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1. '열정'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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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록바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대기업 임원 부인인 미씨 아줌마와 경주로 가서 엔조이 할 수 있는 기회도 마다했다. 그것은 순전히 초록바지를 생각해서였다. 모질지 못하여 사람을 만나면 거절하지를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내가 매섭게 관계를 끊어 버린 일은 과거의 행적으로 볼 때 기적같은 일이었다. 얼마나 내가 초록바지를 향한 마음이 간절했으면 그랬을까? 하지만 그것을 몰라주는 것 같아 애가 탔다. 어제 크리스마스 이브 같은 경우에도 촛불을 켜고 밤새 그녀가 오기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초록바지는 보기 좋게 나에게 바람을 맞혔다. 초록바지와는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어도 우리는 물과 기름처럼 각자 따로따로 떠다니며 도무지 섞일 수가 없었다. 나도 스트레스만 쌓일 뿐 마음 한 구석은 늘 허전하고 찝찝했다. 서로 눈빛만 보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서 척척 해주어도 뭐할 판에 속마음을 열어 놓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라는 사람을 경계하면서 한 발을 쑥 빼내고 미적거리면서 여차하면 튈 준비를 하고 있는 초록바지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레인코트와 미스 고 처럼 다른 여자들과는 쉬운 일이었던 그짓을 하는 것이 초록바지와는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다. 사랑한다면 못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살던 부산을 떠나와 낯선 타향인 울산에서 지내게 된 만큼 얼마든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며 재미를 볼 수도 있었지만 초록바지는 그런 즐거움을 외면했다. 울산이 너무 좁은 곳이고 가는 곳 마다 쫙 깔린 직장 사람들에게 들킬 것만을 염려해서 눈치를 살피는데 신경을 집중했다.


 


 내가 어찌어찌 해서 천신만고 끝에 초록바지와 여관방 까지 들어갔다고 해도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초록바지는 결혼을 하고 나면 준다며 애원을 하다시피 하는 통에 그 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다. 이럴 때면 옷을 입은 채로 올라타서 잔뜩 헛물만 켜다가 모텔을 나와야 했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로서는 혼전 관계를 부도덕한 일로 여겼으므로 몸과 정신이 피곤한 일일 뿐이었다. 


 


초록바지와 나는 생각하는 점들이 달랐다. 남자의 돌출한 남근이 공격적인 창을 대변한다면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자궁은 날아드는 창을 막아내는 방패였다. 자궁은 깊고 음흉했으며 밑도 끝도 없는 진창이나 함정 같기도 했지만 창이 달려들어 점령해야만 하는 고지였다.


 


- 죽고 싶어요?!


 


- 한 번 해 보자~아


 


- 내가 지금은 안된다고 했잖아요


 


- 어디 손이 널름 널름 넘어와요! 손목 잘라져요~


 


- 아이, 미치겠네.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손이 초록바지의 사타구니로 들어가면 곧이어 도끼날 같은 손바닥이 날아와 아프게 찍었다. 둘은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벌였을 뿐 별 진척은 없었다.


 


 여자의 자궁은 한없이 안으로 숨어 들어가 들쑤시고 들어오는 창을 안에서 훤하게 꿰뚫어 내다보며 눈만 껌벅일 뿐이었다. 방패가 그럴싸한 명분을 둘러대면서 기를 쓰며 들어오려는 창을 막아 낼 때는 근엄하기조차 했다. 장난스럽게 찔러대며 다가오는 창에 대해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방패를 치고 옥문을 걸어 닫았으며 제법 쓸 만 하게 보이는 창에 대해서는 방패를 걷어치우고 한 없이 옥문을 넓혀 창의 공격을 깊게 깊게 받아들였다.


 


남자들은 여자의 일관성을 가늠할 수 없어 헷갈려하며 괴로와 했다. 늘 창을 찔러대는 남자들은 마치 군인이나 무식한 곰처럼 허겁대었고 옥문을 열고 창을 찔러대기만 하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으쓱거렸다. 하지만 여자들은 사내의 창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를 귀신처럼 알아내며 문을 열고 닫았다. 


 


남자들이 여자를 사귀게 되면 자기네들끼리 흔히 <뜸 들이지 말고 일단 자시고 보라> 는 말이 있었다. 남자는 일단 여자를 범하고 나면 그 여자는 자기 여자나 되는 것처럼 생각할 만큼 단순했다. 여자는 한 번 주고 나면 그 뒤 두 번 세 번 주는 것은 문제도 아니므로 일단 한 번 관계를 하게 되면 여자의 코를 꿰는 것이라는 소리였다. 


 


남자가 그 짓 한 번 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여자에게 매달리는 것은 해볼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자가 그것을 지키려 드는 것은 손해보기 십상인 거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것은 일종의 거래와 같은 것이었다. 좀 복잡한 거래... 여자들은 것은 지금 사귀는 남자 말고도 언제든지 좋은 남자들과 관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런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완력으로라도 그런 여자의 꿈을 짓밟아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여자가 저지르기 쉬운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런 못된 남자는 과감히 버려야 하지만 종종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서다가 걸려들어 희생이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남자가 여자의 자궁으로 들어가서 뿌리를 파대며 절정을 맛보고 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달랐다. 오랜 기간을 동안 혼전관계는 잘못된 것이라는 교육을 받아 왔을 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불효로 까지 연결해서 생각하는 등 복잡했다. 게다가 주변사람의 눈과 귀도 무서웠다. 함부로 놀아나는 여자로 오인이라도 받게 되는 날이면 그 숫한 가능성 마저 잃었다. 그러니 사람의 눈을 피해 그 짓을 해도 흥이 날리가 만무했다. 한마디로 그짓은 대개 고역 중에서도 상 고역이었다. 설상가상 임신이라도 하는 날이면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등 운명이 바뀌는 일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그릇의 쓰임새가 결정이 된다. 밥그릇, 국그릇, 김치그릇, 간장종지 하는 식으로 담기는 내용물이 중요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본질이 규정되었다. 남자에게는 태생적으로 여자를 정복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담겨져 있었다. 여자에게 있어서 혼전관계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여자들이 희망하는 바처럼 그렇게 오래 기다려 줄 수가 없었다. 개중에는 더러 끝까지 상대 여자를 지켜 주다가 결혼하고 난 뒤에 관계를 맺는 남자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지 일상에서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남자는 성욕을 억제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허구한 날 눈만 뜨면 그 짓을 하자며 치졸한 짓까지 마다하며 매달리는 것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만일 안주면 술집에 가서 다른 여자들한테 줄 것만 같은 불안한 마음에 싫더라도 그냥 몸을 벗고 누워 대어 주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한 번 더 주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정신적인 교감이 충분한 상태에서 자신들의 자궁을 열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이론이고 말 그대로 희망일 뿐이었다. 남자라는 그릇에는 여자를 정복하려는 욕구가 있었고, 여자는 우아한 사랑을 위한 서사(敍事)를 담고 싶어 했다. 말하자면 정신적인 사랑을 먼저 그릇에 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덤벼드는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되면 늘 우는 아이에게 젓을 주어야하는 등 힘이 들고 피곤한 일이 되었다.


 


 


나는 초록바지를 만나면서도 만족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만일 초록바지가 레인코트나 미스 고의 적극성을 가졌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완벽했으리라. 레인코트나 미스 고는 무엇이든 주고자 했던 관능적인 여자들이었다. 반면 초록바지는 정적 타입으로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사랑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제 때에 얻을 수 없는 현실 앞에 배신감과 일종의 무력감을 느꼈다. 나 역시 속물이었기에 초록바지를 어떡해서라도 정복할 수 있는 묘책을 찾아야만 했다.


 


 


 나의 동태를 엿보고 있던 초록바지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초록바지는 한 풀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학원 강의를 마친 나는 크리스마스 날 저녁 약속한 시내 커피숍으로 갔다.


 


 


- 아니, 어제 어떻게 된 거야?, 어제 한 숨 못자고 기다렸는데 안 오면 어떡해?


 


 


- 호호호, 많이 기다렸죠!, 눈이 쏙 들어갔네요...어제는 그런 사정이 좀 있었어요


 


 


- 사정은 무슨? 대체 어제 어디 있었어?


 


 


- 부산에 갔었어요.


 


 


- 부산?, 거기는 왜?


 


 


- 아팠어요. 감기 몸살이 심해 도저히 갈 수가 없었어요, 다음날 출근도 해야 했고...


 


 


- 그러면 못 오면 못 온다고 연락이라도 해 주어야 하지 않아?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 아이, 전화를 하면 청산씨가 잘 넘어가겠네요?!. 꼼짝할 수 없었어요


 


 


-(.....)


 


 


몸이 아파서 올 수 없었다는 말에는 더 이상 어떤 추궁도 할 수가 없었다. 초록바지는 내가 더 이상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아프다는 핑계를 둘러댔다. 세상에 몸이 아프다고 하는 데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본인이 싫어서 안 나온 것이므로 더 이상 눈치 없게 따져 묻지 말라는 무언의 금기를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초록바지는 이리저리 어려운 고비마다 용케도 피해갔다. 내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초록바지는 교활하게 멀리 달아났다가 사태가 진정되면 내 동태를 살피면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나를 이상하고 구질구질한 남자라고 여겨 버리거나 잊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다 도둑놈이라고 귀에 못에 박히도록 이야기를 들었기에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어떡해서라도 초록바지를 산채로 잡아서 요리를 해야만 한다고 마음 먹었다. 나는 여자와 그 짓을 해야만 흡족함을 느끼고 다른 일도 잘 할 수 있었으며 내가 원하는 여자와 그 짓을 할 수 없으면 왠지 모를 불안감에 내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어지는 사내였다.


 


 


 


얼마 전 알고 지내던 레인코트의 친구인 명희를 만나 레인코트가 서울로 시집을 가서 사내아이를 하나 낳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명희는 평소답지 않게 차분했으며 레인코트가 결혼해서 남편과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결혼을 했고, 사내아이를 낳았고,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정도의 선을 넘지 않았다. 나는 궁금했다. 레인코트가 서울로 가서 현재 남편과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알고 싶었으나 굳이 지난 일을 가지고 따져 묻지 않았다. 지금 와서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만 지난 날 레인코트가 임신했다가 지워버린 아이를 생각했다. 그 아이가 태어났으면 지금쯤 제법 커서 걸어 다닐 것이다. 레인코트는 이제 완전히 내 곁을 떠나 자신만의 장막을 짓고 주어진 삶을 주관하고 있을 것이다. 레인코트는 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다. 집안이 부유했고 심성이 따뜻했던 레인코트는 아마도 모르긴 모르되 이제 가정을 꾸려 자신의 모든 열정을 가족들에게 쏟아 부으며 잘 살아가고 있으리라. 나는 정녕 멀리서나마 레인코트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었다.


 


레인코트가 떠나간 빈자리를 나는 초록바지를 통해 메우고 있다. 하지만 내 처지가 때로는 실망스러웠다. 초록바지와 그 짓을 하느냐 마느냐로 지리한 실랑이를 벌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초록바지와 나는 두 남녀관계의 본질적인 부분에는 접근도 하지 못했으니 뽕을 뽑는 일은 요원했다. 


 


초록바지는 초록색을 사랑할 만큼 차분하고 청순했다. 그녀는 잡스럽지가 않았고 예민했다. 그녀는 목적지를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절차를 더 중요시 여겼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절차가 좋지 못하면 모두 헛것으로 여겼다. 그녀는 일종의 도덕적 관념에 갖힌 것 같았다. 나 같이 성질 급하고 조급한 사람은 초록바지의 답답한 태도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초록바지는 모든 일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한없이 진중했고 사람을 사귀어도 오랜 시간을 두고 은밀하게 가까워지면서 겪어 보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내 뜻대로 쉽게 살아온 나는 그런 초록바지의 느긋함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초록바지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뭔가 새로운 묘책이 필요했다. 나는 이런 저런 궁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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