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

테일
- 작성일
- 2025.6.3
세주의 인사
- 글쓴이
- 장은진 저
작가정신
" 살면서 책을 정리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인생의 일부를 정리한다는 의미일까.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잊어서 새출발을 하겠다는 뜻일까.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떤 마음이 생기면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될까. 39"
헤어진 전 연인이 내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기억하고 들어왔었다는 시작은 불쾌함을 주었다. 훔쳐간 것은 없고 도리어 놔두고 간 것이 있었다고 해도 불쾌감은 여전했다. 헤어진 지 일 년이나 지났다니, 게다가 떠넘기듯 줘버린 것도 아니고 '부탁'한다니 언제고 되돌려받을테니 보관해달란 것일까. 무단침입으로 신고를 당해도 모자를 판에. 자유의 보장을 부르짖던 세주는 타인의 권리나 의사같은 건 발뒤꿈치로도 안 볼 자유도 포함해두었나 싶었다. 거기에 더해 이른바 '엑기스'인 책(18)을 두고 갔다고 " 나랑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뭐 그런 뜻일 수도 있을까. 21" 생각하는 동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해시태그를 붙여 'ㅁ'으로 시작하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때는 그래서 너희 둘이 사귀었었구나,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 뭐하냐너희들' 그래, 비밀번호 안바꿀때 알아봤다. 불만스럽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세주가 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세주없는 세주의 시간들 속을 동하는 천천히 거닌다. 밑줄 그은 책을 보며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은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화가 나겠지만 혹시,싶은 전 연인의 흔적이라면 다른 의미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왜일까 이유와 의미를 찾는 공백에서 동하는 자신 기억 속의 세주를 채운다. 누군가가 남긴 것들을 찬찬히 살피며 시간을 들여본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딱히 떠오르는 사람도 물건도 없었다. 흔적은 커녕 대상마저도 그렇게나 열심히 들여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 자신도 그렇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거울 앞에서 주름이나 기미를 찾아보았던 것 말고는. 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지내면서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왜 가지고 있는지 정리할수도 설명할수도 없었다. 미니멀한 삶의 방식이 유행할 때도 따를 수 없었던 버리고 줄이기를 냉장고에 담겨 입양된 세주의 책들을 보며 가늠해본다. 안되겠다.
동하와 세주가 연인으로 함께 한 6개월의 시간은 서로의 차이만 보였는데, 세주가 남긴 책과 화분으로 시작된 시간은 왜 서로가 달랐었는지를 헤아려 볼 수 있는 거리가 생겼다. 세주가 자신의 삶에서 언제든 한 번은 떠나야 했던 것처럼, 서로를 바라볼 수 있으려면 그만큼의 거리도 필요했었다는 듯이 서로가 없는 자리에서 밑줄과 사진, 시계나 케익을 통해 상대방을 바라보고 어긋났던 순간들을 이해한다. 처음엔 그런 둘의 모습이 꼴사나웠는데 세주의 집들이를 통해 그들이 함께한 시간동안 주고받은 것이 '다름'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서, 헤어진 사이인 것을 신경쓰지 않아서 라는 이유를 붙여도 왜 '엑기스'를 남기고 간 것이 동하였는지, 헤어진지 일년만인 상대의 무단침입에도 비밀번호를 왜 바꾸지 않고 '의미'를 찾았는지. 짜장면 냄새로 기억될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상처를 조금 더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 같아 결국엔 두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 그러나 막상 그 끝에 도착해 몇 달 살아보니 떠나왔나 싶을 정도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주는 늘 세계의 끝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머무는 곳이 끝이란 걸 몰랐을 테니 언제든 한 번은 떠나야 했다. 그러니 찾아 떠났던 그 험한 길과 시간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많은 걸 잃고, 그것도 모자라 일부러 버리고도 후회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이었다. 61"
쇼펜하우어는 불행은 우리가 외부에 의지하기 때문에 발생하며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외부의 조건은 불안정하며 불완전하다. 어떤 경우엔 그 의지처 자체를 잃게 되는 일도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오래도록 상실에 잠겨 있던 세주는 세계의 끝에서 외부가 아닌 내면을 향해 살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우리는 때로 낯선 여행지에서 자신만의 파랑새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며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우리가 찾던 것들, 채워야할 빈 공간이 생겨난 곳은 여행지가 아니라 떠나온 곳이다. 여행을 통해 다른 무언가로 채워 대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잃어버린 장소뿐이라는 사실을 파랑새와 세계의 끝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요즘은 사랑보다 이별이 더 쉽고,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 구분짓고 단절하는 일이 더 빈번하다. 세주와 동하도 그렇게 헤어졌다. 하지만 각자의 방향으로 향하는 마지막 헤어짐에서 둘 사이에 남은 것은 단절이 아닌 이해였다. 'ㅁ'을 주고받을 때는 남들 다 보는데에서 이러지말고 갠톡을 하던 dm을 보내던 둘이서 하세요, 싶었는데 마지막이 되고 나니 'ㅁ'이 갑자기 내 앞에도 놓여진 듯 했다. 어떤 'ㅁ'을 남겨야할까, 어떤 '마음'을 남겨야할까. '세주의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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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