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만

드미트리
- 작성일
- 2017.5.26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 글쓴이
- 지주형 저
책세상
# 0
1997년, 그리고 1998년에 관한 모호한 기억. IMF라는 생소한 단어가 뉴스와 신문을 뒤덮었다. 그 즈음 사촌 형인지 누나인지 모르겠으나, 여튼 결혼식이 있어 친척이 모였다. 아버지가 8남매라, 사촌이 꽤 많았는데, 나는 주제 넘게 IMF가 문제라고 말하니까 나이 좀 많은 사촌 형과 누나가 웃었다. 넌 IMF가 뭔지 아냐고. 당시 유행하던 개그였던 대통령이 "I am F, 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F는 F학점이고." 그 말을 들은 사촌 누나가 "그 정도면 많이 아네." 하고 웃고 넘어갔다.
그 전에 여당이 새벽에 날치기로 통과시키려던 노동법 관련한 뉴스가 공중파 TV에서 방영되던 기억도 살짝 난다. 고등학교 이후에는 거의 보지 않았으나 중학생 떄까지는 TV를 꽤 즐겨 봤다. 재밌게 본 프로그램이 종영되고, 청춘 여남 사랑을 주로 다뤘던 드라마가 소시민의 일상을 다루는 방향으로 흘러가더라. 그 시기 방영된 게 '육남매'라든지 뭐, 그런 느낌. 드라마 외에도 전반적으로 방영되던 TV 프로그램은 돈 안 들인 티가 막막 났다.
중학교에서는 기초생활비 지원인지 뭔지, 하는 여튼 생계 곤란 가정을 조사한다며 가정통신문을 막 뿌렸다. 나의 경우,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별 영향은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잔소리가 심해지긴 했다. 그러니까, 공무원이 최고야, 이런.
# 1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은 책세상에서 나온 GPE 총서 시리즈 제 3권으로, GPE 총서란 '지구적 구조의 전환, 가능한 세계의 모습'을 위해 만들어진 시리즈다. 2011년에 1, 2, 3권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는데 세 권 모두 신자유주의를 겨냥한다는 점이 우연이 아니다. 2011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혹자는, 신자유주의란 기의 없는 기표로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정의된 개념이 아니며 좌파적 선동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이 책을,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탄생』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단언코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명백히 존재하는 현재 시스템이다. 그것도 우리를 굉장히 폭력적으로 짓누르는.
# 2
지금은 어쩌다 보니, 관심사가 그쪽에서 다소 멀어졌다. 예전에는 아니었다. 꽤 그쪽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GPE 총서 1~3권을 성현동에서 여의도동으로, 그리고 노량진동으로 이사오면서도 처분하지 않고 품고 왔다. 소장 가치가 있기도 했거니와, 『신자유주의의 탄생』 외에는 나머지 책을 읽지 않아서다. 그중에서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은 한국 사례를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특별히 애정이 간 책이다.
# 3
# 4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 보면 된다. 기억을 위해 짧게 몇 글자만 남기자면, 이 책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탄생하고 전개되었는지를 다룬다. 특히 한국이 신자유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결정적 계기라고 할 만한 IMF 위기와 이후의 대처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국제 금융 시장의 안정성을 지향했던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한 뒤 달러-월스트리트 권력은 한국 시장의 개방을 원했고, 외환 위기와 산업 위기 등이 중첩된 한국은 IMF에 돈을 빌리는 대가로 IMF 처방을 받아들인다. IMF 처방은 익히 알려진 대로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구조조정'이다. (한국이 IMF에 돈 빌리러 가기까지 과정이 실감 나게 묘사나는데, 이것도 한 편의 촌극이다...)
기업이 도산하고, 노동자는 길거리로 내몰렸으며, 은행을 외국 자본이 잠식했다. 웃긴 것은 리먼 브라더스 파산 때, 이들은 한국에 강제했던 방식과 정확히 반대로 했다는 사실. 이렇게만 정리하자면 IMF가 돈 뜯으러 온 양아치다. IMF가 가해자고, 한국이 피해자 같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은 한국이 자발적으로 진행한 신자유주의적 처방도 많다고 논증한다. 트로이의 목마를 비유로 들면서, 목마를 들여온 건 결국 한국이었다는 사실. 실제로, 한국에는 IMF 이전부터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를 옳다고 여긴 학자와 경제 관료가 있었고 이들은 IMF 개입을 계기로 주도적인 권력을 잡는다. 그리고 나타난 결과는? 신자유주의적인 시스템으로 빠르게 이행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위기를 잘 극복한 듯하나 고용 없는 성장, 양극화, 성장 동력 상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생률 등등 곳곳이 문제다.
# 5
현재까지는 취임 후, 몹시 잘하고 계신 현재 대통령에게 그래서 표를 주기 싫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오랫동안 좋아했던 정치인 심상정을 찍었음.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을 모두 읽어보면 알겠지만,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이라는 점에서, 과거 정부는 전부 다 잘한 게 딱히 없다.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한 참여정부도 마찬가지다. IMF는 신중히 생각 - IMF의 진심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표면적으로 IMF가 초기에 대한민국에 요구한 것은 금융 시장 개방이었지, 노동은 아니었다. IMF는 대량해고와 실업이 한국 경제 기반을 흔들 수 있으므로 신중히 하라고 권함 - 하라고 한 노동시장 유연화는 DJ 정부가 앞서서 제안했다. 물론, 처음부터 지지층을 배반하고 싶지는 않았을 터. 못하고 싶어서 못한 것도 아닐 테고. '민주노동당'이 집권해도 자신 있다고 했던 모피아을 포함해 신자유주의가 글로벌 스탠다드가 된 시대에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란 정말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다가는, 지금보다 더 공동체가 산산조각 날지도. 공동체가 없어진들 뭔 상관이랴, 태양 아래 인류는 너무나 미미한 존재인 것을, 이라고 이야기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 6
신자유주의 비판까지는 알겠다. 그래서 저자는 무엇을 대안으로 논하는건데, 하는 삐딱한 시선으로 읽는다면 끝까지 읽기를 권한다. 결국은 정치경제학, 민주주의의 복원, 이라는 대안은 다소 상투적이긴 하다만 딱히 그 방법 말고는 없다. 대선 끝났다고 안심하지 말자.
---
(이하 메모)
금융화된 세계경제에서 자산가치를 평가하고 금융자원을 배분하며 생산네트워크를 통제하는 것은 일종의 '금융시장의 독재' 또는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지구적 자본시장의 독재'다. 이것은 한국의 개발국가에서 기업 성과를 평가한 것이 수출과 같이 정부가 제시한 기준이었던 것과 대조된다. 이는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개인 각자의 선호와 선택이어야 한다는 하이에크의 판타지와도 대조된다. 현실의 신자유주의에서는 국가나 개인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특수한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 초국적 기업 및 기관투자자들이 경제적 생과 사를 결정하는 권력을 쥐고 있다. (95쪽)
IMF 위기는 개발국가의 유산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사이에서 방황하던 한국이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은 뜻밖에도 CIA가 예측했던 것과 달리 IMF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IMF 구제금융은 진실로 '트로이의 목마'였다. '트로이의 목마'를 만든 건 그리스인들이었지만 성안으로 들여온 것은 사실 트로이인 자신들이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을 IMF 구제금융으로 몰아간 것은 미국인들이었지만 'IMF 플러스' 개혁안을 먼저 제시하고 받아들인 것은 한국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IMF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IMF 개혁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태국, 인도네시아 등과 달리 한국은 IMF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위기 상황과 IMF의 개입이 그간 진행되어왔던 한국 신자유주의 경제관료의 기업ㆍ금융ㆍ노동개혁과 금융 자유화 및 지구화 노력에 한시적이나마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 결과 위기 효과와 위기관리 비용이 다시금 사회적으로 배분되고 금융, 기업, 노동 부문에서 신자유주의적인 금융ㆍ재무 지향적 행위는 보상을 받았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에 부합되지 않거나 저항하는 행위는 처벌을 받거나 폭력적으로 제거되었다.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의 급속한 전환을 이루었다. (225쪽)
1998년 중반부터 위기관리의 초점이 외환 및 외채위기에서 금융 및 기업위기로 이동하고 금융부문의 선정상화와 금융 주도적 산업구조조정안이 확정되면서 정부, 은행, 산업 3자 관계가 새롭게 규정되고 한국 경제는 신자유주의적 체제 전환의 결정적 문턱을 넘었다. 중장기적 산업발전의 논리가 약화되고 단기주의적인 금융건전성과 금융적 수익성의 논리가 3자 관계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65쪽)
IMF 위기의 충격을 가장 크게 즉각적을 받은 것은 노동부문이었다. 1998년 초에 개정된 노동법은 대기업의 정리해고 절차를 비교적 명확히 규정하고 금융위기 상황에서의 인력구조조정을 정당화했다. 강력한 노조들의 반발로 대량 정리해고를 실행하는 것이 여전히 쉽지는 않았지만, 이 법 개정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에 크나큰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새로운 노동법에 의지해 정리해고를 하지 않고서도 재벌이 (고용안정에 대한 대가로) 임금삭감, 명예퇴직, 일시해고(무급휴직) 등을 관철해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한국경영자총협회 1999, 54~59쪽). 그리고 그 결과는 대기업에서의 대규모 인력 감축 및 노동시장과 고용 관행의 전면적 유연화였다. (339~340쪽)
은행과 기업의 금융ㆍ재무건전성 중시, 주식 및 파생상품시장의 폭발적 증가, 주주가치 경영의 확대와 지주회사로의 전환, 노동 유연화와 상시적 구조조정, 재테크 붐과 가계 금융자산의 증가는 한국 자본주의의 금융화를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들이다. (356쪽)
IMF 위기의 극복은 신자유주의적 경제관료 주도의 경제개혁, 외자 유치와 초국적 자본의 유입, 그리고 재벌 주도의 수출 성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제관료, 초국적 자본, 재벌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강화되었다. 이들의 권력은 서로 독립된 상태에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서로 매우 밀접한 연관관계 속에서 발전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지배블록을 여기서는 '경제관료-재벌-초국적 자본의 과두권력'이라 이름 지으려고 한다. '과두권력'이라는 말을 쓴 까닭은 이들이 때로는 서로 갈등하고 불화하면서도 한국의 자본주의 정치경제를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384쪽)
IMF 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사회적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고단한 삶은 고용 불안, 노동시간 연장과 상습적인 야근, 자기계발과 재테크, 출산율 저하, 자살률 증가, 타인에 대한 신뢰와 삶에 대한 만족도의 저하를 특징으로 한다. (454~455쪽)
적극적 대처 방법인 금융ㆍ자산투자는 영합 zero-sum 게임적 성격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 무엇보다 주주로서의 노동자가 노후 소득보장을 위해 임금인하나 해고 등을 환영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다(박종연 2008, 130쪽) 더구나 주식시장에서 승리하는 이들은 대개 개미투자자가 아니라 국내외 기관투자자나 재벌들이다. (중략) 개인 차원의 해결책은 그 개별적 성격 때문에 집단적 수준에서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개인들에게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461쪽)
한국 신자유주의의 블루프린트를 작성한 김재익은 시장 자유화가 권력을 분산시키고 민주화를 촉진해 경제의 균형성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놀랍게도 스웨덴 복지국가를 모델로 생각했으며 외국 자본의 국내 은행 소유만큼은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손광식 2003, 228쪽 ; 이경호 2006 참조). 그러나 이러한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중략) 김재익의 기대와 달리 신자유주의는 적어도 경제 운영의 측면에서는 개발국가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현재 한국 사회가 당면한 사회경제적 불균형과 양극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적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독과점의 폐지와 민주주의의 확대다. (469쪽)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이라는 정치학자는 정치란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Easton 1963). 그런데 현실에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은 정치체계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권위적 배분의 대상인 사회적 가치에서 경제적 자원이 제외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턴의 정치에 대한 규정을 경제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경제란 곧 정치적 과정이고, 정치경제란 경제적 자원의 권위적 배분 과정이며, 정치경제학은 그러한 과정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482쪽)
- 좋아요
- 6
- 댓글
- 2
-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