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사진
namakwa
  1. 질주하는 검은 혀

이미지

2010 7


 


한여름의 정자.


집요하게 머리 위로 떨어지던 날벌레 소리. 끼익꺽 끼익꺽 사신이 걸어오는 발짝 소리. 그 속에서 나는 한 번 죽었다.


내겐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김도준과 장기주는 아니었다. 그들은 정일호가 누웠던 바로 그 칸에, 검고 흰 지하 계단 아래 누웠다. 향과 국화와 텅 빈 복도가 그들을 배웅했다. 친척과 지인보다 기자와 경찰이 더 많이 참석한 장례식이었다.


나는 그들이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2010 10


 


정자에서 우리들을 살해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아주 나중에 알려졌다.


청량산 어딘가에서 목매달아 죽은 정일호 아버지가 이미 부검실에 누워 있던 때였다. 배와 얼굴, 손이 심하게 망가진 채라고 했다. 사체를 훼손한 것이 피해자들의 유족인지 산짐승인지에 대해 말이 많았지만 딱히 결론을 내리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아빠 휴대폰을 무수히 울렸던 번호들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빠는 철저하게 그들의 접근을 막았지만 음울한 그림자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다연은 끈질기게 숨을 이어갔다.


호흡기를 떼면 여덟 시간 이내 사망할 거라는 의사의 진단과 달리 다연은 8일을, 80일을 살아냈다. 거칠고 위태로운 숨이었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희미한 열기가 느껴졌다. 생명을 뽑아내는 소리가 아닌, 조금씩이나마 생명을 빨아들이는 그런 소리가.


의사는 노골적으로 곤란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이렇게 되면 이식수술을 기다리던 환자들이…… 나는 그제서 내가 칼에 찔리는 사고와 실종 때문에 결단이 미뤄졌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간 살인마들은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던 것이었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고 있는 건 다연 자신이었다. 미지근한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다고만 생각했던 다연이 안쓰럽고, 또 가여웠다.


어쨌든 다연은 살아 있었다. 나는 다연의 손을 꽉 잡았다. 다연을 이렇게 만든 원흉이라면 이미 죽어버렸다. 남은 건 다연이 깨어나는 것뿐이었다.


 


2011 1


 


연말에 쏟아진 폭설로 도로는 엉망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산 밑에서, 고속도로에서 쏟아져 나온 사고 소식으로 사방이 분주했다. 빙판길에 미끄러진 차량의 추돌, 충돌 사고는 약과였다. 승객이 가득 찬 고속버스가 다리 밑으로 떨어지거나 승용차가 화물차에 깔려 샌드위치처럼 납작해지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고속도로 갓길을 가득 메운 견인차와 경찰차가 무질서하게 불빛을 쏟아냈다. 뉴스는 산산이 부서진 자동차 앞 유리창과 쿠킹호일처럼 볼품없이 찌그러진 지붕 같은 것을 집요하게 꾸려 내보냈다.


사고 소식 틈틈이 연말을 장식하는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레드카펫에 올라 우아하거나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수상자들이 웃으며 눈물 흘리는 장면은 괴이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날카로운 바람 아래 한가롭게 나풀거리는 그들의 시폰드레스처럼.


우리의 연말은 무료했다.


지난해를 배웅할 기력도, 새해를 맞이할 희망도 없었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싸움에,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가 너무 위태롭고 거대한 존재란 사실에 우리는 시시각각 절망하고 지쳐갔다. 엄마와 둘이 지하식당에서 떡만두국을 시켜 먹고 다연의 병실에 앉아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아빠는 집과 회사를 오갈 뿐 병실에 오지 않았다.


우리는 얇은 종이 몇 장으로 나뉘어 팔락거렸다.


삶의 접점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아빠는 서재와 안방 화장실을, 엄마는 주방과 거실을, 나는 내 방과 욕실을 오갔다. 소파에 앉아 느긋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텔레비전과 다탁에 쌓인 먼지가 묵묵히 더께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안절부절못한 채 서로가 보지 않는 틈을 타 바퀴벌레처럼 움직였다. 서럽고,


쓸쓸한 새해였다.


 

좋아요
댓글
6
작성일
2023.04.26

댓글 6

  1. 대표사진

    namakwa

    작성일
    2011. 3. 3.

    @nalovehea

  2. 대표사진

    아자아자

    작성일
    2011. 3. 2.

  3. 대표사진

    namakwa

    작성일
    2011. 3. 3.

    @아자아자

  4. 대표사진

    아나르코

    작성일
    2011. 3. 2.

  5. 대표사진

    namakwa

    작성일
    2011. 3. 3.

    @아나르코

namakwa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11.3.5

    좋아요
    댓글
    24
    작성일
    2011.3.5
  2. 작성일
    2011.3.4

    좋아요
    댓글
    27
    작성일
    2011.3.4
  3. 작성일
    2011.3.3

    좋아요
    댓글
    11
    작성일
    2011.3.3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149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126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4
    좋아요
    댓글
    123
    작성일
    2025.7.4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