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단 서평

산바람
- 작성일
- 2018.12.27
단박에 조선사
- 글쓴이
- 심용환 저
위즈덤하우스
단박에 조선사
심용환
위즈덤하우스/2018.12.19.
sanbaram
‘우리나라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시험과목으로 공부한 기억 외에 제대로 된 공부를 한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특히 암기과목으로 인식된 역사는 공부의 당위성을 시험 이외에서 찾기 힘들다.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인식과 식민사관에 경도된 역사학계의 주체사관확보가 안 된 상태에서 우리의 역사는 푸대접을 받아왔다. <단박에 조선사>는 이런 병폐를 극복하고, 재미있는 역사, 과거를 거울로 하여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저자는 1996년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학과에 입학하여 15년간 대학생 인문학 공동체 ‘깊은 계단’을 이끌었고, 현재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단박에 한국사-근대편>, <단박에 한국사-현대편>, <역사전쟁>,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 토크> 등이 있다. 팟캐스트 <심용환의 역공>을 진행하고 있다.
<단박에 조선사>는 고려 말 공민왕의 개혁과 정도전의 혁명을 시작으로, 조선 후기 정조와 실학자들의 도전, 그리고 세도정치라는 처참한 결말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나라의 부마로 어렵게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몰락의 원나라로부터 독립된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개혁정치를 시도했으나, 정책의 구체성 부족과 측근정치의 병폐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흔다섯의 나이에 암살된다.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목표로 조선은 출발한다. 세종은 조선의 성군으로 불리며 국가의 기틀을 완성하면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기지만, 주자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선조와 인조의 무능으로 임진전쟁과 정유전쟁, 병자전쟁 등을 겪게 되지만, 백성을 버리고 자기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해 한다. 백성들의 생활은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졌지만,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극진히 섬기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지 못하고, 양반과 일부 관료들을 위한 나라로 변모해간다. 이황과 이이 같은 훌륭한 학자가 나타났지만 그들 역시 성리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조와 정조가 중흥의 기운을 보여주지만 그들 역시 양반과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국가의 유지에 몰입하였을 뿐이다. 중국인들로부터 오랑캐라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오히려 청나라를 오랑캐 나라로 치부하는 아전인수격의 조선 선비들은 소중화 건설에만 매진하며 예송논쟁 등으로 쓸데없는 정쟁만 일삼았을 뿐, 발전하는 세상의 시류를 외면한 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도전은 바로 그 맹자가 강조한 역성혁명 사상을 받아들여서 문자 그대로 ‘왕씨의 나라’를 ‘이씨의 나라’로 바꾸려고 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민본국가를 만들려고 한 거죠. 결국 그의 기획대로 새로운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이 등장하게 되고요.(p.37)” 그러나 뜻을 이룬 뒤 그를 제거한다. 태종은 정도전의 후손들을 서인으로 폐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복권시킨다. 그래서 후손들은 태종 당대부터 벼슬을 했으며, 증손자 정문형은 세종 때 문과에 합격한 후 판서의 자리까지 올랐고 세조 때는 우의정까지 하였다.
“‘훈민정음’, 한글을 창제하죠. 한글 창제에는 여러 목적이 있으나 ‘백성이 글을 읽을 줄 알아서 스스로 법을 알아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는’교화의 기능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는 점이 실록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요.(p.77)” 국가의 전성기에 지도자의 최고 목표가 ‘영토확장’ 같은 파괴적 신념이 아니라 ‘문화국가’였다는 사실, 만약 우리가 이에 관해 긍지를 느끼고 외국인에게 자랑하고자 한다면, 결국 자랑의 본질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 ‘남들보다 우수한’과학적 언어라는 점보다는 한글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사회문화적 변화와 혁신’일 것이라고 말한다. 측우기도 ‘세계적으로 대단한 수준’의 천문 기구라기보다는 ‘농업 발전을 위한 매우 구체적인 정책의 결과물’로서의 가치가 더욱 대단할 것이라고 한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제대로 된 지방 통치는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애초에 고려는 지방 호족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관료가 파견되지 않은 현들이 많았고 지위는 세습되었죠. 하지만 조선은 통치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요. 조선은 과거시험으로 관료를 배출했고 이들이 지방관으로 파견됐어요. 수령은 국왕의 대리자로서 해당 지역의 행정권부터 군사권까지 일체를 관장합니다.(p.171)” 파견된 수령은 유향소와 향리의 도움을 받아 지역을 다스렸다. 유향소는 쉽게 말해 지역 유지들의 모임이다. 조선 후기에는 향청(鄕廳)으로 불렀는데 수령의 자문과 보좌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향리는 수령의 수족이 되어 실무를 담당했다.
“유교는 우리에게 마냥 호감 넘치는 종교나 사상이 아닙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나치게 가부장적이고 여성 억압적이죠. 위계질서와 명분을 강조하고 실용적이거나 현실적인 문제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신분 질서를 합리화하거나 허례허식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강하기도 합니다.(p.184)”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형식이나 예의범절을 강조한 나머지 고유한 개성이나 자유분방한 문화와 충돌하는 측면도 강하다. 더구나 이런 병폐가 극적으로 강화된 가운데 세계사적인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데다, 일제시대의 권위주의적인 문화와 엉키면서 나쁜 것들만 오늘날까지 계승된 측면도 있다. 제사 문화를 두고 기독교와 충돌한 것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포로들은 포르투갈인이 가져온 철포, 비단, 담배 같은 물건과의 교환수단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답니다. 스타이첸의 기록에는 조선인 포로 덕에 노예무역이 크게 발전했다는 내용이 있고, 우라가와 와사부로에 따르면 마카오, 마닐라, 인도,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도 조선인 포로들이 넘쳐날 정도였다고 합니다.(p.309)” 임진전쟁과 정유전쟁 때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백성들이 노예로 팔려 갔다는 이야기다. 이런 사실을 학교의 역사교육에서는 얼마만큼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 당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서양신부들의 계산에 따르면 1594년 3월부터 10월까지 나가사키 항구와 토키쓰, 콩가, 꼰꾸리로 불리는 세 곳의 수도원에서 12,365명이 고백성사를 봤으며 900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를 사대의 나라로 섬기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소중화’를 표방하면서 명나라를 계승했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김상헌을 비롯하여 삼학사 등은 조선 후기 가장 충절어린 인물로 기려진답니다.(p.372)” 전쟁의 패배 앞에서 핏대를 올리며 흥분하는 것 외에 무엇 하나 이렇다 할 행보를 보여주지 못한 인물들. 그것도 자기 나라가 아닌 중국의 한 왕조인 명나라를 향해 절의를 드러낸 인물들을 기리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이 정상적인 것인가 묻고 싶어진다.
“조선에서는 향약의 보급이 대단한 성공을 거둡니다. 조광조가 중국의 향약제도를 수용하자고 주장하였고, 이황이 예안 지역에서 향약을 실시했으며, 이이가 해주 지역에서 향약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하거든요. 한국형 향약이 완성되면서 성리학의 토착화, 민중화가 진행된 겁니다.(p.471)” 향약의 토착화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까진 없을지 몰라도 ‘다른 생각’의 여지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민란이 잘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나더라도 대부분 경제적 곤궁함을 호소하는 수준이었으며, 민란이 질적인 사회 변동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배층과 같은 생각을 하는 피지배층의 저항은 결국 목적 없는 투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일어난 실학도 성리학의 조선을 해체하지 못했고, 해체할 의사도 없었다는 것이다. 여러 자잘한 변화는 있었지만 조선 건국 초기에 형성된 성리학적 세계관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강고하게 자리를 지켰다.
“‘조선은 국왕과 양반 관료의 나라’였지요. 하지만 매번의 국왕은 세종 이하의 수준에서 일을 그르치거나 허우적댔습니다. 이른바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시대라고 평가받는 영조나 정조 역시 세종이라는 모델에 부합하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류성룡, 정약용 등과 같이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훌륭한 선비들이 각자의 시대에 활약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 또한 영조와 정조가 세종의 옷을 입으려 한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면 지나친 폄하일까요?(p.516)” 조선에서의 성리학 심화 과정은 지배층에서 말단 노비까지 모조리 유교적인 세계관으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농민 반란이 반복 되면서 민중 봉기의 의미가 확대되고, 부르주아지 등 새로운 계층의 탄생이 혁명으로 이어지는 등 역사의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퇴보하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생활화 한 결과, 스스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자유를 위한 투쟁도 주체적으로 하지 못하는 노예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전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드러났던 ‘혼일의 정신’을 기억하며 남북관계,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라는 문제, 동아시아 평화 같은 여러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겠습니다. (p.522)” 이렇게 말하며 역사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시선을 이해할 때 훨씬 품위 있고 가치 있는 배움의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우리 역사 공부가 재미없으며 배워야 하는 당위성이 이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우리의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길러 현실 문제를 개선시키는데 앞장설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리뷰는 예스24를 통해 위즈덤하우스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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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