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東海)
수학여행을 다녀온 뒤 백석은 동아일보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동해(東海)>라는 멋진 글을 보내 주었다. '자연계(自然界)와의 대화집(對話集)'이라는 기획시리즈란에 1938년 6월 7일 실린 이 글은 진실하게 자연과 벗되어 살아가는 시인 백석의 모습과 심정을 잘 살펴볼 수 있다. <동해>는 <편지>, <가재미 나귀>와 함께 한국 수필문학 사상 최고(最高)의 작품이요, 세계적인수준을 뛰어 넘는 최대의 걸작이다. 이러한 훌륭한 작품이 빙허 현진건에 이은 소설가 이무영이 자리잡고 있던 유능한, 동아일보의 편집자에 의해 주문되어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러 문인들이 발표한 다른 글과는 월등한 수준의 차이를 보이는 이 글은 문자 그대로 진정한 자연계와의 대화였다.
東 海
東海여 오늘밤은 이러케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를쓰고 삐루를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거닐면 어데서 닉닉한 비릿한 짠물내음새 풍겨오는데 東海여 아마 이것은 그대의 바윗등에 모래장변에 날미역이 한불널린 탓인가본데 미역널린곳엔 방게가 어성기는가 또요가 씨양씨양 우는가 안마을 처녀가 누구를 기다리고섯는가 또 나와 같이 이밤이 무더워서 소주에 취한 사람이 기웃들이누웟는가. 분명히 이것은 날미역의 내음새인데 오늘 낮 물기가 처서 물가에 미역이 만히 떠들어온 것이겠지.
이러케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날미역 내음새 맡으면 東海여 나는 그대의 조개가 되고싶읍네. 어려서는 꽃조개가 자라서는 명주조개가 늙어서는 강에지조개가. 기운이 나면 헤를 빼어 물고 물속 十里를 단숨에 날고 싶읍네. 달이 밝은밤엔 해정한 모래장변에서 달바래기를 하고싶읍네. 궂은 비 부실거리는 저녁엔 물우에 떠서 애원성이나 불르고 그리고 햇살이 간지럽게 따뜻한 아침엔 인함박 같은 물바닥을 오르락 나리락하고 놀고 싶읍네. 그리고 내가 정말 조개가 되고싶은 것은 잔잔한 물밑 보드러운 세모래속에 누워서 나를 쑤시러오는 어여쁜 처녀들의 발뒤꿈치나 쓰다듬고 손길이나 붙잡고 놀고 싶은 탓입네.
東海여! 이러케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조개가되고 싶어하는 심사를 알을 친구란 꼭 하나 잇는데 이는 밤이면 그대의 적은섬 - 사람없는 섬이나, 또 어늬 외진 바위판에 떼로 몰켜 올라서는 눕고앉엇고 모도들 세상이야기를 하고 짓거리고 잠이들고 하는 물개들입네. 물에 살어도 숨은 물밖에 대이고 쉬이는 양반이고 죽을때엔 물밑에 갈어앉어 바윗돌을 붙들고 절개잇게 죽는 선비이고 또 대로는 갈매기를 딸으며 노는 활량인데 나는 이 친구가 조하서 칠월이 오기 바뿌게 그대한테로 가여야한겟읍네.
이러케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친구를 생각하기는 그대의 언제나 자랑하는 털게에 청포채를 무친 맛나는 안주탓인데 나는 정말이지 그대도
잘아는 함경도 함흥만세교 다리밑에 님이 오는 털게맛에 헤가우손이를 치고사는 사람입네 하기야 또 내가 친하기로야 가재미가 빠질겝네. 회국수에 들어 일미이고 시케에 들어 절미지. 하기야 또 버들개 봉구이가 좀 조흔가. 횃대생성 된 장지짐이는 어
떠코 명태골국, 해삼탕, 도미회, 은어젓이 다 그대 자랑감이지. 그리고 한가지 그대나 나밖에 모륽것이지만 굉메리는 아래주둥이가 길고 꽁치는 웃주둥이가 길지.
이것은 크게할말 아니지만 산틋한 청삿자리 우에서 전북회를 노코 함소주 잔을 거듭하는 맛은 신선아니면 모를 일이지.
이러케 맥고모자를쓰고 삐루를 마시고 전북에 해삼을 생각하면 또 생각나느것이 잇읍네. 七八月이면 의례히 오는 노랑 바탕에 꺼먼등을 단 濟州배 말입네. 濟州배만 오면 그대네 물가엔 말이 만허지지.
濟州배 아즈맹이 몸집이 절구통 같다는둥 濟州배 아뱅인 조밥에 소금만 먹는다는둥 濟州배 아즈맹이 언제 어늬모롱고지 이슥한바위뒤에서 혼자 해삼을 따다가 무슨일이 잇엇다는 둥 ...... 참말이만치. 濟州배들면 그대네 마을이 반갑고 濟州배나면 서운하지. 아이들은 濟州배를 물가를 돌아따르고 나귀는 산등성에서 눈을들어따르지. 이번七月 그대한테로 가선 濟州배에 올라 濟州색시하고 살렵네. 내가 이러케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마시고 濟州색시를 생각해도 미역내음새에 내마음이 가는곳이 잇읍네. 조개 껍질이 나이금을 먹는 물살에 낱낱이 키가 자라는 처녀하나가 나를무척 생각하는 일과 그대 가까이 송진내음새나는 집에 안해를 일코 슬피사는 사람하나가 잇는것과 그리고 그 英語를 잘하는 總明한 四年生 琴이가 그대네 洪原君洪原面東桑里에서 난것도 생각하는 것입네
맥고모자 : 원래는 맥고로 만든 여름모자로 농사꾼이 쓰던 것이다. 일제 시대의 맥고모자는 파나마 모자라고 하고 고급모자를 의미한다. 남방지방의 나무껍질로 만든 고급모자로 멋쟁이들이 여름에 많이 쓰고 다녔다. 해방후에도 유행을 했었다.
삐루 : 맥주
닉닉한 : 기름기가 너무 많아 매우 비우에 거슬리는
모래장변 : 모래가 운동장을 이룬듯이 넓다란 모래 벌판
날미역 : 말리지 않은 미역
방게 : 백석이 특히 좋아하는 바다게과의 게. 등딱지는 거의 방형(方形)으로 두틀두틀하며, 다리에 털이 적고, 몸 빛은 회색에 가까운 녹색이다. 엄지 발가락이 특히 붉고 등딱지는 길이가 30mm 쯤 되며, 바다 가까운 각처의 민물의 모래속에 구멍을 뚫고 생활한다. 갈대밭에 사는 것을 '갈게'라고 한다.
어성기는가 : 게으르게 천천히 기어가는가
또요 : 도요새
기웃들이 : 비스듬이 기울어지게
꽃조개 : 꽃무늬처럼 조개껍질이 아름다운 조개
명주조개 : 명주 조개과에 딸린 바닷물 조개. 조개껍질은 엷고 황갈색인데 방사선(放射線)이 있고 길이 80mm, 너비 38mm, 높이 60mm인데 서해(西海)에서 많이 나며 맛이 썩 좋음
활량 : 한량, 건달
털게 : 함흥에서는 털게새끼를 간장에 담궈 정말 맛있게 먹고 큰게는 다리살을 청포에다가 넣어 먹는 고급요리에 쓰인다.
청포채 : 녹두로 만든 청포묵을 채로 썰어서 무친 음식
횃대생성 : 횃대생선
만세교 : 반룡산 기슭의 낙민루(樂民樓) 아래에서 내려다 보이는 다리로 성천강 위를 가로질러 놓여진 500M 정도의 긴 길이의 함흥 최대
의 명물(名物). 예전에는 목조 다리였으나 1928년 홍수로 유실되어 함흥시에서 총공사비 27만원을 들여 3년이 넘는 기간이 걸려 1930년 12월에 완공하였다. 성천강이 흐르는 만세교 다리밑에는 다리 양쪽에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털게를 삶아서 손님을 기다리며 팔았다. 한두마리에 5전씩 하였는데 막걸리 등 술도 팔면서 강가의 운치를 돋구었다.
은어젓 : 도루묵으로 만든 젓갈
굉미리 : 공미리. 꽁치와 비슷하다. 웃주둥이가 긴 특징이 있다.
회국수 : 고추장에 무친 생선회를 얹어 먹는 비빔국수 또는 국수
버들개 : 버들치로 잉어과에 딸린 조그만 민물고기. 개천에 주로 산다.
청삿자리 : 푸른 왕골로 짠 삿자리
애원성 : 함경도 지방의 구슬픈 민요
애원성
우수 경칩에 대동강이 풀리고
정든님 말씀에 요내 속이 풀린다.
에-에-
해는요 오늘 보면 내일도 볼 것
임자는 오늘 보면 언제나 볼까?
에-에-
태산에 붙은 불은 만백성이나 그고
요내 속에 붙은 불은 어느 누가 끌까?
에-에-
인함박 : 이남박. 쌀같은 것을 씻어서 물에 일때는 쓰는 안턱에 이가 서게 여러줄로 돌려 판 함지박의 하나. 쌀을 일때 쓰이는 바가지의 일종.
세모래 : 가늘고 고운 모래
헤 가우손이 : 혀의 가위손이. 침흘리는 혀를 내두르며 마치 가위손이 되어 있을 정도로 기다린다는 뜻이 특이한 어구. 그러나 이 글에서는 양손을 걷어붙이고 털게를 기다린다는 의미가 강하다
일미(一味) : 좋은 맛
절미(絶味) : 뛰어난 맛
굉메리 : 공미리. 꽁치와 비슷하나 아래턱이 더 긴것이 특징이다.
함소주 : 상자째 갖다 두고 마시는 소주
아즈맹이 : 아주머니
또요 : 도요새
순수한 대화체로 부터 문장을 이끌어내는 솜씨는 일품이다. 가히 한국어가 만들어내 최고의 음률과 내용으로 어울어진 이 <동해>는 그 뛰어난 음악성, 서정성과 문장구성 그리고 단어 하나 하나에 숨쉬는 생동력은 백석의 위대한 문장력을 보여주는 일면(一面)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처럼 한국적이면서도 또한 세계적인 문장은 다시는 없을것이다. 온통 백석의 시어로 구성된 이 산문(散文)은 풀어 놓으면 시(詩)요 묶으면 훌륭한 문장이 되는 것이다.
백주를 마시고 동해(東海)바다 근처의 밤거리를 거닐며 생각에 잠기는 백석은 바다의 특유한 내음새에 취해 조개가 되고 싶다는 심사를 읊었다. 조개들의 친구인 물개와도 친하여 놀고 싶은 백석은 또한 함흥의 만세교 다리밑에서 털게를 기다리며 많은 안주들과 벗하여 놀고 제주 배를 기다린다. 제주 배를 기다리며 여름에는 꼭 제주색시와 같이 살고 싶다는 백석의 소망이 짙게 스며든 <동해>는 홍원군 홍원면 동상리(東桑里)에 사는 백석(白石)의 제자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금(琴)이는 바로 백석이 아끼는 수제자 박재금(朴在琴)이였다. 미소년(美少年)인 그는 공부를 잘해 언제나 일등을 유지했으며 영어공부를 특히 열심이 했다. 백석 선생을 특히 따르고 좋아한 금(琴)은 자주 백석의 하숙집에 놀러와 공부를 한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백석이 재금을 더욱 아끼고 사랑한것은 재금의 집안의 사정과 무관하지는 않다. 재금의 친누이가 불행히도 벙어리로 누구나 감탄해 마지 않던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언제나 안타깝게 느낀 백석은 자신의 수필 <동해>에서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보였다. 또한 백석은 재금이의 그밖의 불행한 가족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었다.
☞ 시인 백석 일대기 2 -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 송준 / 도서출판 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