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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여부
- 작성일
- 2014.10.18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 장만, 음복(飮福), 망제(望祭)를 지내는 곳이다. 묘직(墓直)이라는 관리인이 묘와 재실건물을 관리하고 문중의 토지인 묘전(墓田:묘제 및 묘지관리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는 토지)을 경작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재실 [齋室] (두산백과) |


사적 제194호. 1834년 순조가 왕위에 오른 지 34년 만에 죽자 처음 왕릉을 옛 교하(交河) 장릉국내(長陵局內)로 정하였으나,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론이 대두되어 1856년(철종 7) 헌릉(獻陵 : 태종의 능) 우강(右岡)으로 옮겨와서 다음해에 죽은 왕비와 합장하였다. 능제도는 외형상 단릉(單陵)처럼 일좌(一座)의 혼유석(魂遊石)을 두었고, 장명등(長明燈)은 멀리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석인(石人)의 조각은 사실주의적인 것으로 머리가 어깨 위로 나오고 하반신이 더 길어져서 매우 아름다운 형체를 띠고 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씩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릉 [仁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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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왕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1365∼1420)의 무덤으로, 인릉(仁陵;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무덤)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1420년(세종 2) 7월 10일 창경궁 별전에서 원경왕후가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4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그해 9월 6일 세종이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태종의 능을 조성하였다. 헌릉은 두 개의 능이 같은 언덕에 조성된 쌍릉으로, 조선 태조의 건원릉 형식을 따랐다. 두 능은 12칸의 난간석을 둘러 서로 연결되어 있다. 봉분의 아랫부분은 병풍석이 감싸고, 능 앞의 석물은 망주석·혼유석·장명등 각 1쌍, 석호(石虎)·석양(石羊) 각 4쌍, 문인석·무인석·석마(石馬) 각 2쌍이 배치되었다. 이는 고려 공민왕릉(현릉)을 기본으로 삼은 배치법으로, 조선 왕릉의 위엄과 웅장함을 잘 드러낸다. 언덕 아래쪽으로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1424년(세종 6)과 1695년(숙종 21) 세운 신도비가 있다. 조선 왕릉 중 신도비를 갖춘 곳은 건원릉(태조)·후릉(정종)·헌릉(태종)·영릉(세종)뿐이다. 정자각 근처에 소전대(燒錢臺;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지방을 불사르는 시설)가 있는데 이는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 초기의 석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헌릉 [獻陵] (두산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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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댓글 6
- 작성일
- 2014. 10. 19.
@여우줌마
- 작성일
- 2014. 10. 18.
- 작성일
- 2014. 10. 19.
@샨티샨티
- 작성일
- 2014. 10. 19.
- 작성일
- 2014. 10. 19.
@세상의중심예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