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읽기

moonbh
- 작성일
- 2023.5.28
한국 언론사
- 글쓴이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한성순보에서 유튜브까지
강준만의 <한국 언론사>는 1883년 한성순보의 창간, 1896년 독립신문과 뫼(매)일신문 창간 등의 개화기 언론, 일제강점기, 미 군정기를 거쳐 이승만 정권기, 1988 한글 가로쓰기 운동을 펼친 한겨레신문의 태동, 광우병, 세월호 촛불과 함께 태어난 문재인 정권기까지 언론의 역사를 담고 있다. 언론의 변천 흐름만 좇아도 역사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각 시대의 언론의 모습과 역할 그리고 흑역사를 낱낱이 파헤친 저작이다. 강준만 선생은 객관과 공정이라는 두 개의 척도로 기록에 충실하기로, 하지만 실제로 객관과 공정은 지향점일 뿐 영원히 도달할 수 없기에, 고민도 깊었으리라 여겨진다. 중간마다 불쑥불쑥 끼어드는 주관, 지나치면 왜곡의 영역으로. 이런 유혹을 물리치고 공정과 객관을 유지하기란 매우 곤란한 과제였을 것이다. 참고문헌만도 700여 개가 넘는다. 많은 건지 적은 건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특히 언론의 태도, “기술결정론의 독재”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하는 고민 또한 깔려있다.
도구적 언론관, 사상전파의 전송체, 기술결정론의 독재
조선조 말 근대 신문은 개화의 도구였으나, 여러 환경 때문에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 없는 제도였기에 처음에는 관보로 출발, 그다음에는 민간지의 형식일망정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신문 탄생 배경은 도구적 언론관의 출발점이다. 초창기 신문은 계몽, 이후 일제강점기 신문 일제의 문화 통치술에 따라 제한적으로, 지식인과 문인들이 자신의 주장과 사상을 전파하는 전송체라는 인식, 이런 인식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4.19가 가능했던 것은 이승만 정권의 느슨한 언론통제 때문이었다.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뒤통수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시신의 사진이 실리지 않았다면. 박정희 시대는 언론 길들이기로 언론계의 규모 경제실현과 특정 언론사 밀어주기, 언론인의 등용, 정권의 나팔수로…. 서울대생들의 1971년 “언론화형선언문”이 바로 이런 현상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박정희 정권기에는 언론노동과 분리돼 권언유착의 길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 퇴출, 이후 언론은 정치 권력에 종속된 가운데 자본증식에만 몰두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기의 사이비 언론인 단속, 삼청교육대, 언론 통폐합을 통해 언론 민주화운동을 탄압을 거쳐,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기술결정론, 즉, 사회변동의 원동력은 기술발전에 따른 것으로 계급의 문제를 덮어버리고 애써 외면하게 되는데...
김영삼 정권 이후는 기술결정론의 시대라 부른다. 이제 계급모순도 없는 세상, 한마디로 기술발전만이 시대를 바꾼다는 이론의 확산이 언론계를 지배하게 된다.
한국언론의 중요한 기능, 카타르시스 제공
개화기부터 지금까지 한국언론의 중요한 기능은 카타르시스 제공이었다. 대중문화도 마찬가지로 표현, 접근, 유통방식에 차이만 있을 뿐, 선전하거나 체제에 저항하는 건 다를 바 없었으며 수용자의 호응을 얻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언론과 대중문화를 포괄하는 한국 대중매체의 역사를 꿰뚫는 키워드는 카타르시스였다. 이것이 상례화는 늘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타협과 대화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의 미디어 수용자는 다른 나라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동질적, 중앙집중적, 한국사회의 독보적인 ‘쏠림’ ‘소용돌이’ 현상도 이런 특성의 산물이다. 뉴미디어 성장으로 다양화, 분권화가 나타나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쏠림과 소용돌이 현상이 나왔다.
한국인 생활의 한 복판에 미디어가 있었다. 미디어 사회는 좋고 나쁨을 떠나 그 명암을 살피는 게 중요하다.
브랜드 저널리즘, 민주주의 위기는 저널리즘의 위기
강준만 선생이 언론이 직면한 위험으로 브랜드 저널리즘을 꼽는다. 모든 기업은 미디어 기업이라는 표어로 대변되는 브랜드 저널리즘, 기업이 언론 의존도를 줄여나가면서 자체 미디어를 통해 광고와 홍보를 하겠다는 것은 언론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 모든 기업이 미디어 기업이 돼가는데, 언론은 어떻게 해야 공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씁쓸한 현상이다. 기레기라는 말로 대변되는 언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은 언론이 과거에 비해 나빠졌기에 생긴 현상이 아니다.
언론이 돈 버는 일에 솔직해져야 한다. 겉으로는 아닌 척, 속으로는 호박씨를 까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말이다.
소비자 정체성을 내세우는 수용자를 향해 시민 정체성을 추궁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 살리기는 소비자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시민의 정체성을 촉구해야만. 민주주의 위기는 저널리즘의 위기다. 사회변동의 원인을 기술발달에서만 찾는 기술결정론의 독재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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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