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하 style essay

munhak2008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3.7.17
내가 써야 한다
머릿속에 인물이 떠오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인물의 입으로 말을 시켜보는 것이다. 스토리 라인이나 플롯, 주제는 다음 문제다. 반드시 그 인물이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작가와 인물이 치르는 일종의 면접 같은 것이다. 소설을 언제 구상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집필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특정할 수 있다. 바로 등장인물이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을 작가가 받아적는 순간이다.
나는 모니터의 텅 빈 공간을 바라본다. 초고를 쓸 때의 나는 ‘writeroom’이라는 프로그램을 쓴다. 이 프로그램은 모니터 화면 전체를 새카맣게 덮어버린다. 마치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의 서문에서 묘사한 막막한 우주공간을 보는 기분이다. 이번 소설은 일인칭시점 화자인 만큼 더더군다나 주인공의 말로 시작되어야한다. 한참을 이 텅 빈 우주와 씨름한 끝에 마침내 첫 문장이 나온다. 오랫동안 내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인물이 마침내 입을 여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들은 언제나 경이롭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인물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신뢰할 수 있다고, 내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13년 2월 초의 일이다. 나는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갔다. 속도는 매우 느렸다. 하루에 한 문장, 혹은 두 문장밖에 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답답해하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기억을 잃어가는 늙은 연쇄살인범의 속도에 내가 맞춰야 한다는 것을. 그러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조금씩 쓰고 오래 쉬었다. 쉴 때는 니체를 읽었다. 최승자 시인이 오래전에 번역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을 써나갈 때마다 나는 내 인물들에 대해 상세한 정보들을 ‘수집’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그 인물이 읽었을 법한 책의 목록’들이다. 『빛의 제국』의 주인공 기영은 바쇼의 하이쿠를 읽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제이는 사람들이 재활용품 수거함에 던져놓은 책들을 마구잡이로 읽는다. 그런데 이번 소설의 주인공은 니체와 그리스 비극을 읽을 것만 같았다. 먼지 쌓인 책들을 꺼내 책상 한쪽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들춰본다. 소설에는 인용하지 않았지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보라! 나는 나의 지혜에 지쳤으니, 흡사 지나치게 많은 꿀을 모은 한 마리 벌과도 같다. 이제 내겐, 달라고 내미는 손들이 필요하다.”
“피와 경구로 쓰는 사람은 읽혀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외워지기를 원한다.”
“실로,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가 만든 인물이지만 그가 읽었음직한 책, 예컨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나가면서 그에 대해 훨씬 더 분명하게 알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묘한 기분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머릿속에 들어 있는 뭔가를 종이에 옮기는 게 아니다. 훨씬 미묘하고 복잡한 과정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미 쓴 것과 아직 쓰지 않은 것 사이의 끝없는 되먹임 과정이다. 이미 쓰여진 것들이 앞으로 쓰여질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라 하더라도 이미 쓴 것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소설은, 소설 속의 인물은 손님처럼 찾아와 서서히 작가를 지배한다. 소설을 시작할 때 100의 자율성을 갖고 있던 작가는 마지막 문장을 쓸 때는 0의 자율성을 갖는다. 작가는 이미 쓴 문장에 위배되는 그 어떤 문장도 쓸 수 없는 존재다. 소설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작가는 더욱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데, 어떤 작가는 이 상태를 좋아하고 어떤 작가는 싫어한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연재하던 막판에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후자였던 것 같다. “안나라는 이 여자, 정말 끔찍하다. 이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전자다. 나는 인물과 이미 설정된 전제들에 복종하고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신인작가 시절에는 내가 한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마르코 폴로처럼 낯선 땅을 찾아가는 여행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겨우 허락을 받고 들어간 그 도시에서 나는 인물들을 알아가고 그곳의 풍습을 익힌다. 그런데 언젠가는 그곳을 떠나야 할 운명이다. 그러니 도시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제는 친숙해진 인물들로 가득한 그 도시를.
소설이 마무리될 무렵에 10년이 넘도록 내 소설을 편집해온 편집자와 저녁을 먹었다. 편집자가 물었다.
“새 장편은 언제 시작해요? 이제 슬슬 시작할 때 안 됐어요?”
“실은 짧은 장편 하나를 마무리하는 중이에요.”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편집자가 내심 깜짝 놀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원고 언제 볼 수 있어요?”
“곧이요.”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었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점점 더 나는 새로운 소설을 시작했다는 것,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함구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비밀로 하고 싶었다. 나만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밝히는 순간이 바로 내가 그 도시를 떠나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영원히 그 도시에 머물 수는 없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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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