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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幻(환)을 기꺼워하는 마음은 수치를 껴안고 수천 개의 물결 속으로 들어 간다’ 2001년 봄 내게 큰 힘이 되어 준 허수경의 시 ‘이 지상에는’의 한 구절이다. 알듯 모를 듯한 의미가 매력으로 다가왔지만 그래도 나는 같은 시의 마지막 구절인 ‘나의 그리움은 이제 자연사할 것’이란 구절을 곰곰 되새기고 되새겼다. 자연사할 것이라는 시인의 단정적 말과 달리 나는 내 그리움이 자연사하기를 바랬었다. 하지만 내 그리움은 언제고 그대로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밤이슬 내려 숲이 잠들어도 / 벗은 몸의 고행자들 잠들 수 없었습니다 / 그 둥그런 백화난만의 세상 / 幻(환)으로 오고 幻(환)으로 갔습니다’ 2003년 내가 즐겨 외우던 이진명의 시 ‘고행자들의 밤 드높은 악기가 되어’의 한 구절이다. 초기 불교의 수행자들을 연상시키는 시였지만 왜 수행자가 아니라 고행자들이었을까 하는 마음을 앞서게 했던 시였다.


 



그런데 두 시인이 말한 환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두 시인은 환이란 단어를 어떤 뜻으로 쓴 것일까? 과학은 느낌을 설명하고 시는 느낌을 전달한다지만 나는 두 시인이 의도한 환이 무엇인지 밝히고 싶다. 환은 그러나 쉽게 오해받는 단어의 하나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옮겼을 때 환은 마야(maya)가 되지만 이 마야란, 세상이 헛깨비라는 말이 아니라 우주와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생각과 관념이 헛것임을 의미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그것은 공(空)의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이 공이란 말은 없음을 뜻하는 무(無)가 아니라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이 연계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존재의 성격”을 의미하는 말이다. 둘 다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지만 나는 허수경의 시는 허무적으로, 이진명의 시는 신비적으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시의 멋을 즐기고 있다. 사전적 의미는 그대로 둔 채 시적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티모시 프리크, 피터 캔디 공저(共著)인‘웃고 있는 예수’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과학의 통찰은 영지주의 통찰과 조화를 이룬다는. 그들에 의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시간과 공간이 일종의 환상이라고 주장하고 과학자들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면 이 근본적인 가정은 존재하기를 멈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영지주의자들이 의식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일자(一者)와 영원성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과학자들은 빛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두 저자는 말한다. 물리학은 빛이 때로는 입자로 나타나고 때로는 파동으로 나타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이것은 객관적인 관점으로는 각각의 개별자는 분리된 하나의 입자이지만 주관적인 관점으로는 개별자는 의식의 바다에 나타나는 파도와 같다는 영지주의적 관찰과 거의 동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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