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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16.2.6
정희진처럼 읽기
- 글쓴이
- 정희진 저
교양인
정희진이라는 저자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신문의 책 소개란를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어 읽다.
나 역시 저자처럼 여성학, 패미니즘, 젠더, 군사학, 평화학 등 생소한 것에 도전을 한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몸이 한 권을 통과한다는 ' 표지에 적힌 말처럼 저자의 독후감은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겐 불친절할 정도로 소개글이 없이 자신의 '관점을 담은 말'만 쓰여 원저의 내용을 소개하는 다른 독서 감상글과는 확연히 불친절하다. 그래서 이 책을 그저그런 독서 일기 정도로 접근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쉬울 것 같다.
정희진은 책의 맨 처음에 있는 프롤로그와 좁은 편력부터 범상치 않은 자기 고백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 독서기가 통상적인 책 소개글이나 감동받은 것을 옮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히면서, 자신에 대한 '불친절하다' 혹은 '어둡다' 혹은 '어렵다'라는 평가를 미리 밝혀 놓고 있다. 나 역시 도전할 만한 자극이 없는 책은 읽다가도 덮어버리는 입장이라 저자의 생각에 십분 동감하며 다소 긴 서문을 읽고 1장부터 정독을 했다.( 어디 어떻게 다르게 읽었다는 건가 궁금해하면서.)
이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글과 글이 서로 모순된 의견을 보이는 거나, 저자가 지나치게 넓은 범주를 다루려는 욕심이 앞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책의 원래 글이 신문 칼럼임을 고려하면 글의 완결성이나 통일성이 미흡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가 진정 불편했다.
첫째, 정희진이 전제하는 남성은 가부장적인데다 위선적인 꼴통 남성만을 전제하여 자기 의견을 늘어놓기에 마치 있지도 않은 적을 상정하고 나무라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어 가사 일을 돕는 맞벌이 남성이 극소수라는 전제, 여성의 능력을 자기 것인양 포장하는 파렴치한 지식인을 사례로 든 경우, 가사일을 끝까지 노동이라는 시선으로만 본다는 점, 여성의 위치를 어머니나 아내 혹은 여동생, 누이가 갖는 차이를 전혀 고려치 않는다는 점 등은 내내 불편했다. 이 시대의 남성들은 예전처럼 그 입지가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넓지 않다. 지금 남성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변화된 현재애서 어떻게 역할을 찾아갈 것인가는 남녀 모두 고민할 문제이지, 여성의 인권이 곧 민주주의요, 평화의 시작이라는 말은 남성의 역차별이라는 결과를 가져올지 않을까. 지금은 남녀 공히 가정이나 사회에서 대등한 파트너십을 설정하는 것이 시대적 관건임을 다른 이들도 알고 있다. 다만 그런 앎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데 남녀 모두 관습의 걸림돌이 있고 그것은 함께 타파해야할 요인인 것이다. 정희진은 자신이나 몇몇 선각자만 아는 양 답답하고 서운해하고 분노하며 의견을 피력한다. 이건 인간 관계가 같은 계급으로 둘러 싸인 지식인의 병패다.
둘째, 독서에 대한 지식인 혹은 먹물적 시각의 과잉이다. 저자는 어려운 글이 낯설고 좋고, 그런 문장을 이해하려면 문장에 사용된 인물이나 개념을 알아야 가능하다면서 '바바의 파농은 파농을 라캉으로 환원한 경우다'라는 문장을 이해하려면 세 사람의 사상을 다 섭렵해야 한다고 진지한 농(?)을 하고 있다.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독서는 결국 배경지식으로 전문성을 갖춘 자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행위일까. 그건 독서가 아니라 학문으로서의 읽기다. 저자는 학문으로서의 읽기와 교양으로서의 읽기와 여가로서의 읽기, 실용으로서의 읽기 등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방법으로 다른 것을 배제하고 폄하하고 있다. 마치 이 책 내내 저자가 비판한 남성들의 배제의 정치를 본인이 범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저자가 외서나 번역본을 많이 읽은 탓일 수도 있지만, 지나친 명사형의 남용과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는 비문의 남용이다. 생각을 명료하게 하겠다는 강박관념이 말의 끝맺음을 서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을 풀어 말하지 못하고, 명사형으로 끝내는 건 서술할 능력이 없는 것이지, 사유를 위한 여백을 남기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그나마 대안은 24시간 긴장, 타인 존중, 말 줄이고 경청, 자기 몸을 작게 하기, 중단 없는 주제 파악......나부터"(140쪽)
이게 우리말 어법에 맞는가. 국어든 영어든 모든 언어는 무언가를 나열할 때는 그 단어의 형태를 동일하게 해야한다. 명사형으로 끝맺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나 구절의 구조가 동일해야 열거할 수 있는 것이다. '작게 하기'라는 명사형과 '긴장, 타인 존중, 경청, 주제파악'이 어떻게 대등하게 나열되는가. 이 책은 도처에 이런 비문들을 나열하여 생각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면서 자기 글을 어렵다고 스스로 엄살을 부리는 건 난센스다. 모든 읽기는 정치적이라고 했는가. 그래서 저자는 규범에 맞는 글쓰기는 정치 권력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일부러 문법을 파괴하고자 했던가. 궁금하다.
그러나 이런저런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는 강점은 많다. 무엇보다 진지한 독서력과 그를 드러내고자 하는 진정성은 이 책을 정독하게 하는 힘이다. 또, 책 읽기의 의미가 '나'를 발견하고, 독서를 통해 위로받고 지침을 얻고, 삶의 외로움이나 우울을 견디게 한다는 것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도 공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학이란 학문이 이처럼 삶의 모든 것을 다루는 것임을 처음으로 알았다는 것, 그래서 여성 혹은 여성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즐거운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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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