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은 책들

깐
- 작성일
- 2012.8.25
비행운
- 글쓴이
- 김애란 저
문학과지성사
우울할 때 보면 더 우울해지는 책들이 있는데, 우울의 정점을 달리는 요즈음의 나는 자신 있게 김애란의 책을 꼽겠다. 내가 김애란을 좋아하는 이유는 익살맞으면서 가볍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어쩐지 이번 소설은 몇 년 전에 읽었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때의 내가 더 우울한 감성을 지니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밝게 여겼던 걸까. 김애란이 서글픈 이야기마저 밝게 풀어낸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과는 다른 무언가를 내놓고 싶었던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침 저녁으로 김애란의 새 소설들을 읽는 나흘 동안 더 자주 울컥했고 더 자주 가라앉았다.
우울하긴 해도 김애란의 장편보다는 역시 단편이 좋다. 김애란의 파워는 단편의 분량에서 알맞게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내용이 흥미진진하면 표현이 그저 그렇고, 표현이 감칠 맛 나면 내용이 평이한 소설이 많은데 김애란의 단편들은 대개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킨다. 전에 비해 표현은 무뎌진 것 같지만 내용은 더 풍부해진 것 같다. 한 편 안에 적지 않은 사건들이 일어남에도, 사건의 발생보다는 인물의 심리 변화에 집중되는 이야기들이다. 차분히 따라가며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각 편의 마지막 장을 읽을 즈음이면 빠져든 만큼의 우울과 허탈감이 급습한다.
사회를 반영하지 않는 문학은 현대문학의 자질이 없는 것이라고 누군가 내게 가르치던 말이 이 글들을 읽으며 종종 생각났다. 문학도 유희의 하나라고만 여기던 때여서 그 말이 참 고리타분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혹은 그녀의 말에 꽤 공감한다. 내게 그 말을 한 사람도 자신은 사라지고 말만을 남겼듯, 이 소설도 언젠가는 글로만 남을 텐데. 사회를 담지 못하고 있다면 다른 것은 될 수 있어도 한국의 문학사에서 '현대문학', 혹은 '2010년대 문학'은 될 수 없겠지. 김애란의 소설이 우울할 수밖에 없는 건 우리 사회가 우울하기 때문이고, 내가 우울한 것은 그런 우울한 사회가 현실로 와닿기 때문은 아닐까.
보자마자 모두 흥분해서 산 것인데 이상했다. 유행은 왜 금방 낡아버리는지.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쭈글쭈글 함부로 쌓인 옷더미가 내 남루한 취향과 구매의 이력처럼 느껴져 울적했다. 지난해 내가 우쭐한 기분으로 걸치고 다닌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11쪽, 너의 여름은 어떠니)
장마철엔 살냄새가 짙어졌다. 여름은 평소 우리가 어떤 냄새를 풍기며 살아왔는지 환기시켜줬다. 지상에 숨이 붙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모든 체취가 물안개를 일으키며 유령처럼 깨어났다. 폭우 속, 사물들은 흐려졌고 그럴수록 기이한 생기를 디었다. (87쪽, 물속 골리앗)
헤드라이트를 켜고 야간 운전을 하는 사람처럼, 불빛이 닿지 않는 시야 밖 상황이나 관계를 종종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는. 그리고 그게 주위 사람들을 가끔 얼마나 서운하게 만드는지 모르는 녀석이었다. (253쪽, 호텔 니약 따)
"태국에 와 있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딴 나라말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내 나라말을 딴 나라말이라 불러보니 좋다. 고국에서는 한국어를 '하는' 혹은 한국어가 '있는' 느낌이었는데, 외국서는 '한국어를 가지고 다니는' 기분이다." (267쪽, 호텔 니약 따)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293쪽, 서른)
- 좋아요
- 6
- 댓글
- 1
-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