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

레몬향
- 작성일
- 2016.12.13
창에는 황야의 이리가 산다
- 글쓴이
- 민병일 저
문학판
철학적 열정이 가득한 책이다. 철학과 친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친분을 쌓지 못한 탓에 난해하다. 나에게만 난해한지 모르겠지만 철학에
정답이 어디 있으랴 용감하게 책 속으로 들어가 공감도 해보고 의문도 가져 보고 비판도 해본다.
철학이란 philosophy(필로소피)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그리스어에서 유래 되었다. 지혜란 사람이 살아가면서
좀더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인생관이나 세계관, 우주관 등 삶의 본질에 대한 것을 고민하고 개선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 보니 철학의 본질은 수 천 년이 지나더라도 변하지 않지만, 관념에 따라 철학의 대상은 바뀔 수 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걷는
것에 의미를 두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종교에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저자는 창에 의미를 두고 삶을 조율하려는 것 같다.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다. 창, 황야, 이리의 조합은 다분히 철학적으로 보인다. 제목부터 해석해 보기로 했다.
창문은 용도에 따라 모양도 형태도 구조도 다양한데,
창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의 심리 상태? 아님
창을 통한 소통?
어쩌면 창을 통해 바라본 세계에서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를 비교 분석하여 성장하라는
것일 수도 있다.
황야는 정제되지 않는 들판을 말하는 것이니까 우리의 삶을 말하는 것일 듯 하다.
많고 많은 동물 중에 왜 이리라는 낯선 동물을 선택했을까? 이리는 늑대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던데, 이리가 가진 의미는 뭐지? 늑대가 길들여지지 않기 때문인가? 아님 고독한 늑대라는 말이 있듯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도도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자아를 찾으라는 것일까? 혹시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라는 소설에서 얻은 영감일까? 잘 모르겠다.
‘창에 사는 이리는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와
‘창에 사는 황야의 이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라는
작가의 말에 의하면 굳이 심오하게 파고 들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하다.
저자에게 서운한 부분은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아무나 쉽게 읽을 수 있게 썼더라면 저자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을 텐데 어려운 낱말과 잘 모르는 부분 때문에 공감하지 못해 오랜 시간 여행에서 얻은 사진과 지혜를, 저자의 의도대로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는 듯 하여 속상하다. 이 책을
읽고 나를 제외한 독자들이 저자와의 교감이 많다면 나의 무지를 탓하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천상병
시인이 하는 지청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바이칼 호숫가 리스트뱐카 마을의 창문 사진과 마르크 샤갈 그림의 창문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창의 형태를 가졌고, 창문이 크기와 모양도 각기 다르다.
유리창 위쪽 구석에 작은 창이 하나 더 나 있고, 여닫이
문이 하나 더 설치되어 있다. 추운 지방이라 외풍을 막기 위함일 것 같은데, 저자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창 속의 작은 창은 내 안의 나, 인간의
영혼을 비치는 은유의 창이고,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며, 넋이
머무는 자리이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맞이 하는 경계이기도 하기 때문에 러시아의 작은 창은 애환과 장구한
영혼이 숨어 있다고 하였다.
작은 창에 이러한 의미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감히 누가 할 수 있을까?
창이 집집 마다 다른 이유는 러시아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창문을 보고 집을
찾아 온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창문이 같으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제 집을 찾지 못한다는 믿는 러시아인의
발상에 오리엔탈리즘이 숨어 있는 듯 하다.
모차르트의 고향 찰츠부르크에서의 창은 음악의 신이 드나들었으며, 창을 통해 공기와 바람, 햇빛과 우주가 드나들며, 신비한 음악이라는 나무가 자랐다고 표현하였다. 표현이 형이상학적인
시구처럼 들린다. 예술가의 방은 자아가 표류하는 섬이란다. ㅋㅋ
모차르트가 표현한 음악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것이며, 모차르트를 모르더라도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행복에 빠질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음악은 철학이며, 행복이라는 표현 같다.
빈의 나무 벤치에서 책을 보던 여자는 눈 덮인 황야를 달리는 이리였다. 드디어 제목에 대항 궁금증이 풀렸다.
‘, 황야의 이리는 달리고 달린다. 세상은 눈으로
뒤덮여 있다. 자작나무에서는 까마귀가 날개 짓을 한다. 그러나
토끼 한 마리 노루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정말 나는 노루가 좋아,
한 마리만 찾을 수 있다면! 이빨로 앞발로 붙잡을 수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리. 내가 진정 행운아라면, 그 부드러운 뒷다리를 깊숙이 물어 뜯을 수 있고, 그 분홍빛 피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면 그러면 온방을 홀로 울부짖을 수 있을 거야. ……나는 달리며, 노루를 꿈꾸지, 달리며 토끼를 꿈꾸지, 겨울 밤 부는 바람 소리를 듣고, 불타는 듯한 목으로 눈을 마시지, 내 가엾은 영혼을 악마에게 가져가지.’헤르만 헤시의 시 ‘황야의 이리’ 중에서 ……
벤치에서 책을 보는 여자는 고독한 활자의 숲에서 노루나 토끼를 찾는 중이고, 우리는 창문을 통해 노루나 토끼를 찾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심오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볍기도 했지만, 황야의 이리가 되어 노루나 토끼 찾아야 한다는 명제를 재 확인 하게 되었고,
그것을 못 찾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눈을 마시며 재 도약해야 할 것이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