
1658년 9월,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판화 모음집과 드로잉이 팔려 나갔다. 그리고 다
음과 같은 매각 광고가 실렸다. "화가인 렘브란트 반 레인의 재산이 상선회사와 상환불능재
산 처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당사자인 렘브란트 반 레인이 수집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거장들의 유명한 미술작품들을 매각함. 동시에 당사자인 렘브란트가 제작한 다수
의 드로잉과 스케치도 매각할 것임. 이 매각은 상기한 때에 이전 매각이 이루어졌던 칼베르
스트라트에 위치한 바랜트 얀츠 스휘르만의 여관 카이제르스크론('황제의 왕관'이라는 뜻)에
서 집행될 것임."
매각은 집행되었고, 모든 재산은 흩어졌다. 그러나 매각 총액은 겨우 600길더에 지나지 않
았다.















이제 자신의 소유가 아닌 신트 안토니스데이크의 빈 집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인 시
인 예레미아스 데 데케르의 초상화를 찬양하는 H.F.바테르로스의 시를 읽었다. 그는 파산과
악평, 소외를 근심했을까? 그는 파산했고 따돌림받았지만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제4장 은둔과 죽음

경매를 통해 모든 재산을 잃은 1658년에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한 점 제작했다. 신중하고
차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담은 이 초상화에서 그는 왼손에 지팡이를 쥐고 있다. 자기 확
신과 권력을 상징하는 것 같은 이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예술의 거울이었다
이것은 그의 최초의 초상화도 마지막 초상화도 아니었다. 그는 약 100여 차례에 걸쳐 유
화와 드로잉과 에칭화로 자화상을 제작했다. 이 점에서 그를 능가할 화가는 없다. 1625년,
그는 성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군중 틈에 자신을 그려 넣었다. 1626년에는 손에 하프를
쥔 모습으로(<음악모임>에서), 1665년에는 고대 화가인 제욱시스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
으로 자신을 그렸다. 근심에 찬 모습, 환희에 찬 모습, 상냥한 모습, 자신만만한 모습, 잘난
체하는 모습, 오만한 모습, 환멸에 지친 모습, 나이가 들어 얼굴에 살이 오르고 주름이 진
모습 등 그는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 노쇠가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의 초상화는 사실을 모
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넝마 같은 옷을 입었든 화려한 옷을 입었든 자화
상을 통해 그가 밝히려 했던 것은 고독이라는 주제였다. 그는 숨겨진 확실성을 찾아내 고독
에 저항하려는 절망적인 시도를 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자화상은 그가 지닌 화가로서의
야망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목록을 작성하듯 자신의 얼굴을 통해 표현이나 자세
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탐구하려 한 시도들이다. 또한 그의 자화상은 선언이다. 티치아노나
라파엘로의 그림에 대한 스스로의 판본을 창출한 결과였으며 이를 통해 렘브란트는 자신이
미술사의 이정표인 이 대가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의 자화상은 기도이기
도 하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가 매달려 있는 십자가를 세우는 것을 도와주는 죄인이나 혹
은 돌아온 탕아의 모습으로 그렸다.

렘브란트에게는 아직도 경제적인 문제가 계속되었다
1658년에도 렘브란트는 1653년에 얀 식스로부터 빌린 1,000길더의 돈을 상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빚의 채권자는 상인이자 수집가인 로데베이크 반 뤼딕으로 바뀌었다. 반 뤼딕은
3년 이내에 이자와 원금을 상환하고 거기에 덧붙여 보충배당금의 형태로 그림 한 점을 달라
고 요구했다. 렘브란트는 어떤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티투스의 상속분 문제를 제외하면 특별한 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에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한 몇몇 채권자들은 1647년에 책정된 티투스의 유산이 과대 평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증인이 소환되었다. 배심원들은 렘브란트가 <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를 그릴 때 초상화 값으로 100길더씩을 지불한 두 남자, 렘
브란트에게 루벤스를 구입한 반 뤼딕, 화가 필립스 코닌크, 은세공인 얀 반 로와 사스키아가
가지고 있던 보석의 설명서를 썼던 반 로의 아내 등에게 증언을 들었다. 배심원은 증언에
설득되었다.

1660년 12월 18일, 렘브란트는 마침내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의 집을 떠났다. 모든
재산이 팔렸고 빚은 청산되었다
1657년과 1658년에 자신의 드로잉과 에칭화 수집품이 매각되었던 카이제르스크론 여관에
서 렘브란트는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기능공과 상점 주인이 사는 요르단 구역의 로젠
흐라흐트에 위치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 집은 도시를 둘러싼 운하 세 개 중 가장
외곽에 위치한 카이제르스흐라흐트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1년 집세가 225길더인 이곳에서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2월 15일, 렘브란트는 공증인이 기재한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서는 티투스와 헨드리켸
가 렘브란트를 책임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렘브란트가 1634년에 가입한 예술가 연합인
성 누가 길드의 규율 때문에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산 때문에 렘브란트는 암
스테르담에서 어떠한 거래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채권자가 된 티투스와 헨드리켸에게 950길
더의 빚을 지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제작할 모든 유화, 드로잉, 에칭화
작품의 소유권을 티투스와 헨드리켸에게 양도했다. 이 양도는 그의 사후 6년까지 유효했다.
그래도 가끔씩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르트 데 헬데르도 그중 한 명이었다.
초상화 주문도 가끔 있었다. 당시 그린 야콥 야콥츠 트리프의 초상화는 마치 예수의 제자
중 하나를 그린 듯하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얼굴은, 예수, 성자, 라비, 남자, 여자 등 어느
것을 봐도 고독하고 심각하며, 렘브란트 자신의 심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작
품은 <성서>의 세계에 사로잡힌 신화와 꿈에 표현을 주려 했다.

암스테르담 시에서 색다른 그림을 주문했다. 네덜란드의 영광을 표현해 달라는 것이었

이것은 원래 렘브란트의 옛 제자 호바르트 플린크가 맡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플린크는
미완성 스케치만을 남긴 채 사망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로마와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네덜란드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네덜란
드인은 자신들의 투쟁을 타키투스가 묘사한 대로 로마인에 대항하는 바타비아(Batavia, 네
덜란드의 옛이름)인의 투쟁에 비교했다. 바타비아인이 로마인의 지배를 종식시키기로 결의
한 곳은 지도자인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연회장이었다.

1662년, 렘브란트의 그림이 완성되어 시청에 걸렸다
그러나 그림은 불과 몇 달 만에 떼어졌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는 다시 렘브란트
에게 돌아왔다. 대신 요리스 오벤스라는 사람이 다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플린크의 스케
치로 되돌아가서 키빌리스의 옆모습을 그렸다.
암스테르담의 시의원들은 렘브란트의 그림 가운데 어떤 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탁자
위로 뻗친 무기들 위에 떨어지는 빛이 키빌리스의 상실된 한쪽 눈을 드러냈던 까닭일까? 상
징적인 인물은 결함이 없어야 했다. 국민적 자부심이 손상을 입을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시위원들은 물감을 칠한 방식도 못마땅해했다. 팔레트 나이프의 거친 자국은 과시를 위한
그림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렘브란트는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사방 6m 정도로 잘라 버
렸다.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고객뿐만 아니라 미술애호가들까지 당혹스럽게 했다
렘브란트가 사망한 뒤 몇 년이 지나 1685년 프랑스의 작가인 앙드레 펠리비앙은 <가장
탁월한 고대와 현대 화가들의 삶과 작품>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
을 그렸다. 그의 방식은 대부분의 플랑드르 화가들이 채택한 지나칠 정도로 정교한 묘사와
매우 다르다. 예컨대 그는 넓은 붓질을 통해 두꺼운 물감층을 한겹 한겹 발라 나갔다. 물감
을 혼합하거나 부드럽게 하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취향이 바뀜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그
의 작품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18세기 초에 아르놀트 하우브라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언제나 그림들을 같은 방
식으로 제작했다. 나는 몇몇 세부는 최대한도로 세심하게 그리는 반면 나머지 부분은 마치
집을 칠하는 것처럼 형태에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칠해 버리는 그의 그림을 여러
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작업방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화가가 자신의 의도를
성취했을 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라 말하며 자신을 정당화했다." 이 말은 사실인
듯하다. 렘브란트가 작품을 제작한 방식이 고객의 욕구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것은 몇몇 그
림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우브라켄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의 초상화가 하도 두껍게 칠해졌기 때문에 인물의 코
를 잡아 그림을 들어올릴 수 있었고, 귀금속이나 진주목걸이, 혹은 터번에 새겨 넣은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그의 작업방식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멀리서 보면 매
우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주문이 들어오다
암스테르담 직물제조업자들은 렘브란트에게 그들의 길드 모임을 그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 집단초상화는 잘려진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보다 크기가 약간 작았다. 제목이 <직
물 제조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인 이 작품은 길드 본부에 걸릴 예정이었다. 이 그림은
검은 모자를 쓴 다섯 명의 남자가 양탄자로 덮인 탁자 주변에 모여 있고 비서 한 명이 뒤에
서 있는 모습이다. 가장 주의해 봐야 할 부분은 한 남자가 넘기고 있는 펼쳐진 책이다. 계산
을 맞추어 보고 있는 것일까? 렘브란트는 그들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있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들은 시선을 위로 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다. 누군가가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방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를 보는 것일지
도 모르겠다. 거의 감지하기 힘들지만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들의 시선과, 탁자에 부
여된 원근법을 통해 그들이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화가가 인물들을 올려다보며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인물들이 각각 1661년과 1662년 의류 검사위윈이었던 얀 비테르, 코르넬리스 에흐베르
트 모베르, 빌렘 반 레네벨트, 세르바스 델 카우르트, 얀 얀츠 아렌트뷔르흐인지, 혹은 같은
시기에 견본품을 감독하던 빌렘 반 도이엔뷔르흐, 볼케르트 얀스존, 야콥 반 론, 아르나우트
반 데르 미에, 요하켐 데 네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그림은 단지 개인들을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권위와 권력을 표현하고 있는 초상화이
다. 암스테르담의 시의원들은 렘브란트의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가 그들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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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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