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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표기
궁녀
글쓴이
신명호 저
시공사
평균
별점8.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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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왕조 시대의 산물인 궁녀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 것은 궁녀란 지극히 내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록에 궁녀들이 등장하는 일 자체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기에 왕이 먼저 말하기 전에는 등장할 까닭이 없었고 왕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은밀한 사생활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궁녀 문제를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왕이 만부득이 궁녀 문제를 언급해야 할 때는 궁녀들이 모반, 저주, 간통 등의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다. 이런 가운데 계축일기’, ‘한중록’, ‘인현왕후전등 조선 시대 궁중 여성들이 남긴 기록과 모반 대역죄인들을 조사한 법정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등을 참고로 궁녀들에 대해 쓴 책이 신명호 교수의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궁녀.

 

추안급국안에는 궁녀들이 대거 등장한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궁녀 충원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가 살아 있었고 양녕의 폐세자로 인해 세종과 왕비는 새 궁녀들로 하여금 모시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신빈 김씨는 사이가 참 좋았다. 공노비 출신의 신빈 김씨는 세종에게서 아들 여섯(딸 둘은 일찍 사망)을 낳았다.

 

연산군의 궁녀로 후대 왕을 낳지 못한 장녹수(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가비였던)와 광해군의 궁녀로 역시 후대 왕을 낳지 못한 김개시(노비의 딸)는 나쁜 궁녀의 대명사다. 연산군은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로 연상이기까지 한 장녹수를 딱 한 번 보고 바로 입궁시켰다. 김개시는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김개시는 어릴 적 입궁하여 상궁이 되었으나 후궁이 되지는 못했다.

 

광해군의 궁녀로 있다가 선조의 궁녀가 된 뒤 다시 광해군에게로 간 김개시는 광해군의 제조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했던 실세였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걸림돌이었던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스스로 알아서 했다. 갑신정변 5년 전인 1879년 김옥균의 동조자로 입궁한 이우석은 체격도 크고 힘도 세 양산박의 수호지의 여장부 이름인 고대수로 불렸다.

 

37세의 그녀는 기운이 세고 용모는 단정하지 못하였기에 무수리를 맡았다. 무수리는 출퇴근이 가능했다. 궁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첩자로서는 무수리가 제격이다. 조선시대에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추존 왕 덕종 비 소혜왕후, 예종 비 장순왕후, 안순왕후, 성종 비 공혜왕후, 인조 비 인열왕후 등을 배출한 청주 한씨 가문이다.

 

세조 비 정희왕후, 폐비된 성종 비 제헌왕후, 성종 비 정현왕후, 중종 비 장경왕후, 중종 비 문정왕후를 배출한 파평 윤씨 가문도 다섯 명이지만 폐비된 제헌왕후를 제외해서 그런지 2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태종 비 원경왕후, 숙종 비 인현왕후, 고종 비 명성왕후, 순종 비 순명효왕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 가문이 3등이다.

 

소혜왕후의 고모(한확의 여동생) 청주 한씨가 명나라 영락제의 궁녀 생활을 하다가 영락제가 죽자 순장되었다. 명나라에 보내는 공녀는 사대부 가문에서 골랐고 청나라에 보내는 공녀는 공노비 가운데서 골랐다. 청주 한씨가 영락제의 사랑을 받았던 까닭에 오빠 한확은 승승장구했다.

 

오따 줄리에는 임진왜란 중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간 여성이다. 오따 줄리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추종하는 파를 이기고 패권을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총애를 받았다. 히데요리를 추종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배한 사무라이들이 할복하는 관행을 깨고 항복하지 않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공개처형된 후 효수되었다.

 

오따 줄리에가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니시 부인을 시중들 때였을 것이다. 도쿠가와가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줄리에는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발각되어 체포된 뒤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갔다. 줄리에를 사랑한 도쿠가와도 그녀의 신앙을 버리게 하지 못했다. 오따 줄리에와 반대의 경우가 굴씨(屈氏).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명나라가 멸망한 후 귀국할 수 있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명나라 궁녀와 환관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에게 준 선물이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의 황녀였던 굴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자성의 반란으로 숭정제가 자살하자 굴씨도 따라 죽으려 했고 이에 주황후가 말려 자살하지 않고 민가에 숨었다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주황후는 자살했다. 굴씨는 인렬왕후 조씨(자의대비)의 궁녀가 되었다.

 

70의 나이에 굴씨는 조선에서 숨을 거두었다. 굴씨는 자신을 서쪽 근교의 길에 묻어달라고 했다. 굴씨는 그곳에 자신을 묻어주면 왕의 군대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최회저도 소현세자를 따라와 궁녀가 되었다. 80 넘어서까지 살았다. 조선의 숭명반청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숙종 25년에 정식 상궁 교지를 받았다. 왕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소속된 궁녀들만 관할했을 뿐 관할 밖의 궁녀에 대해서는 선발권조차 없었다. 긍녀의 충원도 각 처소에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왕의 대전, 왕비전, 대비전, 세자전 궁녀들이 각각 독립적이었다는 의미다. 궁녀들이 충성을 바치는 1차 대상도 왕이 아니라 자신들을 거느린 주인이었다. 그들은 운명공동체의 관계를 맺었다.

 

세자가 왕이 되면 세자궁의 궁녀들이 대전 궁녀가 되고 왕이 죽으면 궁녀들은 왕의 장레를 치른 후에 여승이 되거나 대궐 밖으로 나가 여생을 보냈다. 각 처소별로 궁녀 수를 명시한 것은 성종 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궁녀 수가 늘어났다. 이는 왕실 구성원이 늘어나는 것과 더불어 각 처소의 궁녀 조직이 점차 비대해지고 업무량도 늘어난 까닭이다.

 

즉 왕족들이 각 처소별로 독립 생활을 하며 음식, 바느질, 자수, 빨래, 청소, 양육 등 궁중의 실생활에서 요구하는 각종 여성 노동이 증가했다는 의미다. 궁녀는 왕의 개인 종이기도 하고 동시에 경국대전에 규정된 공적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궁녀는 왕의 개인 노비인 내수사(內需司: 조선시대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궁중에서 쓰는 미곡·포목·잡화·노비 등을 관리했다.)의 여자 중에서 충당할 수도 있었고 공노비나 일반 국민 중에서 충당할 수도 있었다.(112 페이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헸던 10년 동안 광해군 측의 궁녀들은 인목대비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고 모함했다. 인조 반정 직후 인목대비를 괴롭힌 원흉으로 지목된 상궁 김개시는 목이 잘렸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다소의 예외를 제외하면 궁녀는 기본적으로 공노비와 사노비 등 노비 출신의 여성들이었다. 지밀 상궁의 경우 네 살에 입궁했다. 침방 상궁은 여섯 살에 입궁했다.

 

네 살 입궁 사례는 자식 없는 대비의 어린 수양딸을 하기 위해 입궁한 것이었다. 물론 조선 시대 17세기 궁녀들의 입궁 나이와 고종, 순종 대의 궁녀들의 증언은 일치하지 않는다. 미혼 궁녀들은 각 처소 주인들의 시중과 의식주 관련 노동을 위해 입궁했고 기혼 궁녀는 유모나 보모 등 아이의 양육과 관련된 일로 입궁했다. 예비 궁녀로 입궁하는 아이들은 적어도 일곱 살 이상이었고 아이 양육을 위한 기혼 궁녀들의 입궁은 나이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132 페이지)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이라 불렸다. 1품이었다. 봉보부인은 매년 쌀과 콩 60석을 받았다. 영의정이 받는 양보다 많은 것이었다. 유모는 궁녀들처럼 내수사나 각사의 여자 종에서 선발되었으므로 공노비 신분인데 봉보 부인이 되면 자연 면천(免賤)되었다. 심지어 예종은 봉보부인의 친족 27명을 면천해주었다. 연산군은 이것을 빌미로 봉보부인의 친족을 전부 다 면천시켜 주려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139 페이지) 정식 유모 외에 어쩌다가 왕에게 한번 젖을 먹인 여성들도 면천되었다.

 

원자(元子) 이외의 왕실 아이들 즉 왕자와 공주, 옹주 등이 혼인으로 궁궐을 나가면 보모 상궁은 으레 따라서 출궁하곤 했다. 출궁한다고 해서 궁녀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왕자와 공주의 궁방(宮房)에 소속된 궁녀로 바뀔 뿐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간이 틀어진 시초가 바로 보모 상궁들이 잘못 가르친 데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궁녀는 5품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4품 이상은 후궁이다.

 

조선 시대 양반 관료 조직이 크게 9품에서 5품까지의 사()4품에서 1품까지의 대부(大夫)로 구성되었듯 내명부의 조직도 9품에서 5품에 이르는 궁녀와 4품에서 1품에 이르는 후궁으로 양분되었다.(155 페이지) 5품에서 6품은 상궁, 상의 등 상()이라는 말 다음에 구체적 업무 내용이 들어갔다. 7품에서 8품까지는 전빈, 전의 등 전()이라는 말과 함께 담당 업무가 들어갔다. 9품은 음악을 연주한다는 의미의 주() 다음에 긍상각치우의 5음이 들어갔다.

 

상궁은 마마님이라 불렸고 나인들은 항아(姮娥)라 불렸다. 왕의 승은(承恩)을 입고도 후궁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특별 상궁, 승은 상궁 등으로 뷸렸다. 각 처소에는 궁녀 전체를 통솔하는 제조(提調) 상궁이 있었다. 제조 상궁과 부제조 상궁은 각 처소의 지밀(至密)에 소속되었다. 대전(大殿) 궁녀 대부분은 전문직 여성이었다. 대전의 긍녀 중에서 왕의 잠자리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은 궁녀는 사실상 지밀의 젊은 궁녀들로 한정되었다.

 

반면 대전 궁녀들 중의 대다수는 평생 자기 업무 분야에 종사한 철저한 전문가로 존재했다.(169 페이지) 궁중 생활 문화의 진수를 담담, 전승한 주역이었던 것이다. 상궁과 나인 이외의 여성들이 있었다. 방자, 취반비, 무수리, 파지 등이다. 방자는 방에 딸린 사람이다. 밥하는 취반인을 취반비라 했다. 궁중에서 물 긷는 사람은 무수리라 불렀다. 세숫물을 담당하는 사람을 수모(水母)라 했다. 파지(巴只)는 청소를 맡은 사람이다.

 

상궁이나 나인은 평생 주인을 위해 수절했다. 방자, 취반비, 무수리, 파지 등은 그런 억압에서 자유로웠다. 내의원에 속한 의녀들은 출퇴근을 했고 혼인도 할 수 있었다. 궁중에 일이 없을 때는 여성 범죄자를 조사하는 수사관 역할을 하기도 했고 궁중 연회에서 가무를 보여주는 기생 역할도 담당했다.(188 페이지)

 

낮은 물론 은밀한 왕의 잠자리까지 함께 한 지밀 나인들은 최고의 측근이 되었다. 침방, 수방, 소주방, 생과방, 세수간, 세답방 등의 나인들은 굳이 밤까지 일할 필요가 없었다. 왕과 왕비의 침실에 관심을 가지면 대역죄로 내몰렸다. 왕이나 왕비가 어느 방에서 잠을 자는지, 누가 침실을 지키는지, 몇 명이나 지키는지 등은 국가 최고의 기밀이었다. 긍궐의 특성상 수완이 좋은 궁녀는 각종 이권에 개입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궁녀들은 재산 증식에 열심이었다. 궁녀는 긍정적으로 보면 혼인을 포기한 전문직 여성들이라 할 수 있다. 궁녀들이 꽃놀이나 뱃놀이를 갈 때 기생은 물론 액정서(掖庭署)의 별감이나 궁의 남자 종들도 여보란 듯이 거느리고 다녔다.(214 페이지)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상궁으로 있었던 박씨는 대궐 밖에 자기 소유의 가옥과 토지를 매입해 국가의 공증을 받기도 했다. 액정(掖庭)은 궁궐 영역을 뜻한다.

 

박씨는 당연히 소작인이나 노비에게 토지를 경작시켰다. 많은 소작료를 거두었다. 박씨는 양손자에게 재산을 전부 물려주었는데 양손자는 이를 곧바로 팔아버렸다. 비녀를 꽂고 어른 복장인 배자를 입고 하는 계례(?禮)가 있다. 긍녀들도 계례를 치렀다. 성인식과 혼례식을 결합한 의례다. 궁녀들은 혼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실제는 신랑 없이 혼례식을 치렀다.

 

어려서 입궁한 궁녀가 자신의 상전과 맺는 관계는 주인과 여종의 관계였지만 그들은 형식적인 주종관계를 넘어 심정적 의리 관계를 맺곤 했다.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열세 살에 궁녀가 된 계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궁녀가 된 지 7년만에 인조 반정을 만나 유배를 갔다가 다시 소현세자의 나인이 되어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궁까지 되었다. 더욱 원손의 보모 상궁이 되어 인조 이후 2대까지의 영화를 보장받았다.

 

그녀는 30여년 궁녀 생활의 마지막을 자신의 주인인 강빈에 대한 의리와 충성을 지킴으로써 마감했다. 상궁과 나인 등 정식 궁녀는 기본적으로 왕이나 세자 등 주인의 여자로 간주되었다. 그들의 간통은 무거운 처벌로 처리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사형수들을 가을에 처형했다. 그 기간에 국가에 경사라도 생기면 사면되었다.

 

반면 모반대역(謀反大逆) 죄인은 부대시형(不待時刑)을 받았다. 곧바로 처형된 것이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벌한 것이다. 상궁이나 나인의 간통은 부대시형으로 처리되었다. 절대 살려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궁녀는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성을 단념해야 했다. 상대 남자도 목을 베었으니 남자도 궁녀와 사랑을 나누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간통하여 임신한 경우에는 출산 후 바로 죽였다.

 

그럼에도 궁녀들의 간통은 근절되지 않았다. 출궁한 궁녀들의 성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곤장 100대에 처했다. 출궁한 궁녀들의 성을 금지한 결정적 이유는 비밀 유지 차원이었다. 남자들의 온전한 혈통을 지키기 위한 차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출궁 전에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출궁 이후에는 여승이 되어 죽을 때까지 정절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사도세자의 지밀 상궁인 수칙 이씨도 궁에서 나갔다.

 

그 전에 궁에서 나온 이모를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궁에서 나온 수칙 이씨는 스스로 죽을 작정을 한 듯 보였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했다. 수칙 이씨는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었다. 정조가 궁녀를 보내 조사를 명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수십 년 동안 수절하며 어렵게 사는 궁녀 소식에 얼마나 감동했겠는가.

 

정조는 수칙 이씨에게 종 2품을 내렸다. 궁녀들은 한 방에서 2, 3명씩 생활했다. 궁궐이라는 한정된 공간 때문이었다. 상호 감시를 위해서였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 이유로 동성애가 생겼다. 세종의 큰 며느리 순빈 봉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밀 상궁인 소쌍이 파트너였다. 세종은 궁녀 내은이와 내시 손생이 정이 깊어져 미래를 언약하며 청옥관자를 주고 받은 사건을 참형으로 다스렸다.

 

세조는 나에게는 문()에는 귀성군(龜城君)이 있고 무()에는 홍윤성이 있으니 족히 근심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귀성군은 세종의 손자이자 세조의 조카였다. 귀성군 이준은 18세에 병조판서, 28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귀성군에게 덕중이라는 궁녀가 편지를 보냈다. 사모하는 감정을 절절히 쓴 편지였다. 죽음을 무릅쓴 편지였다. 수양대군의 아이를 낳은 덕중은 후에 소용(昭容)이 되었다.

 

세조의 부름을 받지 못해 외로워진 덕중은 내시 송중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이에 경악한 송중은 이를 세조에게 알렸다. 세조는 덕중을 살려주었다. 다만 덕중을 특별 상궁으로 강등시켰고 내시 송중도 그대로 궁중에서 일하게 했다. 그런 덕중이 귀성군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갈피를 잡지 못한 귀성군은 아버지(임영대군)에게 고백했고 아버지는 다시 형 세조에게 고했다.

 

이번에도 세조는 대범하게 처신했다. 덮어두었으나 다만 덕중을 방자로 강등시켰다. 덕중은 그 이후에도 귀성군에게 편지를 보내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성군에게 죄는 저들(편지를 전해준 내시 포함)에게 있다는 말을 했다. 내시 후보자를 화자(火者)라 한다. 효자동은 내시들이 모여살던 화자동이 바뀐 것이다. 은평구 갈현동의 궁말이란 마을은 출궁한 궁녀들이 모여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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