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나무
  1. 나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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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비학산 자락에 있는 밭에서 혼자 일을 하다가 소화와 이지숙이 생각나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삶을 위해서 고통을 행복으로 견디고 있었다. 아파도 슬프지 않았고, 모욕을 당해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았다.

  산에서 혁명을 실현하고 있는 사람들 염상진 하대치 안창민 정하섭 강동기 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당 딸, 무당 소화

 

  12월이 중순 고비를 넘기면서 해는 완연히 짧아지고 조계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리고 거칠었다. 어둠살이 번지고 있는 정 사장네 마당에는 차일이 높게 쳐졌다. 그 안에는 임시로 내건 두 개의 알전구가 내쏘는 밝은 불빛 아래 굿판을 벌일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었다. 중간 높이의 여덟 폭 병풍이 집 쪽으로 둘렸고, 그 앞에 굿상이 기다랗게 차려져 있었다. 굿상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조부 내외, 증조부 내외, 조부 내외 순서로 차려졌고, 위치에 따라 병풍에는 지방만 붙어 있었다. 정현동의 굿상은 왼쪽 끝이었는데, 병풍에는 지방만 붙은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한지를 오려서 사람형상을 만든 넋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옥색 모본단으로 지은 남자 한복이 발목에 하얀 버선까지 매달고 병풍에 걸쳐져 있었다. 병풍에는 묵으로만 친 여러 가지 화초들이 폭마다 쌍을 이루고 있었다. 굿상 앞엔 액상, 향로, 손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앞으로 잇대어 깔린 덕석 한옆으로는 무명 두루마기에 갓까지 받쳐쓴 네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북, 장구, 징, 아쟁 같은 악기가 줄 맞춰 놓여 있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대문이 활짝 열어젖혀져 사람들은 아무나 마음대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덕석 가장자리를 경계로 벌써 굿 구경을 온 사람들이 서너 겹을 이루었고, 병풍 뒤로도 빼곡하게 몰려 있었다. 그들은 끼리끼리 입을 맞추고 있었지만 머릿수에 비해별로 소란스럽거나 시끄럽지는 않았다. 굿이란 원래 권하는 사람이 없어도 구경할 만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고도 굿판이 벌어지면 이웃이나 근동에서 마음 써 보아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경사굿은 경사굿대로, 흉사굿은 흉사굿대로 서로 한자리에 마음을 모아 축하를 하며 즐기고, 애도를 하며 즐겼다. 아무리 가슴 아픈 흉사굿이라 하더라도 무당의 혼신을 다한 매듭매듭 풀이를 따라 굿은 흥겨움으로 막음하게 마련이어서, 기슴 미어지는 슬픔이나 아픔으로 시작된 굿도 어깨숨 내쉬며 더덩실 춤추는 기쁨을 서로 나누고 즐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당의 신통력이었고, 사람들은 그 신통력을 믿었고, 의지했다. 한바탕 흐드러진 굿판을 통해서 사람들은 평소의 미움도 삭이고 삶의 고단함도 위안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굿판에 모여들 때는 어떤 기대감으로 가슴이 흔들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되었다. (...)    

  소화가 병풍 오른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시에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뚝 멎었고, 잡이 네 남자가 앉음새를 고쳐 똑바로 앉았다. 치맛귀를 잡은 소화는 고개를 약간 수그린 자세로 굿상 앞으로 옮겨갔다. 길게 끌리는 치마로 발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가비얍은 움직임은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도 사르르 떠가는 듯싶었다. (...)

  소화는 하얀 모본단 치마저고리 차림이었고, 저고리섶, 소매깃,고름을 남색으로 받치고 있었다. 하얀 모본단의 우아한 색조 속에서 남색은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며 소화의 얼굴을 떠받치고 있었다.

  소화는 굿상을 향해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징을 왼손으로 받쳐잡고 징채를 오른손에 들었다. 굿의 시작을 알리는 안당이었다. 풍악의 전주가 울리면서 소화가 징을 가볍게 두들기며 가락에 실은 주문이 시작되었다.

  「... 앉으신 읍의 지덕은 해동조선 전라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그 한 지덕은 정씨 가문이요, 정중은 정씨 정중이요 정씨 가문 정정중께서 정성이 지극하여 대궐 같은 성주님을 모셔놓고 원근 선영님을 모셔놓고 이 잔치를 나서자 상책 놓고 상날 가려 중책 놓고 중날 가리고 생기복 덕일을 받아서 이 잔치를 나섰습니다. 찬독술 왼독술 산해진미 장만하여 마당삼기 뜰삼기 염천도우 시우삼기 야력잔치 나서서 불쌍하신 망제님을 씻겨서나 천도하자 이 잔치를 나섰습니다……」

 (...)

  줄기차게 노랫가락으로 주문을 외고, 쉼 없이 춤을 춰가며 그 긴 예식을 지치는  기색 하나 없이치러내고 있는 소화를 지켜보며 이지숙은 오히려 자기가 지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쌀이 수북하게 쌓인 소쿠리 가운데 혼대가 꽂혀 있었다. 혼대를 낙안댁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망자의 혼이 혼대를 타고 내리면 혼대를 잡은 사람의 손이 떨리고, 망자는 무당의 입을 빌려 소원을 말하는 손대잡이였다. 

  지전다발이 혼대를 감싸돌고, 낙안댁을 휩싸고 돌며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을 타고 주문이 흘렀다. 낙안댁의 손이 조금씩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지전다발은 더욱 격렬하게 바람을 일으켰고, 낙안댁의 팔도 따라서 심하게 떨려댔다.

  「임자 임자 나가 왔네, 임자 보러 나가 왔네. 엄동설한 설한풍에 오가도 못함스로 망망창공 떠도는디 임자가 불러 요리 왔네. 이승 이별하였으면 저승길로 가야는디 내가 워째 망망창공 울고울고 더도는지 그 연유사 임자 알제. 그 연유를 못 풀으면 이내 몸은 영겁톡록 불망귀신 못 면허니 임자가 풀어주소.」 (6권 12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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