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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서 중도(中道) 또는 중관(中觀)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각자 생각하는 답을 주관식으로 서술하라는 이벤트가 있었다. 출제자는 스님이시다. 스님에 의하면 이번 출제는 사람들이 중도(中道)를 중용(中庸)로 혼동하며 가르치는 경우가 많기에 누구를 비난하거나 나무라는 차원이 아닌 바른 답을 알리도록 하자는 취지에 따른 이벤트이다. 세 명이 답를 적어낸 사람으로 선정되었는데 그 중 두 경우를 옮긴다.




중도(中道), 중관(中觀)은?


1) a) 衆因緣生法(중인연생법):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며 다른 것과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b) 緣起說(연기법): 모든 존재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므로 모든 존재는 공하다.


c) 空(공): 공은 어떤 실체도 없이 존재한다.




2) 중도(中道) = 무자성(無自性) = 연기(緣起) = 공(空)




나는 늦게 알아 참가하지 못했다. 나라면 어떤 답을 했을까? 유무(有無) 중도(中道)의 공(空)이라 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아(無我)라고 답했을 것이다.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무아를 현재 눈을 뜨고 숨을 쉬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나 즉 실체로서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이해하고 있다. 무아를 인연과 무관하게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일지 스님은 ‘중관 불교와 유식불교’의 ‘공(空) 사상은 니힐리즘인가’란 글에서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을 예로 드셨다. 즉 ‘중론’이 부정하는 것은 비존재를 주장하는 단견(斷見)과 존재를 설하는 상견(常見)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공(空)을 무아로 보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최근 공(空)에 대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대화자는 처음 공을 질량과 에너지가 같은 것(질량 에너지 등가원리)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은 물리학적 관점의 설명이기에 문제가 있고 또 질량이 항상 에너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잘 알다시피 수소 원자핵 네 개가 헬륨 원자핵 하나로 바뀔 때 미세한 질량 결손(가벼워짐)이 발생한다. 이때 그렇게 없어진(缺損된) 질량이 빛이라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며칠 후 그 대화자는 쌍차쌍조(雙遮雙照)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렇게 어려운 용어를 설명도 없이 쓰면 누가 알아 듣는가, 라고 말했다. 검색해 보니 중국 천태종의 개조(開祖)인 지의대사가 이 개념을 인용해 공을 설명했고, 성철 스님은 이 개념이 중도의 핵심이라 설명했다고 한다. 쌍차쌍조가 뜻하는 바는 ‘양극단의 편견을 버리고 모두를 합쳐 다 함께‘라는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이트에서는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할 때는 쌍생,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할 때는 쌍멸”이라며 이것이 중도의 공식 곧 쌍으로 없어지고 쌍으로 생기는 쌍차쌍조(雙遮雙照)로 변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불교를 물리학적 가르침으로 해명(解明)할 수 있지만 이 경우처럼 쌍생쌍멸을 이야기 하며 그것을 쌍차쌍조로 풀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앤더슨 실험에서도 빛 에너지를 물질로 전환시킬 때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나타난 것에서 보듯 “모든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할 때 쌍(雙)으로 변화하는 현상을 쌍생성이라” 하고 “양전자와 음전자를 더하니 쌍으로 없어졌다.”는 설명은 새겨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쌍차쌍조란 양 극단을 차단(斷)해서 중도에 들어서야 그 두 극단을 비로소 온전히 비춰(明)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양 극단을 없애고(雙遮) 중도에 들어가면 양자가 새롭게 보인다(雙照)고 풀이하는 분들도 있다. 이제 양형진 교수의 ’산하대지가 참빛이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설명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다. 양형진 교수는 색즉시공을 색의 성품 자체가 공하다는 것으로 설명했다.






양형진 교수는 “흐르는 물과 지저귀는 새소리를 제외하면 어디서 달리 공을 찾을 방도가 없으니 여기서 색은 공에 통하고 공은 색에 통하며 유는 무에 통하고 무는 유에 통하게 된다.”고 말한다. 한편 공즉시색은 일체의 사물이 연기공(緣起空)에 의한 것이므로 공을 떠난 색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로 설명되었다.






특기할 것은 용수 보살이 실체론적 사고를 논파(論破)하기 위해 4구부정(四句否定)의 변증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가령 비가 내릴 때 어떤 비가 내리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1) 내리는 비가 내린다는 답, 2)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는 답, 3) 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는 답, 4) 내리는 것도 아니고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닌 비가 내린다는 답 등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런데 1) 내리는 비가 내린다는 답은 비가 두 번 내리는 꼴이 되기에 중복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고, 2)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는 답은 사실에 위배된다. 3) 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는 답은 비배치(背馳)되는 두 가지 사실이 존재하는 모순 판단이 된다. 4) 내리는 것도 아니고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닌 비가 내린다는 답은 무인론(無因論)이 된다. 결국 용수(龍樹: Nagarjuna)의 사상으로 돌아온 것인가. 김종욱 교수의 ’용수와 칸트‘를 읽고 싶다. 그나저나 쌍생쌍멸을 어느 책에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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