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의 서재(수리중)

흙속에저바람속에
- 작성일
- 2023.7.28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 글쓴이
- Ryuichi Sakamoto 저
위즈덤하우스
어느 예술가의 길고도 짧은 인생 이야기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를 읽고
올해 일본의 예술가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작가 오에 겐자부로와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그들이다. 두 사람 모두 그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나만(?) 몰랐던 두 사람의 삶과 작품 세계를 이제라도 발견하고 싶었다. 봄에는 소설을 통해 오에 겐자부로를 알아갔었다면, 여름은 류이치 사카모토를 만날 차례였다. 둘은 닮은 점이 많다. 동시대를 살면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 인물들로서 뒤늦게라도 그들을 알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 크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삶과 음악에 관해 이야기한 신작이자 유작이다. 정확히는 2009년에 출간된 전작이자 데뷔작인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그후부터 최근까지 그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처음 책제목을 보자마자 언젠가 어느 책에서 마주했던 문장과 겹쳐졌다. '나는 이제 몇 번의 계절을 또 만나게 될까?' 인생의 후반전에서 걷고 뛰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멈춰섰을 때 달처럼 떠오르는 물음이 아닐런지 생각했다. 책을 펼치면 곧 이에 대한 답을 짐작할 수 있다. 2014년에 중인두암을 발견한 후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류이치 사카모토, 그가 젊은 시절에는 크게 와닿지 않았던 '폴 볼스의 말(타자의 말들_삶의 끝을 엿본 사람의 말_링크 바로가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이 「보름달」이라고 한다. 그는 물론, 그의 작품들도 익숙하지 않은 터라 예상과 다른 전개가 펼쳐진 「보름달」을 들으면서 어쩌면 내가 상상했던 음악가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과연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그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그리게 될까' 하는 기대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frameborder="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AlxUUNU_0o8" title="YouTube video player" width="560">>
<출처 : "Fullmoon"-Ryuichi Sakamoto, https://youtu.be/AlxUUNU_0o8>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2017년 발표한 앨범《async》에는 「fullmoon(보름달)」 이라는 곡을 실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볼스의 한 구절을 영화 속에서 따와 샘플링한 다음, 같은 문장을 중국어와 독일어, 페르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 각 언어의 원어민 아티스트들에게 낭독하도록 했습니다.(14쪽)
이따금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볼 때면, 중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면서 처음으로 자금성을 찾었던 추억이 자동 소환된다. 영화의 무대이자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고 거닐면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떠올리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를 통해 늦었지만 참 다행스럽게도 이제부터 몇 가지 더 기억해야할 것들이 생겼다. 영화 음악을 담당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류이치 사카모토이며,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게 들었던 곡의 제목이 「Rain」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영화를 감독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작품에서도 함께 영화 음악을 만들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베르톨루치 감독이 죽기 전까지 이어지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이 「보름달」에서의 목소리 출연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frameborder="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qaW2nFbV80U" title="YouTube video player" width="560">>
[출처 : "Rain"-Ryuichi Sakamoto, https://youtu.be/qaW2nFbV80U]
이것이 청나라가 막 시작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니,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그린 영화 <마지막 황제>와 쌍을 이루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239쪽)
지난 달 북클러버 모임에서 김훈 작가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동명의 영화를 다시 보았다. 조선시대 병자호란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에 대하여 넷이서 소감을 나눌 때까지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1987년작)』와 『남한산성(2017년작)』의 연결고리가 바로 류이치 사카모토임을.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청나라의 시작과 끝을 다룬 두 영화의 음악을 같은 사람이 맡았다는 사실이 퍽 흥미롭다. 『마지막 황제』의 「Rain」이 제목처럼 비가 '내리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면, 『남한산성』의 「삼배구고두례」는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는 모습을 표현한 곡이다. 두 영화에서 내리막길을 걷는 푸이와 인조를 '하강'의 이미지로 그리는 데 한몫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frameborder="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yHzL06gFhWI" title="YouTube video player" width="560">>
[출처 : Ryuichi Sakamoto - 삼배구고두례 (남한산성 ost), https://youtu.be/yHzL06gFhWI]
2014년 뉴욕에서 암 치료를 위해 1년간 서양의학과 대체의학을 오가던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듬해 1개월간 하와이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받은 대체의학 치료의 효과가 어떻다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하와이의 바람만은 최고였다고 그는 확신한다. '에너지의 흐름(energy flow)'이라는 제목을 보고 문득 빛, 열, 전기, 바람 등 다양한 에너지가 떠올랐다. 이것에서 저것으로 오가는 에너지의 역동적인 이미지가 그려졌다. 그러나 직접 곡을 들으면서 "늘 '치유'라는 말을 탄압했고, 내 입으로는 절대 그 말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어왔다(198쪽)"는 그의 말이 역설적으로 다가왔다. 다분히 차분한 곡에 대한 감상평을 '치유'란 말을 빼고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찌됐든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돌보기 위해 그의 음악을 찾으리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frameborder="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btyhpyJTyXg" title="YouTube video player" width="560">>
[출처 : Ryuichi Sakamoto-Energy Flow, https://youtu.be/btyhpyJTyXg]
광고 음악으로 쓰인 「energy flow(1999년작)」가 저의 의도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힐링 뮤직'으로 호평을 받았을 때, 저는 온몸의 털이 삐죽삐죽 서는 기분이었습니다. (···) 치유의 교주 같은 이름으로 저를 칭송하는 것도 난처하기만 했습니다. (···) 그로부터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병에 걸린 몸으로 하와이의 바람을 맞으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치유'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198쪽)
하와이에서 요양을 마칠 즈음해서 건강을 되찾은 그는 본연의 일로 복귀한다. 그중 하나가 영화 『레버넌트』의 음악 작업이었다. 곰에게 사지가 찢기는 공격을 당한 주인공이 처절한 생존 본능으로 귀환하는 내용의 영화답게 부제가 '죽음에서 돌아온 자'다. 책에서 언급된 바는 없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암투병 끝에 일상으로 돌아온 류이치 사카모토도 이같은 마음과 새로운 각오로 영화 음악을 제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 자신도 힘든 여정이 될 것임을 직감했으나 영화 제작을 맡은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을 줄곧 눈여겨 보고 있던 터였다. 그런 그가 마음을 굳히는 데에 그의 파트너가 건넨 무자비한 말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밝힌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이냐리투 감독한테 직접 음악을 부탁 받는 사람이 몇 명이 될 거 같아? 암이 재발해서 죽어도 좋으니까 그냥 해.(203쪽)"
<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frameborder="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Czv8J1W4yYU" title="YouTube video player" width="560">>
[출처 : Ryuichi Sakamoto - The Revenant Main Theme, https://youtu.be/Czv8J1W4yYU]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 무심코 반짝이는 점과 점을 이어 별자리를 그리곤 합니다. 실제로 그 별들은 몇 만 광년씩 떨어져 있을 텐데, 마치 같은 평면상에 있는 것처럼 인식해버리죠. (···) 『레버넌트』의 메인 테마를 예로 들자면, 시작할 때 울리는 그 두 개의 음만으로도 우리는 의미를 느낀다는 것입니다.(224쪽)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류이치 사카모토는 자타공인 빼어난 음악적 성취를 이뤘음에도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산을 향한' 행보를 이어간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무기로 환경, 사회 등 여러 영역에서 활발한 운동을 펼친 것이다. 삼림보전단체 '모어 트리즈(More Trees)'를 이끌었으며,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어린이 음악 재생 기금',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창립하였고, 온라인 연주회를 열어 코로나 사태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특히 그에 따르면 여전히 일본은 예술가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부담감과 거부감이 공존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회를 향해 탈원전, 미군 신기지 건설 반대 등 소신 있는 목소리를 아끼지 않은 그를 보면서 예술가 이전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하는지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설령 위선자라는 비판을 받는다해도, 그로 인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싶어서요. 환경에 관한 운동도, 지진 재해 후 활동도 이런 신념의 힘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한번 연결되면 쉽게는 그만둘 수 없죠.(330쪽)
몇 년의 시간 동안 수차례 비바람을 맞으며 도장도 다 벗겨진 지금은 점점 본래의 나무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어떻게 썩어갈 것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나이 먹어가야 하는가, 하는 것과도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345쪽)
2015년, 그는 하와이에서 요양을 마치고 당시 매입한 중고 주택에 있던, 만들어진지 100년 가까이 된 피아노를 뉴욕으로 가져 왔다.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실험'의 일환으로 그것을 마당에 놓아뒀다고 한다. 자의는 아니지만 피아노로 변신해서 사는 나무가 본래 자연에서 왔다는 발견에 새삼 한 번 놀라고, 피아노의 쓸모가 다해 버리는 게 아니라, 자연으로 다시 돌려보내고자 하는 발상의 전환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자연에서 온 인간도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을 인정하면 좋을 텐데, 여전히 그렇지 못한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frameborder="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dWrCs6gNAIY" title="YouTube video player" width="560">>
[출처 : 20220404, https://youtu.be/dWrCs6gNAIY]
수록곡이 열두 곡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지만, 이 숫자는 최근 제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 지금까지 발표해온 다른 오리지널 앨범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이 앨범은 어떤 확고한 콘셉트를 토대로 제작된 것이 아닙니다. (···) 지금의 저에게는 이처럼 어떠한 계획도 없이 만들어진 날 것 그대로의 음악이 더 만족스럽게 느껴집니다.(344~355쪽)
대개 창작자와 대중은 낯선 무언가에 대해 하나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한평생 류이치 사카모토가 남긴 음악들은 무언가(無言歌), 즉 자신과 타자의 세계를 향한 '말 없는 노래'라고 볼 수도 있다. 삶의 끝에 다다른 그가 마지막으로 선보인 앨범 『12』는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익히거나 숙성시킨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날 것의 음악이라고 소개한다. 쇠약해진 몸으로 예전과 같은 작업량을 소화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제는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본인이 만들어내는 음악에 자족할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으로도 읽혀졌다. '마치 일기를 쓰듯 그 스케치를 기록한(353쪽)' 열 두 곡의 이름은 그가 레코딩한 날짜라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와닿았던 2022년 4월 4일에 녹음한 곡을 연주하는 그를 상상했다. 그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그의 마음은 어떠했으며,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Ars longa, vita brevis.)
그것들을 책에 쓰여진 그의 마지막 문장으로 어렴풋이 짐작해볼 따름이다. 여태껏 알고 있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의 앞뒤를 바꿔 곱씹어보니 색다르게 느껴진다. 예술가의 목숨이 다하더라도 그가 남긴 예술작품은 오랜 영감과 감동을 전해준다는 믿음과, 예술활동을 충분히 하기에 인생은 턱없이 짧다는 아쉬움. 현재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감정이리라. 책을 덮으며 71세의 길고도 짧은 생을 살다간 류이치 사카모토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 자신의 일생을 통해 몸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일찍부터 그를 좋아한 이에게는 그를 애도하고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을, 나처럼 그를 잘 몰랐던 사람에게는 자유인 류이치 사카모토와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는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가 많은 독자들에게 가닿길 바란다.
[리뷰 속 부록] 책속에서 보름달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책표지를 벗기면 까만 밤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볼 수 있다. 문득 소설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 속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두 번째, 쪽 번호가 적힌 가운데를 보면 달이 차고 기우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편집자분과 북디자이너분의 디테일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차례대로 페이지를 넘기면 달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과연 독자는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혹시라도 출판사 관계자분께서 아래 영상을 보시고 저작권 등 문제의 소지가 있을 시 본 리뷰에 댓글 또는 예스블로그 쪽지로 일깨워주시면 해당 영상을 즉시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frameborder="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ijByCtnMtxI" title="YouTube video player" width="560">>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좋아요
- 6
- 댓글
- 1
-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