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정드레스공식계정
  1.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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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 세트
글쓴이
송건호 등저
한길사
평균
별점10 (1)
껌정드레스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평생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을, 이른바 원체험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역사책을 읽다 말고 생각해 본다. 내가 나를 둘러싼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가장 오래 전의 체험은 무엇이었는지, 나는 왜 세상의 많은 책 중에서도 하필 역사책을 즐겨 읽게 되었는지를. 그러다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 내가 만나게 되는 사람은 바로 이십여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이다. 영원히 40대로 기억되는, 젊고 삐딱한 나의 아버지.


 


1979년 10월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우리 가족은 라디오를 틀어 놓고 둥근 상에 둘러 앉아 아침을 들고 있었다. 갑자기 라디오의 음악이 끊기더니,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이 흘러 나왔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어린 나는 그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제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는지, 난 밥숟갈을 든 채로 당장 북괴군이 쳐들어 올까봐 무서워 떨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랍게도 아버지의 첫 논평은 이랬다.  "그 쌔끼, 잘 뒈졌다!"


 


난 대통령 서거 소식보다 아버지의 그 논평에 더 충격을 받았다. 어린 마음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간첩인줄 알았다. 그당시 나는 교내 반공 글짓기대회 따위에서 소소하게 상을 타오던 부역소녀였기 때문이었다. 그 날 아침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장송곡이 라디오에서 흐르던 그 공간, 그 공기의 밀도조차 잊혀지지 않는다. 한편 아버지가 무서웠고, 한편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을 보는 시각이 있나 싶어서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이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까지 10년이 안되는 세월은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세월이었다. 늘 비판적이며 삐딱하고 세상과 불화했던 나의 아버지. 그 좋은 지능과 재능을 가족 부양이 아니라 사장과 싸우고 사표 던지는 데에나 사용했던 나의 아버지. 예술적 소질이 풍부했으며 감정 기복이 심한 성격과 진한 눈썹과 굵은 쌍꺼풀을 가진 전형적인 전라도 남자. 사춘기를 겪으며 난 결코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는, 부모 세대와 우리 현대사에 대한 보편적 몰이해의 경험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란 누구나 한 권의 역사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독이란 책뿐만 아니라 인간을 대상으로도 늘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내가 아버지를 오독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그에 대한 그리움과 미움 사이에서 힘든 10대를 보냈다. 그러다 아버지와의 화해의 계기가 왔다. 바로 대학 시험을 치룬 후, 내가 구립 도서관으로 하교하며 읽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독서체험은 나의 세상과 역사와 인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지금까지 내 독서의 방향을 어느 정도 규정지었던 것 같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한 마디로 해방을 전후한 우리 현대사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고전적 역사서이다. 1945년 해방 당시 우리 민족의 시급한 역사적 과제는 친일 청산과 자주적 통일 독립 국가의 수립, 토지개혁, 일제 식민지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왜곡된 사회경제구조의 변혁 등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남북 각각의 정치인들의 계산에 따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혹은 우리 민족의 미숙한 대처에 따라 대부분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된다. 결국 오늘날 한국 현대사의 절반 이상은 이 시기와 관련있는 셈이며 이 시기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은 더 몸집을 키워서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은 공룡처럼 남과 북, 양쪽의 사회를 활보하고 다니고 있다. 당시 나의 미국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교정할 수 있었던 점, 그리고 송건호, 염무웅, 백기완, 임헌영, 박현채 선생님 등 이후 내가 관심갖고 읽게된 필자분들과의 첫 만남이었던 점이 기억에 남는다.


 


다시 나의 아버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내게 이 책은 아버지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끔 만든, 그가 살아온 한국 현대의 모든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책으로 읽혔다. 나는 모른다. 5세에 해방을 맞이하고 10세에 내전을 겪었으며 급격한 경제 성장 와중에 노동자로 살고, 성인이 되어 선거권은 있어도 한 번도 대통령을 직접 뽑아 본 적 없는 경험을 가진 한 남자가 세상을 어떻게 보며 살았는지. 갑오농민전쟁과 여순항쟁와 광주민주화운동의 고장, 한국 현대사의 최전선에서 늘 피를 흘렸던 고장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친지들의 고통과 죽음을 목격한 사람의 마음에는 어떤 그늘이 있는지.  한국 현대사 독서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마음 속으로부터 아버지에게 뿌리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나의 매우 私的이면서도 史的인 독서 경험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덕분에 나는 세상과 사람과 역사를 제대로 읽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얼마나 사람이 현재의 상황만 보고 '무식해서 죄를 짓게 되는지'를 뼈저리게 배웠다. 비단 내 아버지에 대한 이해라는 개인적 경험을 떠나서 말이다.


 


품절, 절판된 책은 시내 서점들을 뒤지거나 중고책 판매 사이트를 통해 만날 수 있다. 그것도 불가능하면 도서관을 이용하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사책이 사람일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는가. 나이 들어 다른 책들을 읽어가면서 '아, 그 때 그 사람이 이런 연유로 이런 말을 했고 이런 행동을 했구나!'하고 이제야 그 사람이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진정으로 그를 그의 언어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없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평생을 지지하던 분이 대통령 되시는 것도 못 보고 떠나신 나의 아버지.


여순'반란'과 광주'사태'의 시대만 살다 가신 나의 아버지.


심지어 부역소녀였던 어린 딸에게 간첩이나 사회 부적응자로 잘못 읽히다 가신 나의 아버지.



아아,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역사책, 나의 아버지.


 


그래서, 내가 "버킷 리스트로 읽고 싶은 책"은 이십여년전에 읽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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