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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코
- 작성일
- 2020.9.16
어른들의 거짓된 삶
- 글쓴이
- 엘레나 페란테 저
한길사
사랑은 가냘프면서도 둔탁하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는 동력일 테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경험해온 무수한 사랑은 어떠했는가. 연약함이었는가 혹은 단단함이었는가. 소설 『어른들의 거짓된 삶』은 ‘어른들’의 사랑을 사춘기 소녀 조반나의 시선으로 담아낸 책이다. 어른들의 애정과 불륜의 미묘한 줄다리기 속에서 펼치는 사랑 이야기부터 10대 소녀 조반나의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까지.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녹여내고 있다.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 조반나는 이탈리아 나폴리에 사는 상류층 집안의 소녀다. 교사인 부모님 아래서 물신양면으로 사랑받아 온 전형적인 외동딸의 모습이다. 조반나는 평범한 학생으로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너무 고요했던 까닭이었을까. 그의 삶에도 점차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빅토리아 고모를 조우하며 자신이 생각해오던 ‘어른’의 모습이 산산조각 부서짐을 경험한 것은 물론 억눌려있던 성적 욕망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뜨고 만다. 빅토리아 고모는 조반나에게 자신의 성경험과 사랑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주고, 조반나는 고모의 이야기를 통해 성적 쾌락(성행위)을 궁금해 하며 자신을 옭아맸던 여성성의 상징인 ‘분홍색’을 탈피한다.
그러던 어느날, 조반나는 자신의 부모님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포착한다. 이웃이었던 마리아노 아저씨가 식탁 아래서 두 다리로 어머니의 다리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조반나는 충격에 휩싸였고, 머지않아 자신의 아버지 또한 이웃 마르게리타 아주머니와 사랑을 나누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른들의 위선과 거짓으로 얼룩져진 ‘사랑’을 보며 조반나는 좌절을 경험한다.
가족의 붕괴와 해체를 경험한 조반나는 사랑을 더 갈구한다. 고모에게 애착을 보이기도 하고 성욕에 사로잡혀 남자인 친구들과 몰래 한바탕을 치르고 오기도 한다. 그런 조반나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오고 만다. 로베르토를 보자마자 한눈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로베르트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럼에도 조반나는 그의 뒷꽁무니를 졸졸 쫓는다. 끝내 그와 첫경험을 치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까지 이른다.
결국엔 로베르토가 아닌 로사리오와 거사를 치름으로써 소설은 끝을 맺는다. 첫사랑에 대한 애정 어린 성욕이 단지 지인이었던 로사리오에게 투영되는 장면이다. 조반나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어른이 된(477쪽 인용)’ 것이다.
『어른들의 거짓된 삶』은 표면적으로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소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가 이성에 눈을 뜬 것처럼,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가 방황했던 것처럼, 주인공 조반나도 호기심과 치기가 뒤섞인 성욕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해 고뇌하는 모습이 연속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이유는 먼저 ‘여성’의 성적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그간의 성장소설이 ‘소년’의 이성적 호기심에 치중되어 있었다면 『어른들의 거짓된 삶』은 여성 화자의 목소리로 성적 욕망을 갈구한다. 주인공 조반나부터 그의 친구들, 고모까지. 대부분의 여성 화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짜릿함과 해방감을 경험할 수 있을 듯하다. 여성에게 주입되었던 순결이란 가치관에 대항한 담대한 소설이다.
또한 어른들의 사랑을 낭만적으로만 서술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작중 부모들의 불륜과 애정이 빚어낸 파열음은 매우 거칠다. 이를 적나라하게 아이의 시선으로 서술했을 뿐만 아니라, 이 역시도 사랑의 형태가 될 수 있음을 독자에게 넌지시 알린다. 그 과정 속에서 조반나는 어른들의 사랑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지만, 한편으로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함도 드러낸다. 풍문으로만 들어온 섹스의 행위를 첫사랑과 함께 하고 싶다는 낭만과 순수함, 이를 통해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바람은 독자인 우리에게도 강렬히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또다른 사랑의 형태들을 소설 속 장치로 삽입했던 장면이었다. 우리는 흔히‘평범한’ 사랑을 두 남녀 간의 사귐이라 정의내리곤 한다. 이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독특하게 바라보며 이상하다고 규정짓는다. 최근에 와서야 동성애를 한 사람의 정체성이자 문화 속 코드로 인정하곤 있지만 여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른들의 거짓된 삶』은 동성애 코드를 두 소녀의 성적 호기심으로 채색해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을 무색하게 만든다. 우정과 사랑의 경계에서 서로를 탐닉하고 키스하는 장면은 귀여우면서도 울림을 전한다.
사랑의 형태로 ‘폴리 아모리적’ 성향이 드러나는 부분 또한 인상 깊었다. 빅토리아 고모는 가정이 있는 엔초를 사랑한다. 엔초의 아내인 마르게리타 부인은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만 이내 곧 엔초가 빅토리아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수용한다. 엔초의 죽음 이후 고모는 마르게리타 부인의 3형제를 함께 양육한다. 한 남성을 둘러싼 두 부인의 사랑이 불륜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은 이들이 ‘사랑’이란 틀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자녀의 양육을 공동으로 한다는 점에서 폴리-아모리적 사랑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어른들의 거짓된 삶』은 소수자의 사랑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신선한 호흡을 선보인다.
베일에 싸인 채 작품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 엘레나 페란테. 전세계를 페란테 열풍으로 몰고 온 나폴리 4부작 이후 출간한 『어른들의 거짓된 삶』은 전작처럼 나폴리에서의 낭만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각 인물들의 애정 전선을 10대 소녀 조반나의 목소리로 발칙하게 풀어낸 『어른들의 거짓된 삶』. 여성 서사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마다할 이유가 없을 듯하다. 혹은 짝사랑의 짙은 열병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조반나의 입장에서 흥미진진하게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른들의 사랑, 불륜, 권태로움 그리고 사춘기 소녀의 풋사랑. 그 어딘가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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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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