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에세이

kwonee0914
- 작성일
- 2015.5.5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 글쓴이
- J.M. 바스콘셀로스 저
동녘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미안하단 말과 함께 안방으로 사라졌다
오늘 밤도 아빠는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취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빠가 실업자가 된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가고 있다. 합판으로 지은 시골집 안은 한여름의 눅눅함이 가득했다. 습기는 가족의 무거운 침묵을 전부 머금었는지 참기 힘든 꿉꿉함을 더하고 있었다.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어린아이에게 일자리가 없다는 것, 집이 가난해졌다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날 밤에도 역시 나와 동생은 숨죽인 채 소주 한 병을 비운 아빠가 잠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방으로 아빠가 들어왔다. 이내 아빠의 술버릇인 집안 내력 외우기가 시작됐다. 안동권씨 복야공파 35대손, 시조 태사공, 할아버지 이름…. 끝날 줄 모르고 반복되던 내력 외우기는 “이제 정말 짜증나요. 그냥 주무시고 제발 일 좀 하세요.”라는 동생의 잔인한 한 마디에 끝날 수 있었다. 아빠의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안방으로 사라졌다. 그대로 동생의 뺨에 주먹을 내리 꽂았다. 아빠의 힘없는 어깨, 동생의 짜증 섞인 목소리, 집안을 맴도는 깊은 슬픔과 무거운 침묵, 가난한 집에 대한 원망과 자기혐오를 주먹에 담아 동생을 패 버렸다. 그 일이 있고 난 얼마 뒤, 우연히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를 만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불 속에 숨어 오열했다. 베갯잇을 거세게 물고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과 신음소리가 밖으로 세어나가지 않게 감춰야만 했다.
책이 가진 위로의 힘을 처음으로 느낀 책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깊은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특별히 그 친구가 나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면 더욱 그렇다. 나에게 제제가 그랬다. 아빠가 뒤에 서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른 체 “아빠가 가난뱅이라서 진짜 싫어.”라는 말을 내뱉은 제제는 모두가 행복해야 할 크리스마스에도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아빠를 위해 구두닦이 통을 들고 거리를 헤맸다.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헌 장난감이라도 선물하려 먼 길을 걸었다. 그런 다섯 살 제제의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마음의 위로와 위안을 내게 주었다.
벌써 일주일 전에 내 라임오렌지 나무를 잘라 갔어요.
가난만큼 어린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는 것도 없다. 온통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투성이인 꿈 많은 나이에 가질 수 없고, 할 수 없다 막아서는 잔인한 세상의 벽에 좌절케 한다.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화제에 오르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가난은 어린 코끼리 발의 족쇄처럼 제 인생의 한계를 스스로 긋게 만든다. 가난한 현실을 알아가고 거친 세상에 일찍 철이 들수록 삶은 점점 더 삭막해져만 간다. 감수성 가득한 다섯 살의 제제 역시 바싹 메말라버렸다. 제 나이를 잃은 제제의 조숙함은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상처받은 제제에게 흥미진진했던 동물원 구경도, 평원을 질주하는 카우보이와 사냥 놀이도 이제는 좁은 닭장과 작은 나뭇가지로 보일 뿐이다. 가난은 멋진 라임 오렌지나무 밍기뉴와 따뜻한 친구 뽀르뚜가를 제제에게 선물해 줬지만 또 너무나 일찍 세상의 슬픔에 눈 뜨게 했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초등학교 무상급식 때문에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난함임에도 그 가난을 스스로 고백해야만 공짜로 급식을 준단다. 모두가 꿈을 먹고 자라나야 할 어린아이들뿐이다. 세상이 아무리 잔인해도 가난 때문에 아이들이 차별받고 좌절과 슬픔에 빠지게 하진 말아야 할 텐데, 왜 자신들 멋대로 만든 세상의 책임을 이 한없이 여리고 순수한 아이들에게 떠넘기려 하는 걸까. 왜 조금이라도 가난한 아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마주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아파트 평수로 계급을 매기는 부모들의 못된 버릇이 이제는 아이들의 친구들마저 빼앗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일찍 철듦을 강요하고 세상의 슬픔에 눈 뜨게 만들려는 어른들에게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속 천사 같은 아이, 제제의 이야기를 꼭 한번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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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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