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블17기 리뷰

해맑음이
- 작성일
- 2019.11.22
말이 칼이 될 때
- 글쓴이
- 홍성수 저
어크로스
학교 행정실에 친한 선생님이 자기 아들 학교에서 급하게 읽어야 할 책이 있다고 해서
그 책이 나에게 있냐고 물었다. 책 <말이 칼이 될 때>이다.
나에게는 없고 중리초등복합시설 도서관에는 비치되어 있더라고 하니깐, 안도의 숨을 쉰다.
잘 됐다면서 바로 가져가야하니 사기에도 그렇고, 자기 집 옆 내서도서관에는 다 대출중으로 떤다고
혹시나 해서 물어본거라 했는데.... 나도 그 때 페미니즘 책 읽기를 하는 중이라 읽어야 될 페미니즘 책을
미리 확인하고 없는 책은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할려고 했기에 조금이라도 선생님께 도움이 되어
다행이다 라고 말했다. <말이 칼이 될 때>는 11월 페미니즘 책읽기 도서이다.
제목에서 느껴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 누구에게는 찌르는 칼이 될 수 있음을.
그 칼은 분명 잘못된 용도이다. 음식을 할 때 칼은 유용하면서 가장 알맞은 도구인데,
칼이 되는 그 말은 '혐오표현'이다. 익명의 공간에서 혐오표현은 날카로운 칼이 된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플랫폼에서 혐오표현은 수위가 높다. 자막까지 띄운다.
그것을 본 어린 아이들은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친구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보기에도 민망하고 기분 상하고 낯뜨거운 표현들은 걸러짐이 없다.
막말이라 불리는 말들은 우리 사회 소수자들에게 향한다.
혐오표현이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으로 그 개념을 정의해 볼 수 있다.
다양한 수위의 차별, 적대, 배제,폭력의 말들을
'혐오표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내 이 문제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옹호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혐오표현을 적절히 규제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가 되었다.'
말이 엄중하게 다가온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제란 느낌이 든다.
지금 우리는 서로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경쟁적으로
서릿발같은 말을 난사하고 있다.
말에 대해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말로서 암묵적으로 편견을 유발시키고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특히 초등학교 교실에 퍼진 혐오표현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아이들에게 혐오와 차별이 일상화된 것은 어른들의 탓이라는 의견이 많다.
부모의 역할과 교육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사회인 만큼 상대를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남성혐오와 여성혐오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그 사회적 작동 방식과 위험 초래의 가능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혐오표현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실제로 위협하는 현실 그 자체로 작동하는 여부가 중요했다.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양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면서 혐오표현 이고/아니고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에 많이 공감했다.
여성혐오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서 차별하는 것을 넘어 일상적인 공포를 야기하기도 한다.
열등한 존재인 여성을 대상화하고 종속화하는 남성 지배 문화에서는 여성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여성혐오를 당한 여성들의 감정적 반응은 '공포'로 귀결되는 반면, 남성혐오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쪽의
감정선에는 공포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남혐과 여혐이 사회에서 작동하는 기제가 똑같다고 볼 수
없고
남혐을 여혐과 비교하여 '그게 그거고 다 나쁘다'는 식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혐오표현은 어떤 환경, 어떤 시대에서
'소수자'로 처해진 상황에서 성립될 수 있다.
개독이란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그것이 심각한 위해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으니 차별이라 할 수 없고,
기독교가 탄압받는
개화기 때는 개독이란 말이 차별과 배제를 야기하는 혐오표현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혐오표현의 유형에는 '차별적 괴롭힘/
편견 조장/ 모욕/ 증오선동'이 있다.
혐오표현을 했다고 무조건 혐오가
되는게 아니며, 실제로 어떤 폭력적 행동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어야
혐오표현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것은 나뿐인가?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혐오표현이라
구체화시키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게 되는가?
늘 우리는 어떤 일이 결국
일어나고서야 대책을 수립하게 된다.
그 대책이란 것도 숙고하지 않은 땜질
처방이란 느낌이 들고, 다음번에도 이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데......
혐오표현의 규제를 위해서는 혐오표현을 적절히 유형화해야만 그에 맞는 다양한 대응 방법을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다.

혐오표현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에게
총을 겨눈다. 장애인, 이주민, 동성애자....
이런 소수자들을 향한 온라인 혐오표현은 익명이라 그런지 더
심하다.
피폐하게 만들고, 정신적으로 갉아먹는 것 같다는 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수도 있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졌다. 같은
인간으로서 어쩜 저럴 수 있을까?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에게 한 말이 아니더라도 마음은
이미 차가워지고 기분이 좋지 않다.
혐오표현의
해악은,
1. 혐오표현에 노출된 소수자 개인
또는 집단이 '정신적 고통'을 당한다.
2. 혐오표현은 누구나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공존의 조건'을 파괴한다.
3. 혐오표현은 그 자체로 차별이며,
실제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혐오표현이 공존의 조건을 파괴한다면 이것은 헌법적
가치인
'인간 존엄' '평등'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연대성' 등을 훼손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표현이 이러한 가치들을
파괴한다면 표현의 자유가 우선시될 수는 없다.
만약 험오표현이 소수자를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배제하고
청중들을 차별과 배제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등
현실적 해악을 가지고 있다면 평등과 인간 존엄 등
다른 헌법적 가치의 수호를 위해 혐오표현을 규제해야 할
것이다.
2번째 혐오표현의 해악에 많이 공감한다.
표2의 혐오 피라미드의 작동기제에서 피라미드 제일 아래 단계인 내가 가진 편견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편견이 혐오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발화하는 것임을 잘 알게 된다.
험오표현과 증오범죄, 혐오표현과 역사부정죄와 연결되어있고 깊은 관련이 있다.
편견, 혐오, 차별, 혐오표현,
혐오범죄는 하나의 메카니즘으로 작동했다.
혐오의 의식이 표현되는 순간 언제든지
구체적인 행위(차별과 폭력)으로 나아갈 수 있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그랬다.
증오범죄란 장애,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성별, 성별 정체성 등에 근거한 적대 또는 편견이 동기가
된 범죄를 뜻한다.
즉, 폭행, 살인 등 기존의 범죄를 저지르는 '동기'가 편견에 기반했을 경우
'증오범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누군가 특정되기도 하지만 무작위로
선택된다는 점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 현장에 남겨진 메모가 무겁다.
'나는 우연히
살아 남았다' 사회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주는 부분이라 말한다.
증오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전반적으로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계속 피해자는 나올 것이고,
증오범죄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은 조현병이라 말하고.....
정신적인 병이라고 하면 판결에서
관대해지고....
'증오범죄법 제정'을 통해서라도
증오범죄를 가시화 시켜야 하는데,
아직까지 국회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안건들이 쌓여있다고 하니, 더 화가 치민다.
소모적인 정쟁만 일삼고 자기 밥그릇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니 너무 중요한 법안이 자꾸 뒤로 밀리고
이슈화되지 못하고 묻혀버린다. 이런 증오범죄가 또 발생했을 때 끓어올랐다 식어버리는 것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할까?
혐오표현의 금지와 허용의 이분법이
항상 따라다닌다.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그래서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가 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표현의 자유는 원래 '소수자'의
권리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소수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적 가치다.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혐오표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소수자의 관점에서도 유리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쉽다. 그러나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면 좋은 이론이나 의견도 다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혐오표현과 싸우는 것은 양극단의 날이 서 있다. 갈등의 간극이 너무 크다.
'퀴어문화축제와 반동성애 운동'이
해마다 쟁점화 된다. 세계적 추세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문턱이 높다.
페미니즘에 관한 책읽기를 하고
있지만, 시각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공감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공감이 안 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동성애에
대한 시각에 관대하지 않다. 어렵다.
최근 어떤 정치인이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최저임금보다 더 적은 임금을 줘야한다'는 발언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내국인은 국가에 세금을 내는 등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기여를 하였지만, 외국인 노동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보장해 줄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이 발언은 차별이자 사실왜곡이며 혐오표현 이란 비판을 받았다.
외국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이다. 그리고 역으로 우리도 외국에 나가 일을 하게 되면 그 나라에서 소수자가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가 타국에서 차별과 혐오를 받게되면 얼마나 두렵고 힘겨울까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서 방어하기보다는 '더 알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선량하다 생각할지라도, 어떤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차별에 가담하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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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댓글 6
- 작성일
- 2019. 11. 23.
@seyoh
- 작성일
- 2019. 11. 23.
- 작성일
- 2019. 11. 23.
@Aslan
- 작성일
- 2019. 11. 26.
- 작성일
- 2019. 11. 26.
@아그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