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속에저바람속에
  1. ㄴ세계문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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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표기
시티 픽션 : 도쿄
글쓴이
다자이 오사무 저
창비
평균
별점9 (4)
흙속에저바람속에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짧아 읽어 독자여



<시티 픽션 : 도쿄>를 읽고



 



 



  <시티 픽션 : 도쿄>는 『인간 실격』으로 잘 알려진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들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소설 네 편의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 여성의 시선으로 누군가의 하루 혹은 인생의 한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동안 알고 있던 작가 특유의 우울감, 좌절감보다는 유쾌함을 넘어 발랄함까지 느끼게 한다는 점이 퍽 흥미롭다. 『인간 실격』만 읽은 독자에게는 작가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큼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지도 모르겠다. 작품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서 소설 속 분위기의 변화뿐 아니라, 무엇보다 남성 작가가 어떻게 여성의 심리를 이토록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 확인해보자. 



  「여학생」은 어느 10대 여학생이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 하루 동안 일어난 거의 모든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치 소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하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브이로그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인물과 사물 그리고 자연에 대한 감상을 좇아가다 보면 사춘기 소녀만의 감수성과 더불어 재치있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의외성이 귀엽기도 하고, 자신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들로 자기 머릿속을 채우는 '나'가 애늙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면서 바라본 ‘눈’은 크기만 하지 매력 없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가도,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상을 차리기 전에 다시 보니 ‘아름다운 저녁 하늘을 오랫동안 쳐다봐서 이렇게 예쁜 눈’이 된 건지 되묻는다. 그의 말처럼 정말 “여자의 좋고 싫음은 너무나도 엉터리인 것 같다(21쪽).” 데카르트의 명언을 몸소 실천에 옮기기라도 하듯 연신 갈팡질팡함에도 어느 순간에는 삶에 대한 통찰마저 느껴지게 하는 ‘나’의 생각들로 미루어 짐작해본다. 사춘기에 접어든 그에게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두 해 전 겪은 아빠의 ‘죽음’이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아빠의 부재로 남겨진 엄마에게 착한 딸이 되고, 주위 사람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아서 괴롭고 외롭고 슬프다고 토로하는 '나'.



  이렇게 혼란스러운 자신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성장하는 육체에 대해 당혹스럽게 여기는 그를 보면서 불현듯 다자이 오사무가 왜 이 소설을 썼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작가는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인간 실격』의 요조처럼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기에, 비록 몸은 성숙한 어른이 되었지만 삶을 대하는 마음과 정신은 미성숙하여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하였기에 '여학생'의 입을 빌려 독자에게 되묻고자 한 것은 아닐까? 혹은 사춘기 시절에 작가 나름의 답은 찾았지만 살아가면서 그것을 놓치거나 잊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어른의 쓴 맛을 보고부터는 애써 그때 깨달은 것들을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무튼, 늦지 않게 다시 「여학생」을 만나 이 문제에 대한 얘기를 나눠봐야 할 이유는 알게 된 듯하다.



 




이제 곧 어른이 되면, 우리의 괴로움과 외로움은 우스운 거였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추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완전히 어른이 되기까지의 그 길고 짜증나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74쪽)




 



  「아무도 모른다」는 도쿄생활자로 마흔한 살이 된 야스이 부인이 스물세 살을 맞이한 해의 어느 봄날 밤에 일어난,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비밀스러운 사건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의 말처럼 아무도 모르는, 현재의 독자에게만 털어놓는 ‘공공연한’ 비밀인 셈이다. 지난 이십 년 동안 크고 작은 변화의 물결을 맞이한 도쿄에서 물고기처럼 살아온 그는 학창시절의 친구인 세라카와의 추억을 건져 올린다. 서로 다른 성격, 가치관, 문학 감수성을 지닌 두 사람의 추억 속 한 편에 세리카와의 오빠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오래 전 그날에 야스이 부인에게 충동적인 행동을 유발시킨 장본인으로서 사건의 그날 밤, 여동생이 가출했다면서 혹시 행방을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 집 앞에 온 것이다. 야스이 부인은 짐짓 아는 바가 없다며 그를 떠나보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에 홀린 듯 그를 찾아 밖으로 달려 나간다. 거리를 헤매며 마음 속으로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겠노라 되뇌지만 끝내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야스이 부인은 본인도 왜 그랬는지, 무엇이 자신을 그렇게 충동적으로 만들었는지 세월이 흘러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쩌면 한밤의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며 독자에게 다시 한 번 비밀을 지켜달라고 당부한다. 만약에 스물세 살이었던 해의 3월말 밤 10시(는 정확히 기억하면서 그날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다니!)에 그와 재회했다면 두 사람은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았을까? 인간이 이성과 감성 사이를 수없이 오가는 존재임을 모르지 않기에 어느 정도 공감이 들다가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이 독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난다. 세라카와의 오빠는 지금도 야스이 부인의 집 근처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주문한 빵을 배달하고 있다.



 



  「눈 오는 밤 이야기」는 두 눈, 즉 ‘눈(雪)’과 ‘눈(目)’을 소재로 하여 도쿄 외곽에 사는 한지붕 세식구가 풍족하진 않지만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일상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무명의 소설가 오빠, 새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슌코가 어느 눈 오는 밤에 집으로 오다가 숙모로부터 받은 오징어를 잃어버리게 된다. 곧 조카를 출산할 새언니의 입이 심심하지 않도록 선물로 주려고 했던 오징어를 찾기 위해 슌코는 가던 길을 되돌아간다.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눈이 내리고 예전에 오빠가 들려준 얘기가 떠오른다.



  “사람의 눈동자는 풍경을 담을 수 있다고 언젠가 오빠가 가르쳐주었어요. 잠시 동안 전구를 응시한 다음 눈을 감으면 눈꺼풀 속에 전구가 똑똑히 보일 거야. 그게 바로 증거야. (105~106쪽)” 그래서 슌코는 오징어 찾기는 그만두고, 새언니에게 전해줄 아름다운 경치를 두 눈 가득히 담아 집으로 돌아온다. 새언니에게 그 사정을 전하는 가운데 짓궂은 오빠가 끼어들며 슌코보다 오래 살아서 깨끗한 것을 더 많이 보아온 자신의 눈이 더 낫지 않겠냐고 묻는다. 슌코와 새언니의 기발한 응답에 둘은 웃고, 오빠는 시무룩해져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소설가다운 오빠의 상상력 못지않게 다른 두사람의 대거리도 한가족답다는 생각과 함께, 세 사람에게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미를 맡은 건 독자뿐일까?



 



  「화폐」의 화자는 사람이 아닌 사물, 즉 백엔짜리 지폐 77581호이다. 작가가 단어에 성별을 부여하는 외국어의 특성에 착안하여 일본어인 화폐를 여성명사로 가정하였기에 그 또한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독자의 어린 시절에 지폐에 대한 인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진다. 구겨진 데 하나없이 빳빳한 것과 닳고 헤져서 아무렇게나 꼬깃꼬깃 접어서 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것. 전자는 명절에 어른들에게 받는 돈이고, 후자는 동네 문방구나 슈퍼마켓에서 거슬러 받은 돈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도쿄의 한 은행에서 새 돈으로 태어난 77851호 역시 헌 돈이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젊은 목수의 손을 잡고 처음 은행 밖으로 나와서 그의 집에서 신주 모셔지듯 애지중지 여겨진다. 하지만 그날밤 목수 부부의 싸움이 발발하고 다음날 목수의 아내에 의해 전당포에 맡겨진다.



  그 후 그는 많은 사람들, 대부분 암거래상들의 손을 타며 온몸에 잡힌 주름만큼이나 우여곡절을 겪는다. 전쟁통에 한 군인 아저씨의 호주머니 속에서 지내며 염세주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군인과 술 시중을 드는 여인 그리고 여인의 아기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지켜 보면서 그는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문득 만약에 77581호가 독자의 지갑 속 아니, 스마트폰 속 어플에 입력된 디지털 숫자를 본다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이라는 동류가 아닌 지폐라는 사물을 통해 인간 세상을 바라본다는 설정이 '참신'하지만, 누가 들여다보든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어서 참 신맛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티 픽션 : 도쿄>에 실린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짧기에 일독해보시길 바란다, 독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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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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