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김대승 감독님은 ‘번지점프를 하다’를 만들면서 기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힘드셨던 장면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병헌과 이은주가 주연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거의 매 장면 힘들었는데, 아무래도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때가 가장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문제로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인우가 계단을 내려오다가 자판기 앞에서 현빈(여현수)이 새끼 손가락을 올린 채 친구들과 음료수를 마시는 모습을 보는 장면도 그랬어요. 저는 그 대목이 회상으로 가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부분이니까 감정을 좀 과한 듯 강하게 표현하는 게 좋겠다고 병헌씨에게 말했죠. 그러자 병헌씨가 하도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대본에서 한 페이지를 펴 보이며 “그러면 이 장면은 어떻게 하죠?”라고 말하는 거에요. 그건 좀더 뒤에 나오는 장면인데, 인우가 현빈의 멱살을 잡으면서 “너는 왜 나를 못 알아보니?”라고 울먹이는 장면이었죠. 병헌씨 자신이 보기엔 그 장면이 정서적으로 훨씬 더 강해야 하기에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에선 감정적으로 좀 절제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었죠. 그때만 해도 제가 신인 감독이다 보니까, 속으로 ‘아, 이 사람, 되게 말 많네’ 싶은 거에요.(웃음) 약간 기분이 상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결국은 병헌씨의 말에 꼬투리를 잡을 만한 부분이 없어서 의견대로 찍었죠.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렇게 했기에 극중에서 감정의 상승 곡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나 싶어요.

이동진=사실 이 영화는 신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운명적이고도 낭만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잖습니까. 저도 예전에 이 영화에 대해서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의 이야기를 뒤집어서 보면 사랑에 대한 이 영화의 태도가 무척 냉소적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아까 고은님 작가님이 말씀해주셨던 착상 뒷 얘기를 들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다시 들었고요.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유달리 과하게 말하잖아요? “영원히 너만을 사랑할 거야” “다시 태어나도 너만을 사랑할 거야” 같은 말들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천연덕스럽게 하는데(웃음), 저는 ‘번지점프를 하다’가 사랑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인 시선을 역설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본 거죠. 이 영화에서 태희가 죽기 바로 전에 인우가 한 이야기는, “나는 다시 태어나도 너만을 따라 다닐 거야”라는 말이었죠. 이 영화는 이후 정말로 태희가 다시 남자로 태어난 상황에서 그 말의 무게를 엄중히 저울에 다는 것 같다는 겁니다. 연인들이 쏟아내는 약속이란 게 그대로 지켜지려면 얼마나 엄청난 희생과 노력이 따라야 하는지를 판타지 멜로를 통해 반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영원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의문의 시선을 보낸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김대승=누구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죠. 판타지도 많이 갖고 계시고요. 그런데 감독으로서 그런 것들을 다룬 영화를 만들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 같았어요. 사람들이 모두 다 예쁘게 볼만한 가볍고 상업적인 멜로로 가야 되는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 뭔가 제 목소리를 깊게 담는 작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이 있었던 거죠. 결국 저는 두 가지 사이에서 선택하지 못한 채로 영화를 찍어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영화를 굉장히 무겁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한번은 제게 어떤 동성애자 분이 정중한 어투로 “안 그래도 세상의 편견 때문에 너무 힘든데, 도대체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냐”는 메일을 보내셨어요. 그 메일을 받고서야 제가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하지 못한 채로 영화를 찍었구나, 싶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 부끄러운 게 있어요. 이 영화 개봉이 불과 8년 전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동성애자를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훨씬 더 닫혀 있었거든요. 그래서 당시 홍보 팀에서 “동성애자 영화냐고 누가 물어보면 아니라고 답해주세요”라고 부탁했기에, 가는 곳마다 저는 아니라고 대답을 했죠. 그런 것들이 그 분들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제 한마디 한마디가 부끄럽고 죄송해요.

이동진=고은님 작가님은 이 시나리오를 처음 쓰실 때,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것 같은 그런 낭만적이고 신화적인 사랑을 믿으셨습니까.

고은님=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굳이 주제를 하나 말해보라고 한다면, 저는 극중에서 인우가 교사가 된 다음에 ‘다르다’와 ‘틀리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들고 싶어요. 언뜻 보면 흘려 보낼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제게는 그게 이 영화의 주제였거든요. 사람들마다 이런저런 사랑들을 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도 하죠. 저는 이 영화를 홍보할 때처럼, 동성애냐, 멜로냐, 퓨전 멜로냐, 하는 식으로 구분해서 말하는 게 좀 이상했거든요. 저는 그냥 멜로 영화를 쓴 거였으니까요. 동성끼리 사랑하는 것도 멜로 영화인데, 동성애 영화와 멜로 영화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저는 정말 이상하더라고요. 멜로라는 틀 안에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랑이 있는 상황에서, 저는 사랑을 특정한 틀로 규정지을 필요 없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끄집어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이 사람들은 그저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에요. 저도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동성애자 몇 분들로부터 메일을 받았는데, 어떤 분들은 무척 화를 내셨죠. “영화를 보고 나니까 우리들은 전부 죽어야 될 것 같다”고까지 하셔서 진심을 담아 답장을 열심히 썼던 기억이 납니다. 반면에 또 어떤 분들은 우리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이야기해줘서 고맙다고 하신 경우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저는 동성애 이전에 이 영화가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랑 이야기 중 하나를 다룬 멜로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서 상처받는 분들이 없으시길 바랄 뿐이죠.

이병헌과 이은주가 주연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이동진=동성애 이야기가 계속 나오니까 저도 잠깐 이야기를 할게요. 저 역시 이런 점은 의문이 들었거든요. 태희가 17년 후 현빈이가 아니라 현빈을 좋아하는 극중의 여학생으로 환생했더라면 아마도 영화가 다르게 끝나지 않았을까 싶었던 거죠. 이 영화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멜로적 판타지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을 장애물로 설정하는데, 이뤄지기 힘든 가장 어려운 관계로 동성애를 가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에 대한 논란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작가님은 쓰실 때 그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고은님=일단 저는 동성애에 대해서 전혀 거부감이 없는데, 극중 캐릭터를 거부감이 있는 사람으로 잡은 거에요. 평소에 동성애를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인우라는 인물이 그런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이야기였지, 동성애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이와 관련해서 극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동반 자살을 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썼거든요. 제 나름대로는 그 장면이 판타지라고 생각했어요. 그 순간에 둘이 번지 점프를 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들의 사랑이 계속될 거라는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였던 거죠. 그런데 다르게 보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제 의도는 두 인물이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동진=감독님은 어떠셨습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죽는 것으로 보고 연출하셨습니까, 아니면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만드셨습니까.

김대승=제가 여기서 만일 판타지였다고 이야기하면, “판타지를 그렇게 찍었어?”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웃음) 엔딩 장면에 대해서 제가 단정적으로 대답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전에 하와이 영화제에 초청받아 갔을 때, 샌프란시스코 게이 영화제 관계자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제게 오셔서 “당신 게이냐”고 물으시는 거에요. 제가 아니라고 답했더니 “그런데 어떻게 게이 영화의 법칙을 그렇게 잘 따르며 작품을 만들었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서양에서는 이 작품이 전형적인 게이 영화로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놀라기도 했어요.

이동진=이제 마지막 제 질문을 드리고 관객 분들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감독님은 번지점프를 해보셨습니까.(웃음)

김대승=저는 청룡열차도 잘 못 타요. 심지어 누군가 자신의 생일이라고 선물로 청룡열차 한번만 같이 타자고 해서 눈 딱 감고 탔다가 절교할 뻔 한 적도 있어요.(웃음) 그런 것 정말 무서워해요. 이 영화 촬영하기 직전에 투자하시는 분들과 함께 모였을 때 누군가 “우리 단체로 기념 삼아 번지점프 할까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저는 영화에서 손을 떼겠습니다”라고 했죠.(웃음) 앞으로도 번지점프만큼은 할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이동진=지금 ‘청룡열차’라고 언급하시는 것 자체가 그쪽과 거리가 엄청 멀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있는 겁니다. 요즘은 다들 롤러코스터라고 하잖아요.(웃음) 고은님 작가님은 왠지 해보셨을 것 같은데요.

고은님=네, 두 번 해봤어요.

이동진=한번 해보시고 나서 경험이 강렬해 시나리오 속으로 차용한 경우인가요, 아니면 다 쓴 후에 궁금해져서 해보시게 된 경우인가요.

고은님=두 번 다 각본을 끝낸 후에 했어요.

이동진=번지점프를 직접 해보니 어떠셨습니까.

고은님=첫번째는 너무 좋았고요, 두번째는 정말 무서웠어요. 두 번 다 친구들과 함께 갔는데 무섭다고 해서 저만 했어요.

이동진=제가 좀 궁금해지는 것은 번지 점프를 안 해보신 상태에서 시나리오 속에 어떻게 번지 점프 모티브를 넣게 되셨나 하는 점입니다. 무척 독특한 착상이잖습니까.

고은님=저도 어떻게 생각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렇지만 저는 환생도 안 해봤거든요.(웃음)

이동진=우문현답이네요.(웃음)

김대승=예전에 연출부랑 고은님 작가님과 함께 우이동에 있는 그린 파크에 간 적이 있어요. 점심을 먹다가 제가 뒤늦게 나가서 봤더니, 연출부 한 명과 고 작가님이 바이킹을 양 끝에서 타고서 너무나 유쾌하게 소리를 지르며 즐기고 계시더라고요.(웃음)

이동진=왠지 그런 스타일이실 것 같았습니다.(웃음)

관객1=영화 잘 보았습니다. 고은님 작가님께 질문하겠습니다. 요즘 영화의 크레딧을 보면 시나리오 작가들 이름이 여러 개 붙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혼자서 다 쓰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고은님=그 때도 그런 시스템은 있었어요. 여러 명의 작가가 같이 쓰는 경우도 많았죠. 그런데 ‘번지점프를 하다’는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쓴 시나리오였어요. 다른 분들 이름을 뺀 거 아닙니다.(웃음) 당시 혼자서 전부 다 쓰는 사례가 많지 않았던 터라 실제 내용 이상으로 제가 칭찬을 들었던 것 같아요.

관객2=인우와 현빈이 역에서 재회하는 장면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거기서 감독님의 원래 의도는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대화하는 식으로 찍고 싶으셨는데, 관객 정서를 고려해서 차창 유리창에 비춰진 인우와 태희를 보여주는 것으로 대체하셨다고 말씀하신 인터뷰를 본 것 같습니다. 이 장면처럼 두 사람간의 감정 선을 드러내는 대목 중에서 편집된 경우가 또 있었는지요.

김대승=그 장면은 원래부터 대본에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그렇게 찍은 것은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이 영화가 동성애 영화로 비쳐지는 것이 두려웠기에 자기 검열을 했던 경우였습니다. 애초엔 이 작품 속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것에서 깊어지는 것까지 제대로 요약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포기한 장면들이 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관객3=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번지점프를 하다’를 처음 봤습니다. 오늘 8년 만에 다시 보는데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태희와 인우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에 맞춰서 춤 추는 장면을 무척 좋아합니다. 감독님이 ‘혈의 누’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쓰셨을 때도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영화 음악을 쓰신 것은 감독님의 생각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번지점프를 하다’ 시나리오를 사서 봤는데 거기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대신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이 적혀 있더라고요. 왜 시나리오에서와는 음악 사용이 달라졌는지도 궁금합니다.

김대승=말씀하신 ‘번지점프를 하다’의 그 장면을 찍으러 태안에 갈 때였어요. 아시다시피 음악은 후반작업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의 음악이 ‘한여름 밤의 꿈’보다는 좀 무거웠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춤을 출 수 있되, 멜로디는 슬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 장면을 찍으러 가면서 동시녹음 기사에게 스피커를 가져와 달라고 했어요. 틀어놓고 배우들이 거기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하니까요. 버스 안에서 동시녹음 기사 분께서 고르라면서 CD를 꽤 많이 주시더라고요. 그때 왈츠란 왈츠는 다 들어봤죠. 그런데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귀에 딱 들어오는 곡이었어요. 그래서 그 곡을 틀어놓고 연습도 하고, 촬영도 했는데, 일단 그렇게 하고 나니까 나중에 음악을 바꾸기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최종적으로도 그 음악을 넣었습니다. ‘혈의 누’에서는 음악감독과 상의를 해서 클래식 음악을 쓰자는 원칙을 정하고 그렇게 골랐습니다.

관객4=연출을 전공하는 학생인데, 졸업을 앞두고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고은님 작가님은 이 시나리오가 데뷔작인데, 처음 쓰는 분의 작품이 어떻게 영화 제작자에게 연결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고은님=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냥 영화 시나리오가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영화를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는데 당시에 쿠앤씨 필름에서 작가를 모집하는 것을 보았어요. 습작해놓은 작품과 이력서를 내라고 했죠. 그런데 하필 제가 그 공고를 본 날이 마감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습작을 써 놓은 게 전혀 없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이력서를 시나리오처럼 써서 두 장 팩스로 보냈어요. 이력서 제목이 ‘최낙권 프로듀서와 고은님 면접보다’였죠.(웃음) 그게 독특했던지 영화사에서 연락이 와서 아까 말씀드린대로 남자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떠오른 모티브를 밀고 나간 이야기를 한 장짜리 시놉시스로 써서 드렸죠. 그 때 첫 반응은 “우리나라에선 아직 동성애 소재는 안 돼”였어요. 그래서 그것으로 끝났어요. 그러고서 1년쯤 지났는데 최낙권 프로듀서님이 독립해서 영화사를 차리고선 연락을 하셨더라고요. 저는 그때 계속 구성 작가로 일하고 있었고요. 최 대표님이 제게 “그때 그 이야기, 될 것 같아요? 시나리오 써서 줘봐요”라고 하시길래 써서 드렸습니다. 그랬는데 그게 투자가 되었고, 최 대표님이 만든 영화사의 창립 작품이 된 겁니다. 정말로 운이 너무나 좋았던 케이스죠. 무모했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갔던 게 그렇게 연결이 된 겁니다. 그때 제가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게 참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기에 연결이 잘 안 된다는 분들을 많이 만나는데, 저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동진=저도 하나 추가로 질문하고 싶습니다. 현재 충무로에서 감독이 되려면 몇 가지 코스가 있지 않습니까. 그 중에서 도제 시스템의 예를 들 때에 늘 김대승 감독님이 거론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다 그렇게 했지만 요즘은 무척 드문 경우가 됐으니까요. 김대승 감독님은 임권택과 감독님 밑에서 연출부로 여러 편을 함께 하셨죠? 10년을 그렇게 하셨는데, 사실 요즘 상황에서 그 정도 세월은 대단히 긴 경우잖아요. 그러다 ‘번지점프를 하다’로 데뷔하게 되셨는데, 당시에 연출부 생활을 오래 하면서 어떤 생각이셨습니까. ‘나도 이제 감독 데뷔를 해야 할 텐데’라는 조급함이 있으셨는지요.

김대승=조급함보다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제가 처음 연출부 생활을 한 것은 정지영 감독님의 영화 ‘하얀 전쟁’이었어요. 이후 임권택 감독님의 ‘춘향전’까지 10년을 했죠. 저는 시작할 때부터 10년 정도는 해야겠다고 봤어요. 그런데 점점 분위기가 바뀌어서 제가 후배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는 게 공포였습니다. 제대로 준비된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나가기로 결심하고 나서 ‘번지점프를 하다’에 착수하기 전까지가 제 인생에서 가장 춥고 힘들었던 기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다행히도 10년이라는 세월이 헛되지 않게끔 제 경력을 보시고 감독 제의를 해주시는 분들이 계셨죠. 그렇게 운 좋게 신인 감독으로 데뷔하게 됐어요. 요즘은 누구 밑에서 오래 연출부 생활을 한 뒤 감독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진 것 같긴 해요.

관객6=산에 올라가서 태희가 한 말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때 태희는 떨어져도 끝이 아닐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게 사랑에 대한 태희의 생각 같거든요. 그 대사에 대한 작가님과 감독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고은님=태희의 사랑관이 그런 거였죠. 태희라는 캐릭터는 겁이 없는데, 사랑이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를 취하죠. 세상 편견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어야 무모해질 수 있고 용감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대승=그 대사가 있으니까 나중에 태희가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고은님=또 그게 끝 부분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대목과 연결이 되잖아요. 번지점프를 하고 나서 죽지 않는다, 자살인 게 아니다라는 걸 한 번 더 이야기하는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