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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3.4.28
범속(凡俗)하다는 것에 대해
세상은 온통 사람들에게 뛰어날 것을 요구한다. 일반적이고 흔한 것이 되지 않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즉 ‘보통’으로 살려고 해도 살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시장주의라는 극한의 경쟁을 이념으로 하는 지구 대부분의 체제는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라는 오직 비교 상대로만 해석되는 보통의 사전적 의미처럼 그 존재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이 어중간하고 모호한 영역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인간 어느 누구도 이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다.
뜬금없이 보통이니, 흔한 것이니, 일반적인 것이니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이다. 마치 사람의 삶이 이 보통에 머무르는 것은 안일함과 게으름, 혹은 저속한 무엇이나 되듯이 경시하고 천시하려는 소위 지적 허영으로 그득한 이들의 오만한 주장을 반박하고자 함에서다. 어쩌면 삶이란 것의 본질은 뻔한 것임에도 삶에 계급이나 층위를 부여하여 보통이지 않은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구분하려 드는 망상의 실체를 보고자 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통, 평범, 혹은 범속함이란 단어는 물론 이들과 대척에 있는 비범이나 특별함, 독특함이란 단어는 기실 구별하려는 인간욕망의 증거이지 어떠한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구별의 어휘를 만들어내고 나와 너를 차별하여 계급을 만들어왔다. 이러한 언어는 아마도 인간의 오랜 본성인 폭력성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절로 계급이 만들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범하고 속되다는 말로 싸잡아서 일반적이고 흔한 것이라는 보통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사용되고 있는 ‘범속(凡俗)’하다는 어휘를 살펴보자. 문자가 지닌 본래의 의미들은 이렇다. 범(凡)은 무릇, 대체로, 모두, 또는 예사로운, 보통의 뜻을 갖는다. 인간 모두를 의미하는 말이다. 속(俗)은 어떠한가. 풍속이나 관습처럼 사람들에게 익숙한 습속을 뜻하며, 나아가 종교적 관념에서 바라보아 현실을 고상하지 못하고 천하다는 인식하에서 설명하는 현실의 사회를 의미한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일반적이고 모두인 실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무지한 허영꾼들은 ‘나만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범속하다는 단어에 누추하고 비루함을 부여해 대다수의 사람들을 비하하려 든다.
그러나 비하하고자 한다고 해서 자신만은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디 범속한 것이다. 먹고 배출하고 자다가 그리고 부패하여 흙과 먼지가 되는 것이다. 이 범주를 벗어난 인간이 있었던가? 그들은 말하곤 한다. 삶이란 그것만은 아니라고 말이다. 옳은 말이다. 분명 이것만은 아니다. 인류의 삶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무언가의 기술을 개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부추기기 위해 복지도 실현하고, 타자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를 만들고 정치를 하는 등의 삶이 있다. 그런데 결국 이것들의 궁극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과 자기 가족과 이웃들이 평온하게 먹고 배출하고 자기위해 하는 것 아닌가?
지구의 연령을 추정하고, 화성을 탐사하며, 가늠할 수 없는 우주를 탐색하는 과학처럼 삶의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왜 탐사하고 탐색하는 것일까? 인간의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역시 궁극의 목적은 무엇인가? 삶의 지속성에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다시말해 자신들의 유전자가 단절되지 않고 살아남게 하기 위한 의지 때문이 아닌가? 자자손손 먹고 배출하고 자기위해 인간을 위협하는 모든 불안한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여기에서 범속함 말고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과학자, 정치가, 법률가는 비범하고, 권력과 부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이란 시장에서 버둥거리는 이들은 뛰어난 것인가? 대체 범속성을 벗어나 것이 이들에게 존재하기나 하나? 상상력, 혹은 창의력이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생뚱맞게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지 모르겠지만 투입이 없는데 산출이란 없는 것이다. 아마 초등교육만을 받은 사람들도 질량 보존의 법칙이니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니 하는 물리법칙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주입된 것만큼 나올 뿐이다. 모순은 여기에도 도사리고 있다. 상상력 뛰어난 인재를 찾으면서 비범함을 기대하는 것이다. 현실의 교육은 획일화된 교육체제를 수호하면서 이 보통에서 비범을 요구하는 것이다.
더구나 범속성을 저속함의 언어로 변질시키면서까지 비범을 찾는 이들의 무지와 그 범속함이란! 인간 어느 누가 범속함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인간은 범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범속이란 어휘처럼 사랑스런 단어가 어디 있겠는가? 관습과 관례라는 구속을 벗어나 그 경계를 허물고 일반적이고 흔한 것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노력은 귀중하고 존경 받을 일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삶의 지루함을 달래는 인간 본성의 하나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인간을 모독하는 말이 될까? 사랑하는 연인과 드디어 결실을 맺어 신혼여행지에 도착해 아름다운 풍광을 마주한 두 남녀의 첫 말은 무엇일까? ‘우리 뭐 맛있는 걸 먹을까? ’가 아닌가? 범속함, 삶의 본질을 말하는 언어이다. 결코 범속성에 층위를 덧씌워 비하할 단어가 아닌 것이다. 그저 범속하게 살 수 만 있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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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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