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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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 서울편 3
글쓴이
유홍준 저
창비
평균
별점8.9 (165)
산바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



서울편 3 사대문 안동네



유홍준



창비/2022.10.25.



sanbaram



 



서울의 사대문 안동네와 북한산 답사한 내용을 실은 것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이다. 저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함께 기록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옛날 추억을 더듬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양의 진산인 북악산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서쪽 지역인 서촌과 그 뒷산인 인왕산을 소개하고, 이어서 옛날 정취가 많이 남아 있는 북촌을 소개한다. 외국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사동의 정취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한산을 소개 하고 있다. 저자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추사 김정희>등 다수가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은 함께 출간된 강북과 강남 : 한양 도성 밖 역사의 체취편과 앞뒤로 짝을 이루고 있다고 소개한다. 1993년 서울시 정도 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 조사했다.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 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서울시민 1,100만 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3,583명에 불과 했다.(p.59)”고 한다. 그러니 저자 또한 서울토박이의 한사람으로 자긍심을 가질만하다 생각 되었다. 먼저 일제를 거치고 청와대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의 후원 서쪽 칠궁과 맞닿은 곳에는 경농재와 팔도배미라는 논이 있다. 임금이 해마다 봄이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 경농재에 거동하여 각 도에서 올라온 곡식의 종자를 팔도배미에 심는 친경 행사를 치렀다.(p.34)”고 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던 조선 시대에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논을 팔도를 상징하는 8개로 나누어 그 지역을 대표하는 곡식의 종자를 심었다니 나름대로 의미가 컸다 생각된다. 이어서 서울 사대문안 동네의 특징 중 몇몇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길에 있고 그 골목엔 역사 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 끝에는 유적지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인왕산이라는 아름답고 듬직한 산이 받쳐주고 조금만 올라가도 명승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과 가치가 더해진다.(p.106)”고 서촌의 특성을 설명한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후궁들은 궁궐 밖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궁이 계속 지어졌다. 그러다 그 후궁이 죽으면 폐궁되기도 하고 다음 왕들의 후궁이 들어와 살기도 하여 각 궁의 내력은 아주 복잡하다고 한다. 옥이동은 경복궁과 가까워 일찍부터 궁들이 여럿 들어와 세종대왕 후궁을 위한 자수궁, 문종의 후궁을 위한 수성궁, 정조의 후궁 경우궁 등이 있었다고 한다. 서촌 오거리 길들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그것은 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난 것이 좋다고 한다. 그전에는 집만 보았지 길의 특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늦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사동 길 역시 S자로 휘어 있어 인간적인 체취가 이 자연스러운 길에서 나온다는 것이라고 한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남인, 북인 삼색이 섞여 살았다.(p.154)”고 한다 그런데 현재 북촌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산 것은 도심과 가까운 이점이 있을 뿐 아니라 북촌에는 일본인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대대적으로 서울로 이주해와 서울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을 때, 이들은 주로 충무로와 회현동 일대의 남촌에 자리 잡았다. 북촌 한옥 밀집지구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옥 밀집 지구의 풍경은 일제시대 정세권의 건양사, 김동수의 공영사 등 도시 한옥의 대량생산을 주도한 건축업자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북촌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북촌8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촌 8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 공방길 :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이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 경복궁, 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p.152)



 



재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참살하면서 흘린 피가 내를 이루므로 동네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있던 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서 잿골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명으로 재동이라고 표기된 것이라고 한다.(p.163)” 재동초등학교는 1895810일에 개교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초등학교이다. 첫 번째는 경운동의 교동초등학교로 18949월에 관립교동왕실학료로 개교하여 왕실 종친과 귀족 자제들만 입학 대상으로 했으나 이듬해부터 일반인 학생도 입학을 허가했다. 북촌 고개 중에서 맹현은 고개다운 고개여서 여기는 가회동과 삼청동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맹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대단히 아름다워 북촌 8경 중에서 4경부터 8경까지가 모두 이 주위에 모여 있다.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북촌 8경을 거닐다보면 한옥밀집지구 옆 동네에는 금박연, 전통공예체험관, 한옥협동조합, 전통 발효공방, 누비공방, 매듭공방 등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한옥들이 많다. 이는 서울시가 한옥 30여 채를 보유하여 공공건물과 전통 공방으로 대여해준 것이다. 계동에 있는 북촌문화센터는 계동마님댁이라는 번듯한 한옥을 매입해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는 인사동이다. 세계의 수도에는 한결같이 연륜을 자랑하는 독특한 문화예술 거리가 있다. 베이징의 유리창은 고미술품 상가로, 도쿄의 간다는 고서점 거리로, 뉴욕의 소호는 화랑가로,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는 문학인들이 드나들던 카페로, 모스크바의 구아르바트는 유서 깊은 건물에 기념품 가게가 가득한 차 없는 거리로 유명하다. 이에 비할 때 서울의 인사동은 그 모두가 한곳에 모여 있는 전통문화 거리다.(p.201)”라고 인사동을 소개한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태화관 건물은 3.1운동 2개월 뒤인 5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어서 6월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도 화재로 불타버렸다. 일본경찰은 실화라고 발표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일제의 방화에 의한 것으로 의심했다. 보성사 터 인근 수송 공원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손에 쥐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입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43, 간송은 한남서림을 인수한 덕분에 마침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국보 중의 국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때 중개상은 값으로 1천원을 요구했는데 당시 1천 원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이에 간송은 이 작품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라며 내가 그 10배인 1만 원과 자네 수고료로 1천 원을 얹어줌세라고 하고는 11천원을 지불했다(p.219)”고 한다. 한남서림은 1959년에 매각되어 현재 그 자리에는 명신당필방이라는 문방사우 전문점이 들어서 있다.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 문화재는 100년 이상 된 유적, 유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대신 서울시는 100년은 못 되었지만 미래에 전달할 가치가 있는 50년 이상 된 근현대 건물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해 보호하고 있다.(p.235)” 인사동에서 서울에서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노포로는 통문관, 통인가게, 선천집, 수도약국 등이 있다. 민예품 가게들은 인사동길 대로변에서 밀려나 인사동 10길을 비롯한 샛길에 흩어져 있지만 인사동의 저력은 여전해서 2020인사동 문화축제팜플릿에 실린 민예품 가게를 헤아려보면 30여 곳에 이른다. 1980년대의 고미술상과 화랑 들이 거의 다 인사동을 떠났고 대안 공간으로서 그림마당 민이 간판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술 거리로서 인사동의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동산방화랑, 선화랑, 노화랑, 관훈미술관, 백악미술관, 경인미술관, 가나아트 등 자가 건물을 갖고 있는 화랑과 전시장 들은 지금도 건재하며 미술 거리로서의 권위와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인사동길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해온 발자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0년대는 고서점, 1970-1980년대는 화랑과 고미술상, 1980-90년대는 전총찻집과 카페, 2000년 이후는 쌈지길과 관광 거리.(p.271)” 최무규의 쌈지길 건물은 새로 인사동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관광객과 젊은이들을 받아들이는 공간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쌈지길 건물의 기본 개념은 기존 인사동길을 4층 건물 안에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고만고만한 가게들(70여 곳)이 최대한 많이 입주할 수 있도록 1층에서 옥상까지 연속적으로 연결된 공간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마치 500미터 길이의 인사동길을 말아 올린 것 같이 디자인해 사람들이 1,2,3,4층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25도의 낮은 경사로를 따라 편안하게 상가 앞을 걷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고 설명한다.



 



숙종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뒤 이를 한양도성과 연결하기 위해 향로봉에서 홍제천 골짜기를 거쳐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이르는 약 4킬로미터의 탕춘대성을 축조하고 홍지문을 세웠다.(p.315)” 이로써 한양은 전란에 대비하여 남한사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강화도의 강도성으로 수도권 외곽의 산성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더 이상 한양까지 침범해오는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추사는 무학대사비나 도선국사비라고 전해오던 것을 신라 진흥왕 순수비로 재발견했다. 그는 북한산 순수비 측면에 이 비가 진흥왕 순수비이고 이를 두 차례 찾아와 고증했음을 다음과 같이 새겨두었다.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이를 통해 추사의 식견과 진흥왕 순수비의 가치를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순수비는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모사품을 옛 자리에 세워놓고 그 전말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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