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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암 투병, 실명 위기, 아들의 죽음



시련의 삶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故 이민아 목사


 


 


 



 


 


지난 3월 15일,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장녀인 이민아 목사가 위암으로 별세했다. 이 목사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첫 결혼 후 30년 동안 웃은 날보다 눈물로 보낸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 목사는 고난 속에서 희망을 피워냈고, 죽어가는 육신을 일으켜 많은 이들의 삶에 생기를 더했다. 땅과 하늘의 경계를 허문 이 목사의 삶을 본지와의 생전 인터뷰와 그이의 저서를 통해 재구성했다.


             취재 김수석 기자 |사진 매거진플러스 |자료제공 <땅에서 하늘처럼>(열림원 02-3144-3700)

 


 


故 이민아 목사는 위암 말기로 올해 초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상태가 호전돼 각종 간증집회에 참석하고 영성고백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다 두 달여 전부터 복수가 차오르는 등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일체 활동을 중단하고 서울강북삼성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다 향년 54세로 소천했다. 이 목사는 병실에서 기도를 드리던 중에 조용히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목사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과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이 목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조기졸업하고 결혼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미국 LA지역 검사를 역임한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고 이혼, 암 투병, 실명 위기, 첫 아이의 사망 등 고난의 삶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계속되는 역경 속에서도 이 목사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건 종교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1992년 세례를 받은 그이는 2009년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병환과의 사투 속에서도 이 목사는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이 적어 내려갔다.



“저는 지금 위암 말기의 환자라고 해요. 그러나 제 마음에는 차고 넘치는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 설사 내일 죽는다 해도 제 영에 가득 찬 사랑과 믿음을 나누고 싶어요. 남은 삶의 한순간까지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이어령,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이민아 목사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이어령 전 장관을 영성의 세계로 인도하기도 했다. 평소 애정표현에 인색한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그를 신앙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었다.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된 딸에게 갑작스레 실명이 찾아온 것이다.
이성과 과학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다고 믿었던 이 전 장관은 어둠 속을 헤매는 딸의 모습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고도근시와 과로로 인해 망막이 손상되었어요. 세상이 점점 더 흐려졌죠. 그러다 종국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고 하더군요. 유명하다는 안과를 다 찾아가봤지만, 수술할 수 없다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됐죠. 아버지에게 숨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하와이로 찾아오셨어요. 평상시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쩔쩔매며 설거지를 하다가 들키고 말았죠. 아버지께서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거예요.”



결국, 이 전 장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딸이 믿는다는 신에게 약속한다. 당신이 우리 딸의 눈을 뜨게 해준다면 내 남은 일생을 당신에게 바치겠노라고. 이 전 장관이 그렇게 기도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목사는 기적적으로 시력을 되찾는다. 약속을 지켜 신앙인이 된 이 전 장관은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자신의 기도가 딸의 눈을 뜨게 한 게 아니라, 딸이 자신의 눈을 띄웠노라 말한다. 이 목사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고 눈을 감았지만, 어린 시절의 이 목사에게 이 전 장관은 무심하고 매정한 아버지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바쁘셨고 애정표현에는 무척 인색하셨어요. 아버지의 품에 마음껏 안기지도 못했지요. 게다가 아버지의 딸답게 살려고 애쓰다 보니 스트레스가 상당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예민하고 쉽게 상처받는 아이가 되었지요.”



이 목사의 채워지지 못한 애정의 욕구는 발화점을 찾지 못한 화약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다 대학에서 만난 한 남자를 통해 사랑의 감정은 일시에 불이 붙는다. 그이의 가슴에 불을 지핀 남자는 당시 무명작가에 지나지 않았던 김한길 전 문화부장관이었다. 이 목사는 전 인생을 걸고 사랑에 뛰어들었고 아버지의 반대를 뒤로한 채 스물두 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그리고 첫사랑인 남편과 함께 부모의 손이 미치지 않는 미국으로 도피하다시피 떠났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시작한 결혼생활은 결국 5년 만에 끝나고 말았어요. 쌀을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상황에서 아이까지 혼자서 키워야 했어요. 그랬지만 반대를 무릎 쓰고 한 결혼이라 이혼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죠. 그렇게 3년을 혼자 버티다가 재혼했어요.”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이 목사는 한국에 있는 부모에게 얼굴을 내비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힘들다”고 말하며 품에 안겨 울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아이를 데리고 한국을 찾았다. 예상과 달리 아버지는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아빠, 창피하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사과를 건네니 아버지는 ‘네가 지금 내 걱정하게 생겼니? 그냥 쉬어라’고 하셨어요. 그 말 한마디에 아버지의 사랑이 제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전해졌죠. 나를 쫓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오히려 반기고 보듬어주셨어요. 처녀 때 쓰던 방을 비워놓고 언제나 저를 기다리고 계셨죠. 그날 밤 저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을 잤어요.”


 




 


 


계속되는 고난과 맏아들의 죽음


 


이민아 목사는 재혼한 후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바랐다.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며 그저 평범한 삶을 꿈꿨지만, 운명은 그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1992년에 갑상선암 선고를 받은 뒤 두 차례나 재발하는 아픔을 겪었고, 당시 열 살이었던 둘째 아들은 자폐아 판정을 받았다.



“둘째가 다섯 살 되던 해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또래 아이들과 다른 행동을 했어요. 그 정도는 점점 심해져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기고 중학교도 1년을 겨우 다니던 중이었는데 그제야 아이가 자폐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막막했어요. 2005년 당시에는 캘리포니아에 아이가 다닐 만한 학교가 없었어요. 수소문 끝에 제가 보조교사로 일하는 조건으로 아이를 받아줄 수 있다는 학교를 하와이에서 찾았죠.”



잘나가던 변호사 생활을 접고 아이의 학교에서 보조교사로 풀타임 근무를 하려니 생활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지만 이 목사의 절실한 기도와 헌신적인 노력으로 아이의 상태는 크게 호전되어 갔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이 목사의 눈은 점점 그 기능을 잃어갔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목사는 기적적으로 시력을 되찾았고, 동시에 이 전 장관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제 아들은 10년 동안이나 낫지 않았고, 제 눈은 박리 현상으로 7개월 동안 보지 못했어요. 게다가 저는 투병 중이었죠. 하지만 아들의 상태는 몰라보게 호전되었고, 저는 시력을 회복했어요. 의사가 호르몬 암이기 때문에 절대 완치가 안 된다던 갑상선암에서 나았습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눈에 보이는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신은 그이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혹독한 시련을 안긴다. 이 전 장관이 세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맏아들이 원인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목사가 스물세 살에 낳은 맏아들은 그이에게 기쁨이자 자랑이었다. 사망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맏아들은 버클리대학을 나온 수재였으며 누구보다 건강하고 밝은 아이였다.



“제 아들이 죽었을 때보다 저에게 더 큰 환난은 없었습니다. 그때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저에게 더 이상의 나쁜 소식은 없었어요. 정말 살아갈 소망이 끊어져서 온몸에 질병이 왔습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고, 멀쩡하던 손가락이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심한 신경통이 왔어요. 그리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고 피가 말라서 악성 빈혈이 생겼어요. 3개월 동안 침대에서 내내 울기만 했어요.”


 




 


 


그녀가 남기고 간 것


 


죽을 만큼 힘이 들 때마다 이 목사는 신앙에 더욱 매진했다. 그리고 신앙을 통해 아들의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맏아들은 이미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이 목사의 가슴에도 남아 있었다. 그러니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이 목사가 해야 할 사역은 많이 남아 있었다.



“아들의 무덤에 묘비를 세운 날 꿈을 꿨어요. 그 꿈속에서 하나님이 제게 ‘이 아이는 지금 아버지 집에서 편히 쉬고 있다. 슬퍼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날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 유진>이라고 썼던 묘비명을 <유진 김, 아버지 집에서 이제 편히 쉬고 있습니다>라고 바꿨어요. 지금도 아들이 보고 싶을 때는 그 묘비명을 떠올려요. 아들이 내가 항상 가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고 생각하니 울지 않을 수 있었어요.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죠. 더 좋은 곳에서, 웃는 얼굴로요.”



그 이후 그이는 2009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의 각 주와 호주, 푸에르토리코, 중국, 아프리카 케냐, 이스라엘 등을 돌며 사역과 전도활동을 펼친다. 이혼, 암, 실명 위기, 아들의 죽음 등 세상의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지만, 이 목사는 이 모든 시련이 축복이라고 말한다. 이 목사는 자신을 옥죈 삶과 화해하고 영안을 찾았다.



“제게 고난을 하락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왜 이렇게 나에게 고통을 주나’, ‘왜 내 다리를 부러뜨리나’ 하며 원망도 했지만, 그렇게라도 나를 악에서 구해내고, 나를 여기까지 업고 와주신 당신께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멍에는 절대로 힘든 멍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짐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사람이 가장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행동은 무겁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여러분에게 가벼워지기를 원합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천국을 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당신께 향합니다.”



이 목사를 좌절시켰던 어둠은 그이가 영면할 수 있는 휴식의 밤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목사의 삶은 밤하늘에 박힌 보석 같은 별이 되었다. 그 별을 보고 길을 잃은 방랑객이 바른길을 찾으리라. 그이가 아들의 묘비에 새긴 말처럼, “이민아, 아버지 집에서 이제 편히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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