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이 책

mujintree
- 공개여부
- 작성일
- 2020.4.21
시리 허스트베트의 작품을 여덟 권째 출간한다. 소설 네 권, 에세이 네 권으로, 이번 책 《에로스를 위한 청원》은 네 번째 에세이다. 허스트베트의 글 스타일, 예술에 대한 지식, 정신분석·철학 등을 아우르며 주제를 펼쳐나가는 그 심도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독서의 기쁨을 기대할 만한 책이다. 문장 자체의 아름다움, 단어를 선택하고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의 정교함, 감정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각들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매혹적인 도발이 변함없이 제 자리를 빛내며 우리를 끌어당긴다.
《에로스를 위한 청원》에는 총 12개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역시나 주제가 다양하다. 한 개인과 그를 만든 장소, 나와 타인, 욕망과 에로스, 개인적이면서 몰개성적인 말들, 여성과 남성… 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그 경계를, 그 모호한 사이를 깊이 바라보고 있는 시리 허스트베트를 만나게 된다. 그곳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의 경계이고, 그 개념들을 가장 예술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내는 허스트베트가 바라본 ‘사이’다.
글의 주제가 자신이 성장했던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의 시골이든, 복장도착증이든, 아니면 유명 작가의 소설이든, 인문학자이자 소설가인 허스트베트의 에세이는 어느 것도 쉽게 지나칠 수 없다. 그녀는 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을 보고, 그곳에 드리운 빛의 이면을 바라본다. 이 책에서도 역시 가벼운 터치와 완벽한 명료함으로 그녀는 문학과 삶 둘 다를 가리는 문화적 편견을 벗겨내고, 작가라는 존재들에게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다중인격을 탐구한다.
20세기의 여성이 코르셋을 지지하고, 남자가 되어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고, 이 시대에 에로스를 변호하는 것이 가능한가? 허스트베트라면 가능하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자 역시 성적인 대상이고, 성적 감정과 애정은 엄밀히 다른 것이며,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중성이 존재하고, 욕망의 난투극 뒷면에는 경계가 불분명한 영토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꿈과 소망의 국경지대가 있음을 간파하고 있기에.
이 책의 제목과 같은 글 <에로스를 위한 청원>에서 허스트베트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누군가와 구분되는, 어떤 ‘마술적’인 매혹을 두른 존재로 만드는 건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철저히 비이성적이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상상의 소산인, 마법에 걸린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에로틱한 “매혹이 사라지지 않는 건, 여전히 닿을 수 없는 면이, 낯설고 나를 밀어내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여성에게 “유익하지” 않은 문화적 형식을 전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성적 흥분의 문제를 큰 용기를 내어 제대로 다루지는 않는 미국 페미니스트 담론을 예로 들며, 허스트베트는 에로티시즘은 성적 자유와 동일하지 않고, 법적으로 간단히 해부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심장의 문제에서 벌어지는 항구적인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내어주는 모호성과 신비를 잃지 말 것을 간원한다.
허스트베트는 이 책 《에로스를 위한 청원》에 담긴 여러 편의 에세이에서 자신의 분절된 자아에 대해,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그녀를 작가로 다듬어갔는지에 대해 엄중하고 정직하게 써 내려간다. 또한,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피츠제럴드, 찰스 디킨스, 헨리 제임스의 작품들에 관해 흥미로운 통찰과 깊은 이해로 이야기한다.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허스트베트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아닌가, 라는 문제를 논한다. 평범한 세계를 요정의 숲으로 바꾸는 피츠제럴드의 밀도 높은 ‘형용사’의 매혹에 사로잡히고, 상투성의 화신처럼 보이던 머틀이 티슈페이퍼에 싸서 서랍 속에 넣어둔 개목걸이에서 심오한 슬픔을 읽는다. 그들의 언어가 다 표현하지 않은 저변까지 들여다보는, 허스트베트의 철저한 ‘읽기’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보스턴이라는 황막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 《보스턴 사람들》을 쓴 헨리 제임스에 관해서는, “헨리 제임스는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경험을 언어로 포착하고 수수께끼 같은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명확히 표현하는 일이 가슴 저미게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그가 추구했던 야심이었고 나는, 그의 충실한 독자 중 한 명으로서, 그래서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지적이고 사변적인 동시에 열정적이고 에로틱한 허스트베트의 글들은 텍스트와 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에로틱한 긴장이 문학과 예술, 나아가 인간성의 심도深到를 어느 경지까지 확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이다. 길거리의 노숙자라도, 대도시에서 스치는 타인도, 어머니와 분리불안을 겪는 어린아이도 충분한 애정을 가진 독해자 앞에서는 “자기만의 이야기”와 “대단하고 풍요로운 내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좋은 독자(문학적 교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질이다)는 스스로 채워 넣을 여백을 원한다. 독자는 누구나 자기가 읽는 책을 쓰고, 거기 없는 것을 공급한다. 그 창조적인 발명이 그 책이 된다.”고 믿는 허스트베트의 자전적이고 비평적인 에세이들을 묶은 이 책은 나와, 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타인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런 두 인격이 함께 살아가는 장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말로 다 표현되지 못하는 이면을 헤아리게 하고, 모든 개념의 사이에 있는 회색의 영역을 바라보게 하고, 에로티시즘이 우리에게 주는 마술 같은 매혹을 잊지 않게 한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