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의 샘 ▶2019-93

해맑음이
- 작성일
- 2019.4.13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글쓴이
- 야마구치 슈 저
다산초당
철학서가 너무 쉽게 빠져들게 하는 것은 반칙이다.
그럼 이때동안 난해하게 여겨졌던 철학들이 페르소나였나?
쉽게 읽혀질 수 있는데, 일부러 철학자들이 작가들이 고고한 척 고상한 척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썼나?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격하게 칭찬해주고 싶다.
사람과 사회, 조직, 사고에 관한 핵심들만 추출해 설명하고 있다.
한창 읽고 있는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다.
무엇보다 은연중에 어렴풋이 알았던 철학에 관한 개념과 용어들이 우리네 실생활과 갖춰야 될 기본 소양으로서의무를 감당하고 있음에 나의 머릿속이 정리되어지고 교양으로 가득찬 것 같다. 뇌가 섹시해진다고나 할까?!!
처음 '르상티망'의 잔상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뒤이어서 '페르소나'가 나온다.
2; 고전극에서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을 뜻하는데, 실제 자신의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면이 '페르소나'다. 우리는 안그런 척 해도 어떤 상황에서는 가면을 쓴다.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기 싫거나 두려워서 나답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한다. 무서운 것은 내 속에 나도 모르는 페르소나가 너무 많다. 이중적인 모습은 나중에 가면과 맨 얼굴의 정체가 희미해지거나 애매하다는거다. 진정한 내 자아를 잃어버리게 한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사회가 성립되고 유지되어 온 측면도 있다고 하는 아이러니는 페르소나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만든다. 폐쇄적인 사회에서 더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에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
7; 역시나 어렵게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언급되어 나와서 살짝 반가웠다.
자유로부터 도피를 했지만 그 도피는 또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개인의 고독과 책임을 묻는다.
값비싼 자유를 획득했는데, 과연 행복할까? 왜 달아날까? 물음에 답을 해야한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나치의 '전체주의'다. 자유로부터 벗어나 권위에 다시 복종해야 하는 삶으로의 회귀는 진정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지도자 모세를 필두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속에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매번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하고 불순종하며, 다시 과거(애굽)로 회귀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다. 진정한 자유를 얻었지만 그들은 자유를 벗어나 한 곳에 정주하기를 원한다. 복종에 익숙한 삶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아직 자유가 들이미는 책임에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다."
훈련되지 않은 자유로 인해 오히려 더 삶이 피폐해질 수 있겠구나 싶다.
8; 불확실한 것일수록 빠져들기 쉽다... 혹시나 모를 요행을 바라게 된다. 쉽게 도박에 빠지는 이유다. 복권을 매주 사는것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쾌락물질인 '도파민의 조화'란 언뜻 생소한 용어가 나온다. 스마트폰을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는 행위나 알림 표시가 뜨면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하는 경우다. 예측하지 못한 일에 직면할 경우 자극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 반복해서 행동하게 하는 효과가
크다. 불안 장애를 동반할 것 같다.
10, 13;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놀랬다. 악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이질적인 것,
이상하고 특별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어버렸다.

평범한 뒤에 숨어있는 '악'의 이중성에 치가 떨린다. 비단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히히만' 뿐 아니라 평범함으로 포장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이웃의 민낯이 더 두렵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이 20세기 정치 철학을 논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잔인한 악행은 괴물이 저지른게 아니라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저 시스템에 올라타 그것을 햄스터처럼 뱅글뱅글 돌리는데만 열심이었던 하급관리에 의해 일어났다는 주장...
아히히만이 단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악을 이용했다는 것과 같다. 악을 저지른 후 그들은 평범한 한 가정의 남편으로 아비로 돌아갔을 것이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대로 행동하지 말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여러가지 심리적인 접근으로 인간의 민낯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한 개인의 양심으로 낱낱이 밝혀지는 범죄의 실체들. 그 중심에 공익제보자들이 있다.
잘못된 방향임을 알고 목소리를 내는 한 사람의 중요성은 변할 것 같지 않은 우리 사회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맨 먼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존재.... 그리고 공감대 형성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다.
20;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얼굴' 부분에서 많은 생각이 스쳤다.
흔히 생각하는 '타자'는 내가 아닌 상대방,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란 소통 안 되는 사람, 이해 수 없는 즉 바보의 벽이 가로막고 있어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한다.
한 사람을 잘 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서로에게 어쩌면 '타자'다.
인류에게 일어난 비극의 대부분이 자신은 옳고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틀렸다고 단정한 데서 야기되었다. 그러나, 나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타자를 배움과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 다른 관점의 가치관을 획득할 수 있다.
어쩌면 사람을 안다는 것은 '역지사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알면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고, 다른 사람이 된다. 앎은 행동을 유발한다. 타자와의 만남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말에 쉬이 공감한다. 내가 생각하는대로 내 눈에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티는 잘 보이면서 내 눈 속의 들보는 못 보는거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와의 관계라 하더라도 얼굴을 마주함으로 이해의 가능성을 교환하고, 이로써 관계성을 파괴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불편했던 관계였다. 스마트폰의 문자나 카톡으로 화해의 제스쳐를 하는 것은 너무 가벼워보였다. 진심이 가로막힌 느낌? 그래서 직접 만나기로 했다. 솔직히 두렵다. 몇 년 동안의 공백이 있었기에 어떤 말을 해야할지, 그 말들이 또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조심스런 마음도 있다. 그럼에도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어쩌면 생각보다 관계의 응어리가 쉽게 풀릴수도 있다는 아주 조금의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과거의 일을 꺼내 흠집내기보다 서로의 이해가 부족했고 안타깝고 짠한 마음들의 부재가 아니었나 싶다.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21; 너무나도 익숙하게 들은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진다는 '마태효과'
나도 예수님 믿는 사람이지만 성경을 근거로 한 이 철학적 용어가 너무 싫다. 거부감이 든다.
출발선부터 다르며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딱 그 전형이며,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구조인데 자꾸 부의 사다리를 거머쥐라고 말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 그렇다. 기를 쓰고 국가대표가 되려하고, 공무원이 되려하고, 상위권 대학 일명 그 유명한 SKY캐슬에 가려고 한다. 쉽게 성공할 수 있고, 보상받는 기회들이 많으니까. 그렇다고 정말 기회는 공정할 수 있을까? 희망이 점점 옅어진다.
생각도구들이 가볍지 않다. 어떤 식으로 사고해야할지 활짝 열어준다. 참 희안하면서 재밌는 책이다.
실생활과 관련된 부분들이 많아서 꼼꼼하게 읽게 된다.
철학서가 이래도 되나 싶다. 너무 잘 읽혀져서.
많은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 유연한 사고가 중요할 것 같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보다 어떻게 그 문제를 바라보고 대처하느냐의 문제다.
심오한 철학의 깊이보다 지적 교양의 중요성도 깨닫는다.
일상적인 고민에서부터 인간관계에 대한 것, 비즈니스에 관한 것까지 아우르는 교양으로서의 철학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알아두면 정말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밑줄 긋으면서 읽고 되새기고 생각하며 나름의 짧은 공부를 했던 시간이다.
철학을 읽는 시간, 그 깊이를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이런 유익한 책을 만났음에 잠시동안 아주 잠시 빙글빙글 뇌가
즐거웠다. 다시 읽고 또 다시 읽어도 새로울 것 같은 책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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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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