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Anna
- 작성일
- 2025.6.3
이처럼 사소한 것들
- 글쓴이
- 클레어 키건 저
다산책방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에서는 소녀의 결핍, 두려움, 치유, 성장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는 주인공의 연민, 양심, 인간성에 대한 작가의 섬세한 표현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멀리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시내에서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자들은 매달 첫째 금요일에 아동수당을 받으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우체국에 줄을 섰다. 시골로 가면 젖을 짜달라고 우는 젖소들이 있었다
P.23
주인공 펄롱은 사생아라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놀림을 받았지만,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해 아이린과 결혼하고 다섯 딸과 함께 석탄과 장작을 배달하며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아간다. 그는 한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국 그 진실을 알 수 없게 된다. 이후 그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데 전념한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P.29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는 펄롱이지만, 그의 마음 한켠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삶에, 어쩌면 이제는 잠시 멈춰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P.44
그러던 중 펄롱은 장작 배달 중에 직업 여학교와 세탁소를 운영하는 수녀원에서 한 여성이 부당한 대우와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아내 아일린은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잖아”라며 선을 긋고, 식당 주인 미시즈 케호는 수녀원과 등을 지면 좋을 게 없다며 관여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119
과연 펄롱은 평온한 가족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침묵할까? 아니면 모든 걸 잃을 각오를 하며 진실을 드러낼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만큼의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펄롱의 독백에서, 『맡겨진 소녀』의 마지막 대사가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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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