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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相生의 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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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유럽의 역사왜곡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블랙아테나』이다.



 



유럽에서는 원래 유럽문명의 기원은 이집트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학자들이 19세기 후반 같은 아리안인종의 고대 그리스를 적극 발굴하여 유럽과의 연계성은 강화하고 이집트와의 연계성을 축소하였다. 그리고 이집트문명과는 별도로 성장해온 독창적인 문명으로 그리스를 부각시켜 그 때부터 서양문명의 기원이 되었다.



 



많은 서구학자들은 『블랙 아테나』를 읽고서 그리스의 역사와 서양사, 그리고 세계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반성을 했다. 그리스문명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2000~2500년 늦게 시작돤 문명이었으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나 페니키아 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발전시켜왔으리라는 것이 순리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약소국인 아테나의 왕자 테세우스가 제물이 될 사람들과 함께 크레타로 간다. 이미 많은 연구들이 축적되어 그리스신화는 이집트신화와 터키지역의 히타이트신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탈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솔론, 유클리드, 플라톤 등 그리스의 유명학자들이 이집트를 갔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피타고라스보다 1500년전의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서 찾아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의 기원은 이집트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수학의 기원도 이집트라고 했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많은 그리스신들이 이집트에서 왔다고 말했다.<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볼프강 작스가 『반자본 발전사전』12쪽에서 이야기한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도 세계사, 사상, 학문은 서구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학자들이 수많은 역사왜곡으로 서구에 편향된 세계관을 만들어왔고 우리는 지금도 따르고 있다. “서구중심의 탈식민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오리엔트』는 일찍부터 서구가 앞섰다는 주장을 모두 부정한다.



 



영국이 벵골을 식민지화하면서 인도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팔고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유럽은 중남미의 은을 착취하여 부를 이루고 인구와 자원이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투자가 증가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다음에야 겨우 아시아을 앞섰다는 것이다. 아시아를 추월한 것이 150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이 동양을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곳으로 낙인을 찍고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문명적인 곳으로 서양은 긍정적인 것으로 동양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 자신들이 만든 동양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근거로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자신들이 야만적인 세계를 문명화시키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프랑크는 동양과 서양의 경제적 현실 자체를 유럽학자들이 왜곡하여 거짓말을 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1820년대까지 유럽이 아시아에 뒤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서구가 세계사를 가장 발전시켜왔다고 배워왔고 따라서 근대를 서구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중세는 동양의 중세보다 뒤쳐진 암흑중세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런데 칼 맑스나 막스 베버 같은 학자들은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들은 서양이 우월하다는 관점에서 자료들을 해석하고 이론화 했기 때문이다. <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서양사는 아시아 문명이 모태



 



20세기 초중반 미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 철학자였던 윌 듀런트(1885∼1981)는 1930∼50년대 지식인들에게는 중요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지식인들은 그를 통해 철학과 역사의 교류에 눈을 떴다고 평자들은 풀이한다. 그는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문명의 응석받이이자 손자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조상인 동양의 풍요로운 유산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꼬집는다.



 



종래 서양사 중심의 서술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듀런트는 “서양의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된다. 아시아가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의 장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다. 동양의 문명들이 서양의 시작인 그리스 로마문화의 배경과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그리스와 로마가 현대 지성의 모든 원천은 아니다”면서 “서양 문명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발명품들, 예컨대 서양의 정치 기구 및 경제 과학 문학 철학 종교의 뿌리가 이집트와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출처: 세계일보 2011년7월15일



 



 







 



서양 중심의 세계사는 가짜다.



 



리 오리엔트 = 다시 동방으로 !!



저자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의 잘못된 시각을 수정하고 세계사에 관한 사고의 틀을 완전히 재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2000년 미국 사회학회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 된 바 있는 이 책은 서구의 발전과 세계체제의 기원에 관하여 근본적인 재인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혁신적이고 흥미진진한 프랑크의 역작이다.



 



 



" 오리엔트" "빛은 동양에서".



 



세계 문명의 근원은 동양이었고 동양 역사의 시작이 곧 세계 역사의 시작이었다.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강조하며 유럽 중심주의에 빠져있는 역사관과 세계사를 수정 하기를 요구한다. 우선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 거세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 남짓이다. 그 이전, 그러니까 1800년 이전까지는 아시아가 세계를 주도 하고 있었다.



 



1800년 이전 변변한 자원도, 풍부한 자본도 없었던 유럽은... 자원과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 역시 1800년 이전 유럽은 아시아의 기술에 미치지 못했다.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계기는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 때문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2003년 3월 07일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존 M. 홉슨 저 / 정경옥 역 / 에코리브르 / 2005년 1월/ 18,000원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라 동도동기(東道東器)



 



동양과 서양의 문명적 특징을 축약해 흔히 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을 쓴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나면 이 말은 동도동기(東道東器)로 바꾸어야만 할 것 같다. 정신문명은 물론이고 기계문명마저도 그 발원지는 동양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동양이 서양과의 문명발달 경쟁에서 근소한 시간적 우위를 점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을 통틀어 ‘숙련된’ 동양에서 ‘미숙한’ 서양으로 ‘모든’ 인문적 지식이 ‘전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이 전수목록에는 원천기술뿐만 아니라 거의 완제품 수준까지 아우르고 있다. 저자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사료와 자료들은 충분히 치밀하고 방대하다. 따라서 구태여 저자가 존 M.홉슨이라는 전형적인 서양인 혈통이란 걸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문명발달의 원조 논쟁에 있지 않고, 인류문명에 있어서 동양의 명백하고 압도적이었던 문명사적 역할이 얼마나 축소되고 은폐되어 왔는지를 밝히려는데 있다. 그 과정에서 서양이 자기기만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부터임도 알게 된다.



 







 



동양은 ‘창조’ 서양은 ‘모방’



 



“서양 사람들은 독일의 발명가 구텐베르크가 문명에 혁신을 가져온 인쇄기를 최초로 세상에 소개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그림자 뒤에 숨은 진실은 이동형 인쇄기에 사용하는 최초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적어도 50년은 먼저 한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서문 중)



 



흔히 인류의 3대 발명을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라고 한다. 이 발명품들은 모조리 동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서양으로 전수되었다. 앞서 저자의 서문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구텐베르크는 인쇄기술을 독자적으로 연구해낸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입수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고정관념의 먼지를 털어 내어야 한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은 훨씬 오래 전부터, 아니 역사의 전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교류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교류는 일방통행이었다는 점이다. 즉 서양은 늘 문명의 수혜자였다.



 



양은 ‘창조’하고 서양은 ‘모방’했다. 사실상 근대까지도 유럽인들의 기술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동양에 비해 아주 조악했다.



 



한 유럽 지식인은 그의 저서 『위대한 우(禹)임금과 공자(Yu le Grand et Confucius)』에서 ‘유럽이 17세기에 이르러 마치 ‘유전자 대혁명’을 겪는 것처럼 일대 변신을 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뉴턴 등을 비롯한 대과학자들의 세기가 열린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양은 더 이상의 ‘창조적 지식’의 출현이 없는 까닭 모를 정체기로 빠져들게 된다



 



 



 



서양인들의 모방과 착취



 



문제는 서양인들이 주도권을 쥐자마자 그것을 남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약적인 발흥은 단순히 동양에 대한 지적인 부채에만 기인했던 것이 아니다. 서양은 식민지화를 통해서 무상의 노동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독점에 가까운 시장확보라는 이중 삼중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저자는 영국의 산업혁명 또한 동양으로부터 이러한 경제적인 이득뿐 아니라 기술적인 모방까지 동원되었다고 말한다.



 



현대문명을 말함에 있어서 수학(數學)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오늘날의 십진법 수 체계 그 외에도 항해술, 조선술, 천문학, 도로망 등 세계를 이미 하나로 만들었던 교통수단은 그 어느 것도 동양인들의 지적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이라고 착각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작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양을 비롯한 소위 제3세계인들은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다.(이하 생략)  



 



 







 



대만출신으로 일본 도카이대학 교수로 있는 사세이키가 쓴 『유럽 중심사관에 도전한다』에 따르면 “유럽중심 사관이 대두된 것은 17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서구가 직선적으로 발전한다는 진보사관을 확실하게 확립시켰고 이러한 발전의 최첨단에 서구가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게 정립되던 시기이다.



계몽주의 이후 유럽중심사관이 유럽을 우월한 모습으로 역사를 과장하고 왜곡하였다. 유럽에서 만든 세계사는 서구편향적으로 쓰여졌다며 비판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유럽학자들이 주도하여 세계사를 유럽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왜곡하여 썼고 이러한 해석과 왜곡에 의존한 세계사가 현재도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 미국 부통령 엘고어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말했지만 서양의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뒤 얻어 온 기술"이라며 "이런 면에서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혁명은 역사적으로 보면 두번째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 발전 기여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5년 5월 19일 서울디지털포럼 개막식 연설에서 -



 



 







 







 







 







 







 







 







 







 







 







 







 



 



 



 



 



 



한글의 원형은 고조선(단군조선)의 가림토문자



 



 







 







 



『단군세기檀君世紀』 3세 단군 가륵(嘉勒)조와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단군 가륵 2년(BCE 2181)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字)를 창제했다는 기록과 함께 글자의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언문 28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고전(古典)을 모방했다(其字倣古篆)”라고 하였고,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글자의 모습은 옛 전문을 모방했지만 음을 쓰는 것과 글자를 배합한 것은 다 옛것과 반대이다(字形 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라 하여 예전의 전서를 모방했음을 밝히고 있다.



 



가림토 문자는 기원전 21세기경 인도로까지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송호수 교수가 인도 구자라트 지방(인도 서북부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한글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국내에 보고한 바 있다. 여기에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다. 오늘날 구자라트주에는 주로 드라비다인(Dravidian)들이 거주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우리와 흡사하다고 한다.



 



 







 







 



 







 





 







 







 



 



스튜어트 컬린은 <Korean games>에서 “한국의 윷놀이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수많은 놀이의 원형(原形)이다” 라고 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mA9ZFZKnRds







 



윷놀이의 원형은 환국으로부터 베링해협을 건너간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풍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것이 바로 북미 인디언들의 윷놀이와 마야족의 불(bul)게임과 아즈텍의 파톨리 게임이다.



 



그들은 신(神)의 뜻을 묻는 종교의식(占)으로도 사용되었고 윷놀이로 풍년과 흉년을 점치던 옛 풍속과도 흡사하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소노마 레이크의 인디언 민속 박물관에는 인디언들이 즐긴 윷놀이가 전시되어 있는데, 윷판과 윷 말이 우리 윷놀이와 같다.



 







 







 









 



인도의 힌두 게임인 ‘파치시(pachisi)’와 ‘차우자(chausar)’의 도형은 십자형이 있는 윷판을 확장한 형태이며, 윷놀이에서 발전된 놀이가 서양의 체스나 일본의 야사스카리 무사시(八道行成)라는 사실을 놀이 방식이나 판의 형상 등을 통해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고대 점술에 기원을 둔 윷놀이는 우주적이고 종교적인 철학도 담고 있다”고 극찬하였다.



 



 





 



펜실베니아대학교 고고학 박물관장으로 재직중이던 스튜어트 컬린(Stewart Culin,1858~1929)은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컬럼비아 박람회에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였다. 이 소장품은 세계 각국의 놀이문화였다.



 



이를 계기로 스튜어트 컬린은 중국, 일본, 한국과 관련된 놀이를 정리한 『한국의 놀이Korean games』, 원제 ‘Korean Games: With Notes on the Corresponding Games of China and Japan’으로 한국과 일본, 중국의 전통놀이를 173개의 삽화와 함께 상세하게 수록한 것으로 우리나라 전통 민속놀이에 관해서 외국인이 저술한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zinga, 1872~1945)는 저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1938)'에서 "놀이(game)가 인류 문화를 탄생시킨 조건이었다"고 주장했다.



 



놀이는 인간의 언어, 법률, 전쟁, 철학, 예술 등에 앞선 인간의 행위라는 것이다. 즉,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인간의 활동으로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이라는 주장이다.



 



하이징아Huizinga는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의 공동생활 자체가 놀이 형식을 갖고 있다. 인간의 생로병사와 관련된 삶의 통과의례인 제의(祭儀)에는 음악, 춤, 놀이가 수반됐다. 인간이 몸과 영혼을 다 해 표현하려는 욕구로부터 발생한 놀이는 창조의 원동력이다. 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가장 자유롭고 해방된 활동, 삶의 재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활동인 놀이가 법률, 문학, 예술, 종교, 철학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현대에 이르러 일과 놀이가 분리되어 '단순한 놀기 위한 놀이'가 퇴폐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며, 고대의 신성하고 삶이 충만한 '놀이 정신'의 회복을 촉구하면서 '놀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류 문명을 빛나게 한다"고 강조했다.



놀이에는 음악과 무용이 수반되며 연극으로 진화한다. 놀이는 또한 의례적이며, 축제, 종교의식과 연관된다.



 



놀이에는 규칙이 있으며, 경쟁심을 유발해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동네의 놀이에서 각종 스포츠, 그리고 '제퍼디'(Jeopardy), '서바이버'(Survivor),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 등 미국의 TV 게임쇼, 퀴즈쇼, 리얼리티쇼도 놀이가 그 원형이다.



 



놀이는 말싸움과 소송 분쟁으로 진화하며, 놀이는 또한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윷놀이는 태평양 건너 북미 인디언 부족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는 게 최근 알려졌는데 윷판이나 말이 우리와 거의 같으며 ‘윷’이라는 발음도 똑같은 데가 있다고 한다. 북미의 30개 어로 분류되는 130개의 부족들이 즐기고 있고, 이 놀이가 존재하지 않은 지역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는 고대문명의 발자취의 흐름이기도 하다.



역사학자인 이이화 선생은 우리나라 생활사에 있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3대 발명을 온돌과 김치 그리고 윷놀이라고 하였다. 윷은 북방퉁구스계인 우리 동이족이 창작해낸 놀이라는 것이다.



 





 







 







 





 







 







 







 







 







 





 







 







 







 







 





 







 







 







 







 







 







 







 







 







 







 







 







 





 







 







 







 







 







 



 



 



주은래(저우라이언,周恩來)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중국과 조선,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 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 이하 생략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중국사》에서



 



"주나라 전, 3,000년경 동이족(東夷族)은 이미 황하 양자강(揚子江)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중국의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고 하였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중칭(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을때 장 총통은 자기 고향이 옛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장 총통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지적 입장에서 이런 역사인식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김구 주석은 충격과 함께 자괴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뒷날 술회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가 중국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김구 주석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고 한다.



 



 





 



장개석의 고향은 양자강(揚子江) 남쪽 절강성(浙江省)이므로 옛 백제는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량지나 임혜상 같은 양심있는 중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의 상고사는 한민족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가시마 노보루같은 일인학자는 한(漢)족은 기껏해야 한(韓)을 흉내내어 이름붙인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식자층은 양자강 유역이 전통적으로 동이 9족의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장개석은 이 사실을 너무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해 임시 정부의 이시영 부통령에게 역사는 제대로 알고 독립운동하시는가 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에는 어느 한구석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하게 왜곡되었음을 반증해 주는 하나의 예증에 불과하다. 고대역사를 다룬 사서 삼국사기,삼국유사 두 책은 중국이나 일제는 굳이 수거하지 않아도 될만큼 주체성을 상실한 책이었기에 이 두 책만은 남겼다.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



 



“사마천의 《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신지비사神誌秘詞」 본문의 일부는 세종대왕 때 편찬된 『고려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 중기 숙종 때 김위제金謂?가 『도선비기道詵秘記』와 「신지비사神誌秘詞」를 근거로 하여 남경南京 천도를 건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金謂? 肅宗元年 爲衛尉丞同正



김위제는 숙종 원년(1096)에 위위승동정이 되었다.



 



新羅末 有僧道詵 入唐學一行地理之法而還 作秘記以傳



신라 말기에 승려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又神誌秘詞曰 如秤錘極器 秤幹扶疎樑 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



또 「신지비사神誌秘 詞」에서 말하기를, ‘저울추[秤錘]와 저울접시[極器]에 비유하자면



 



저울대[秤幹]는 부소량扶疎樑이며,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고, 저울머리는 백아강百牙岡이다.







 







 





 







 







 







 







 







 



고조선은 삼신문화(三神文化)를 국가 통치 제도로 뿌리내려,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곧 한반도를 마한馬韓, 압록강의 북쪽을 진한辰韓, 그리고 요하 서쪽, 지금의 산동성이 있는 쪽을 번한番韓이라 하였다. 이게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다. 삼한으로 나라의 국가 영토 경계를 나누어가지고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 삼한의 삼경 균형이 무너지는 날 고조선이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이 삼한 체제는 22대 색불루(索弗婁, BCE 1285~ BCE 1238) 단군 때부터 서서히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색불루 단군에 이르러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현재의 길림성 장춘)로 천도를 한다. 그리고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다.



 



 





 







 







 



8조금법은 여덟가지 죄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三聖祖,환인,환웅,단군) 시대의 최초의 성문법이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회분위기와 경제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동안 병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부단군이 다시리던 번한(番韓)과 마한(莫韓)에 병권을 일부 나누어 줌으로써 삼한 체제의 동요가 서서히 일기 시작하였다. 이에 삼한관경(三韓觀境)의 체제는 무너지고 대신 두 분조의 독립된 병권이 인정되는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 체제(分權管境)로 개편되었다.







 



그 후 43대 물리(BCE 1285~BCE 426) 단군의 재위 말기인 기원전 426년에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켜 아사달이 점령되고 물리 단군이 피난길에 붕어하고 만다.



 



이 때 구물 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토벌하고 44대(BCE 425~BCE 397) 단군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이 때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는데, 이는 한양조선의 고종황제가 국운을 살리기 위해서, 최후의 탈출구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것과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



나라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서 다시 살려보려고 몸부림쳤으나 이미 진조선(진한)의 중앙정부 권력은 크게 약화되고 번조선(번한)과 마조선(마한)의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중앙정부인 진조선의 권한이 축소되고, ‘좌우의 두 조선’이 형식적으로 진조선을 받드는 형국이 되자 장군들의 반역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고조선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삼조선이 각각 독립된 국가로 운영되면서 삼한관경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러다가 진조선의 47대 고열가(BCE 425~BCE 238) 단군에 이르러 나라의 정사(政事)가 혼란에 빠지자, 임금이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버렸다. 그래서 오가五加가 연정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6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고열가 단군이 물러나기 1년 전인 BCE 239년에, 해모수가 웅심산을 중심으로 북부여를 열었다.



 



 





 







 







 







 







 







 



 



 



해모수 건국에서 고주몽 계승까지



 

































































년도



핵심 내용



BCE 239년



해보수가 북부여 건국



BCE 195년



노관의 부하이며 연나라 추장인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



최숭이 평양에 낙랑국(BCE195~CE37) 건국.



BCE 194년



위만의 번조선 찬탈 > (번조선)기준왕이 한반도 금강 지역에 진국 세움, 상장군 탁이 오가를 이끌고 월지에 중마한 건국



BCE 192년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주몽의 증조부)에게 요양, 해성을 지키게 함



BCE 141년



유철 한나라 7세 왕(무제)으로 즉위



BCE 109년



한나라 수군과 육군 5만 7천 명을 동원하여 조선 침략.(위만조선과 한나라의 1년 전투)



BCE 108년



고두막한 한나라 군사 격퇴.



졸본에 동명국(졸본부여) 세움.



BCE 87년



★한 무제 사망(BEC 109년 BCE 87년)



북부여와 한나라의 23년간 전쟁 끝남.



BCE 87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 북부여에 군사를 보냄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 병을 얻어 붕어.



아우 해부루단군 즉위.



BCE 86년



①해부루단군이 북부여 성읍 바치고 물러남.



②동명왕이 해부루의 봉작을 제후로 낮추고 가섭원으로 이주케 함.



★(동부여 시작)



③동명왕 고두막한 북부여 5세 단군이 됨.



④가을 8월, 한나라 도적과 서압록하 강가에서 싸워 크게 승리.



BCE 79년



임인년 5월 5일 고주몽 탄생(아버지 불리지, 어머니 유화)



BCE 60년



고두막 단군 붕어.



태자 고무서 즉위.



BCE 58년



고무서단군, 10월에 붕어.



사위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대통을 계승.(고구려 북부여를 계승함)




 



 



왜 중국인들은 부여사를 말살했을까?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 <삼성기>상, 하 두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 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예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와 주몽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 「삼성기三聖記」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檀君世紀」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北夫餘紀」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재위 BCE 108~ BCE 60)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그런데 지금 배우고 있는 교과서에서는 고주몽을 동명성왕으로 왜곡해 가르치고 있다.



 





 







 





 







 







 







 





 







 



북부여 4대 단군의 승계자인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라 했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 BCE 66~ BCE 6)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으며,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단군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한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길에 오른 준왕은, 황해를 건너 지금의 금강 하구지역으로 피신을 왔다. 이후 준왕은 오늘의 청주 한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로써 대륙을 호령하던 북삼한의 시대가 끝나고, 한반도의 한강 이남 지역의 남삼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신지비사神誌秘詞」와 『삼국유사』 「고조선」 조를 함께 보면 대한의 국통맥인 환국과 배달, 단군조선의 맥을 명확히 잡을 수 있다.







 



환인천제께서 삼신의 도로써 환국을 여셨고, 환웅천황께서 환국 말기에 환인의 명을 받아 천부와 인을 가지고 동방 땅을 개척하여 동방의 첫 국가 배달을 세웠다. 배달의 14세 치우천황은 서방으로 진출해 청구 땅을 개척하였는데 그때 회수, 태산 지역이 모두 귀순하고, 천하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음을 전한다.



 



또 단군왕검께서 배달국 말기에 흩어졌던 구환九桓의 백성들을 덕화德化와 해원解怨, 일심一心의 정신으로 크게 통일하여 단군조선이라는 대제국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통치 정신인 삼한관경제와 삼경제도가 어떻게 하면 영원할 수 있는지를 전해 준다.







 







 







 





 





 







 







 



 



환국 시대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천부경(天符經)』,여기에는 우주론을 바탕에 깔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일체관계에 대한 인성론의 문제가 담겨있고, 환국 다음에 배달국의 개창자 배달환웅이 열어주신 우리 한민족의 신관, 신학의 원전 『삼일신고(三一神誥)』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 재상 을파소를 통해 내려온 366가지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덕목을 기록한 『참전계경(參佺戒經 )』 이것이 우리민족의 3대 소의경전이다.



 







 



 



서량지(徐亮之) 교수는《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 10월 초판) 에서 이렇게 썼다.



 



“4,000여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때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 「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曆法)은 사실 동이(東夷)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 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중국학자 서량지(徐亮之)교수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서량지)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큰 절을 올렸다 한다.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에서



“우리들은 동방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후대에 와서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어 쓴 것이다.”



 



俄們常常把 東方的人稱爲東夷  而夷字和人字是通用的仁字和人字也是出於一源  那魔漢語中 ‘人’的稱謂 支於還有出於東方的可能…. 假若夷人先成文化的先進  夷人先用了‘人’字作爲全人類的名類 西方候起的部族  可能再爲借用的(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중국사(中國史)》에서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苗族(東夷)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묘족(苗族)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이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蚩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史記, 五帝本紀).



 



“4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은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 불교의 뿌리



 







 



 



석가모니의 불교를 최초의 불교라고 하지 않는다. 불교가 우리 대한민국에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으로, 석가모니 부처 이전에 초대 구류손 부처, 2대 구나함모니 부처, 3대 가섭 부처가 있었다. 석가 부처는 네번째 부처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전불(前佛)시대의 유적이 많다.



 



◆ <화엄경>에 "해중(海中)에 금강산(金剛山)이 있는데 옛적부터 모든 보살들이 그 산 중에 살고 있다. 현재도 법기(法起)라는 보살이 1,200명의 보살의 무리를 거느리고 금강산에서 상주하며 불법을 강설하고 있다." 라는 기록이 있고,



 



불교의 대웅전(大雄殿)은 본디 환웅천왕(桓雄天王)을 모시던 대시전(大始殿)이었다. '대웅(大雄)'이란 뜻은 큰 스승이란 뜻이다. '환웅(桓雄)은 광명의 스승'이란 뜻이다.



◆ <삼국유사:아도기라(阿道基羅)>를 보면, 고구려의 아도화상(阿道和尙)의 어머니 고도령(高道寧)이 그의 아들 아도를 신라에 보내면서 말한 내용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곳 고구려는 불법을 알지 못하나, 그 나라(신라)의 경도(京都) 안에는 절터 일곱 처가 있으니, 이는 모두 전불시(前佛時)의 절터니라",



 



여기서 일곱 처는 흥륜사(興輪寺), 영흥사(永興寺), 황룡사(黃龍寺),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妙寺), 천왕사(天王寺), 담엄사(曇嚴寺)를 가리킨다.



 



 



◆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과 제가전기(諸家傳記)에 모두 이르기를 "신라의 월성동용궁(月城東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으니 그 곳은 전불시(前佛時)의 절터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본사(本師) 석가불은 제4존불(尊佛)이며 가섭불은 제3존야(第三尊也)라고 되어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석가불 이전 가섭불(迦葉佛)시대에 이곳이 불국사(佛國寺)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고려 충숙왕 15년에 인도의 108대 조사(祖師)인 지공선사(指空禪師)가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에 와서 그 절터를 둘러보고 말하기를, "상세7불(上世七佛) 시절의 대가람(大伽藍) 터이다"라고 얘기를 한 것이 있다.



 



하나 더 든다면 화엄경에 바다 건너의 동방나라가 불교의 종주국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교의 뿌리







 



일반적으로 중국 도교의 시조를 황제헌원과 노자[黃老]라 한다중국 한漢족의 시조인 4,700년 전 황제헌원은 신농씨의 아버지인 소전少典에서 갈라져 나온 유웅씨(웅족) 계열의 동방족이다.[삼한관경본기]



번한의 역대 부단군 이름과 통치 기간이 기록되어 있는 [번한세가番韓世家] 하편을 보면 노자에 관한 놀랄 만한 내용이 한 구절 보인다.





■ (번한의 60대 왕인) 도을道乙이 즉위하였다. 계미癸未(BCE 518)년에 노나라 사람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버지는 성이 한韓이고 이름이 건乾인데, 선조는 풍이족 사람(風人, 태호복희씨와 같은 풍이족)이다. (道乙立. 癸未, 魯人孔丘適周, 問禮於老子李耳. 耳父姓韓, 名乾, 其先風人)





노자는 단군조선 말기의 인물로 본래 성은 한韓씨이고, 동이 구족 중 풍이족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자의 사상적 근원은 배달의 동방사상(신교 삼신문화)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면 노자는 왜 자신의 성과 이름을 이이李耳로 바꾸었을까?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이은 자하선인은 [신교총화(神敎叢話)]에서, 노자는 비록 서쪽 땅에 살고 있지만 자신은 본래 동방 사람이기 때문에, 이를 후세에 남기려고 성을 '동방[木]의 아들[子]' 이라는 뜻으로 이李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헌원과 노자는 배달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 동방족 출신이며 동방의 신교神敎를 서방에 전파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갈홍의 [포박자抱朴子]와 [관자]에는 황제헌원이 배달국에서 선도仙道를 전수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역대신선통감]에서는 "황제가 홀로 동북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 아래에서 도를 닦아 날이 오랜 뒤에 성공했다” 라고 하였다.





고대부터 신선 사상의 중심지로 숭앙되었던 삼신산三神山은 바로 동방의 백두산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인들조차 신교神敎 삼신 사상에 따라 이름 붙여진 삼신산(三神山,삼신상제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신선 사상이나 신선의 성지로 인식하였다.



 



[사기]를 보면 제齊의 위왕威王·선왕宣王과 연燕의 소왕昭王을 비롯하여 진시황, 한 무제 등이 모두 장생불사를 갈망하여 동방[海東]에 사람을 보내 삼신산을 찾아 불사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중국에서 신선 사상이 만주 ·한반도와 근접한 연燕·제齊나라 지역(하북 · 산동성)에서 비롯되고 널리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시선을 끈다. 이들 지역은 배달 · 조선에 속한 강역이고, 중국 내에서도 신교의 삼신 사상이 가장 먼저 보급되고 뿌리 내린 곳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도교문화는 동방 한민족 신교神敎의 삼신상제) 사상의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으며, 신교神敎가 점점 쇠퇴하면서 다른 3대 종교와 더불어 역수입된 것이라 해도 결코 빈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4대 종교를 탄생시킨 뿌리가 바로 인류 문화의 시원인 신교神敎이며, 이 4대 종교는 모두 환국과 환국의 정통 장자족인 한민족의 신교에서 흘러 갔다가 다시 한민족의 현 근거지인 이땅으로 흘러들어 왔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1만 년 전부터 꽃핀 동방 문화는 5천여 년 전에 서방으로 전파되었다. 송호수 교수의 다음 지적과 같이, 지구를 두루두루 돌고 돌아 제 뿌리를 향해 찾아든 모습은 다양하다.



 



■ 불교는 삭발 · 장삼에 불경을 끼고 되돌아 왔고유교는 유건儒巾 · 도포道袍에 사서삼경을 싸서 되돌아 왔다도교는 오두미五斗米를 갖고 무위자연하면서 구름을 타고 들어 왔고, 기독교는 노란 곱슬머리와 파란 눈에 붉은 신·구약을 끼고 들어왔다.





이러한 모습을 과연 과거급제해 금의환향錦衣還鄕한 위풍威風으로 보아 주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이 가문家門[조국]에 대한 공과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세대는 최인 선생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다음 유훈遺訓을 깊이깊이 새겨 보아야 하리라.



 



■ 오늘의 한국은 새 역사를 창조할 때이다. 새 역사를 창조하자면 새 역사를 알아야 한다. 한국의 재발견은 본래의 한국을 발견하는 일이다. ([한국의 재발견])



 



기독교의 [요한계시록]에는 종말의 대심판 때에 우주적인 대환란이 펼쳐지고, 이때 동방 해 뜨는 나라의 흰 옷 입은 민족에서 구원의 무리가 출세한다고 전한다. 이러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예수 복음의 핵심은 장차 지상에 내려오시는 주 하나님의 새하늘,새 땅, 신천지(新天地)에 대한 메시지에 있다.



 







 







 







 







 



크래머Kramer 박사는 현 서양문화의 뿌리요, 기독교 문명의 모체인 수메르 문명(BCE 3500~BCE 1950)을 건설한 사람들은 '동방에서 왔다' 고 주장하였다.



 



일본 학자 우에노上野景福는 수메르에서 사용한 설형楔形 문자가 태호 복희의 팔괘 부호와 흡사하다고 지적하였다.



 



[대영大英 백과사전]에는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같은 교착어로서 그 어근語根을 같이한다고 하였다. 고든 Gordon 박사는 수메르인이 중근동中近東에 들어서기 전에 고대의 문자 기호를 가지고 온 듯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수메르 문명과 기독교의 관계는 무엇일까?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시원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대다수 학자의 공통된 의견이다. 단적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저 유명한 바벨탑(수메르의 지구랏)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에 끼친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에덴동산과 노아의 홍수 신화도 수메르 신화에서 기원한다. 뿐만 아니라, 신교神敎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오는 삼신일체三神一體 신관과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은 혼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사하다.



 







 







 







 



수메르 문명이 기독교 문화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기독교(유대교) 문화의 뿌리가 되는 유대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본래 수메르의 갈데아 우르Ur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는 수메르 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12환국桓國의 열두 나라 가운데 우르(虞婁, Ur)국과 수밀이(須密爾, Sumer)국이 있다. 이 두 나라가 환국 말기에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지금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세운 문명이 수메르 문명이다. 수메르인은 스스로 ‘검은머리' 사람이라 했다.



 



특히 수메르의 종교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산' 혹은 '하늘 언덕' 이라 불린 지구랏Ziggurat은 제천단 유적으로서, 신교神敎의 삼신신앙과 제천 문화가 여전히 환국의 후예인 수메르인의 삶과 신앙 의식 속에서 제1의 중핵 자리를 점하고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음양오행 문화는 역사성으로 보면 2, 3천 년이나 4, 5천 년 전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흔히 음양론의 원 뿌리, 연원을 하도河圖, 낙서洛書로 말하는데, 그 근원을 추적해서 들어가 보면, 최소 1만 년 전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음양론이 정리된 첫 작품이 『천부경天符經』입니다.



 



선사시대 때의 유물이나 사람들이 살던 주거 터, 동굴 벽화를 분석해 놓은 자료들을 보면, 태고시대의 사람들이 음양적 사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천부경』이 음양론의 출발점이며, 실제 그것을 문명화한 진리의 원본이 5,600년 전, 태호 복희씨가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받아 내린 하도河圖입니다. 그 하도河圖에서 팔괘 문화, 주역 문화가 나온 것입니다.



 



천부경을 보면 1, 2, 3이 나오고, 운삼사運三四(3, 4) 나오고, 성환오칠(成環五七)에서 5, 7이 나오고, 生七八九 생 7, 8, 9가 나오고, 일적십거(一積十鉅)에서 10까지 해서, 수의 원리가 1에서 10까지 다 드러난 것입니다.



 



1만 년 전에 1에서 10의 수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이 지구촌 인류문화사상 처음으로 1에서 10수의 자연수를 발명을 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아라비아인들 또는 중동 인도 유럽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닙니다.



 







 







 







 





 







 



지금의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24절후와 해시계 규표를 태호복희(BCE 3528 ~ BCE 3413)씨가 처음 발명한 것입니다. 이것을 시간 공간의 구성 원리로 다시 한 번 계시를 해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서관(圖書館)이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원리에 의해서, 1에서 10수의 구성 원리를 보는 것입니다.



 



『낙서(洛書)』에는 1에서 9까지 수가 배열되어 있는데 2 7 6, 9 5 1, 4 3 8, 이것을 서양에서는 마방진魔方陣magic square이라 하며 교과서에도 나옵니다.



 







 



미국의 수학자 프랭크 슐츠F.Swetz는 『낙서洛書의 유산Legacy of the Luoshu』에서 ‘낙서洛書는 비단길을 통해 동서양을 왕래한 아랍인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인도, 동남아, 중동, 유럽 문화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서양 문명의 뿌리를 추적해 봤더니 이슬람 문화권에도 낙서洛書가 전달됐고 유대문화에도 낙서가 들어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2,500년 전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이것을 받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가 자연수의 체계에 눈을 뜬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오늘의 서양 과학문명은 끊임없이 피타고라스로부터 영감을 받아왔다고 했습니다.



 







 



서양문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은 수(數)에 의해 규정된다(All things are ruled by numbers).”는 유명한 얘기를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동서양 문명의 뿌리가 바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라는 얘기입니다.



 



 





 



낙서洛書의 수를 그대로 옮기면 3차 마방진이 되는데, 가로·세로·대각선의 합계가 모두 15가 됩니다. 마방진은 한마디로 숫자 속에 숨겨진 우주의 질서와 균형을 의미합니다.



낙서(洛書)는 4,300년 전, 중국에서 9년 홍수가 일어나 우(禹) 임금이 치수공사를 하던 중에 물 속에서 나온 거북이 등에 있는 무늬를 보고 낙서洛書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단군 성조의 맏아들 부루(扶婁) 태자가 아버지 단군 성조의 명을 받고 우(禹)에게 치수 비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사실이 중국 역사책 『오월춘추』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창수사자(蒼水使者)’가 나옵니다. 창수(蒼水)는 지금의 황해 바다 북쪽에 있는 대진국,발해(渤海)입니다. 그런데 꿈에 받았다고 왜곡시킨 겁니다.



 



 





 







 







 







 



사자使者가 대진국,발해를 건너가서 금간옥첩(金簡玉牒), 금옥과 같이 아주 잘 만들어진 함에다가 치수비법을 넣어 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행원리로 되어 있어서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之法)’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禹)가 9년 홍수를 다스리고 요순시대를 이어 하(夏)나라를 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호복희씨가 받아 내린 하도(河圖)와 우(禹)임금이 받아 내린 낙서(洛書)가 중동과 그리스 지역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서양에서 2,500년 전에 수(數)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근대 과학 문명과 오늘날 컴퓨터 문명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서양에서 이진법은 17세기초에 고안되어 나왔는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주역(周易) 이론에 이진법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체계를 정립시켰습니다. 그는 1697년 ‘파리 과학 학술원’에서 「이진법 정수론 주해」 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논문의 부제가 ‘고대 동양의 태호복희의 괘상에 나타난 이진법 산술이 갖는 의미와 그 효용성에 관한 고찰’ 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나의 불가사의한 이진법의 새로운 발견은 5천여 년 전 고대 동양의 복희왕이 발견한 철학서이며 문학서인 주역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1709년에 복희팔괘와 함께 이진수를 나타낸 분석표를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주역은 모든 과학의 열쇠이다.” 라는 말을 합니다.



 



 





 



 







 







 



 







 



식민사학 자체는 근대에 들어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만든 역사학이다. 하지만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다 보면 고대사에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학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는 분야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해질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아직까지 일제의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자들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인지? 또 그런자들은 무엇 때문에 식민사학에 집착하는지?



어떻게 그런 자들의 세력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점을 보여주는 게 바로 이 책을 쓰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또 하나는 식민사학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지 밝혀 보자는 것이다. pp.15~16 [예스24 제공]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의 저자 이희진박사는 청산해야 할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을 때, 역사가 어떻게 뒤틀린 길을 가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분야가 고대사 학계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병도가 키운 제자들이 대한민국 학계를 장악하고 역사학을, 기득권을 수호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키운 결과가 바로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기득권 수호 투쟁이 어떻게 학계의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학자들을 패거리 집단으로 전락시키며,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만도 못한 짓을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는 파렴치한이 되고 있는지를 저자는 처참한 내부 고발자의 심정에서 진술하고 있다.



 







 



이들에게 연구 기금과 학회지 발간 및 활동비를 지원하는 관료들이 결국 이들과 야합하게 되는 과정을 이 책에서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가 무사안일과 출세주위에 물든 관료들의 손을 통해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선심 쓰듯 뿌려지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갈 것이다. 또 이러한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언론이다.



이희진박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려 들어갔던 고려대학에서 인문학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제 발로 역사학을 전공하는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필 역사학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와중에 못 볼 꼴을 많이 보게 될 고대 한일관계사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연구성과도 박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한 『가야 정치사연구』부터 『가야와 임나』, 『거짓과 오만의 역사』등 그 분야에 집중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고대사연구자들이 얼마나 일본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뭘 모르던 시절,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되는 미천한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여기저기 발설한 죄로 지금까지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이러한 인생역정과 관계가 깊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이 책에서 저자는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자면서 만든 프로에 어떻게 식민사관에 입각한 논리를 담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또 이를 비판하자 진상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을 문제 있는 인물로 몰고 가고



 



또 그런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전국민에게 배포함으로써 결국 식민사관을 국민에게 주입시키는 결과를 자아냈던 경험담을 수록하고 있다.



 



결국 식민사관이란 태생부터 어떤 실체가 있는 역사관이 아니라, 철저히 권력에 복종하고 현실과 야합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학문의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식민사관이 건국 80년이 되도록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뿌리를 더 깊이 박고 가지를 쳐서 학계에서 큰소리를 치는 주류로 성장한 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것이 신진 학자에 불과한 저자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몸을 던져 불속에 뛰어드는 이유일 것이다. [예스24 제공]



 







 



독도나 정신대 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역사왜곡이 불거질 때마다 온나라가 뒤끓는 대한민국에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틀을 세운 한국 고대사를 후손들에게,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한국 고대사 학계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비극의 출발점이었다고 진단한다.



 



이병도를 비롯한 해방후 한국 고대사학계를 장악한 인물들은 자신들의 역사학을 실증사학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반대편의 역사학은 반실증적인 것 즉 반과학적인 것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역사학이 실증적인가?



 



그들이 말하는 실증성을 대변한 인물이 쓰다 소키치이고, 쓰다의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초창기 한국 고대사학계였다. 하지만 그들이 배운 쓰다 소키치의 한일 고대사 체계는 실증사학의 탈을 쓴 황국사관에 불과하다.



 



『일본서기』의 일부를 비판하는 척 하면서,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한전의 기록을 활용해 한반도 초기 국가의 식민성을 강조하는 그림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 맞추기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 고대 국가의 건립 연대는 수 백년이나 늦추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토대로 한국고대사를 복원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것을 저자는 제안하고 있다.



 



 



식민사관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된 <다물(多勿)> 147∼152 쪽입니다.



 



박기자 : 좋습니다. 그럼, 식민사관의 정의부터 말씀해 주세요.



 



임성국 : 1981년 <다물>지 12월호에 최만주 선생이 손수 쓰신 '식민 사관이란 무엇인가'하는 권두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정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기자 : 임 선생님, 그런데 저희 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해방된 지 40(현재 약 80년)년이나 되도록 그야말로 식민사학자들이 사권(史權)을 휘어잡고 독립된 대한민국 땅 안에서 그처럼 활개를 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성국 :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민족 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박은식, 신채호 같은 분은 이미 일제의 탄압으로 타계한 뒤였고 그 뒤를 이은 사학도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이러한 독립 투사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 사학계에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나 일제가 정책적으로 식민사관의 나팔수 즉, 일제의 주구로 길러낸 친일 사학자들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족 사학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중국 북경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정인보 선생이었습니다.



 



이병도 따위는 정인보 선생 앞에서는 인격에 눌려 제대로 氣도 못 펴고 쩔쩔매는 판이었습니다.



 



정인보 선생과 이병도씨는 말하자면 해방된 한국의 사학계의 양 거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총독부의 조선사 날조에 적극 가담했던 친일 사학자요, 또 한 사람은 독립투사요 철두철미한 민족 사학자였으니 두 사람의 학설은 사사건건이 대립할 수 밖에 없었죠.



 







 







 



이 팽팽한 대립이 그대로 어느 정도 계속되었더라면 이병도가 서울대학에서 양성한 제자들과 정인보 선생이 연세대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거의 비등한 숫자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정인보 선생은 6·25때 괴뢰군에게 납북되어 가시는 바람에 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당 최남선씨가 있었지만 그분은 일제 때 일본에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에 걸려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죠.



 



그러니까 대항할 만한 적수가 없어지자 이병도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서울대라는 명문 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내게 되었고 그 제자들로 구성된 학회의 회장과 한림원 원장까지 맡게 되자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병도씨는 그 때까지도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계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그의 승락이 없이는 대학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임 강사 자리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한국을 일제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한국 역사를 위조했습니다. 그 위조한 역사를 한국민들에게 강제로 반복 교육함으로써 일제의 침략 정책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여 한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성을 완전 거세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어지도록 획책한 것이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시키는데는 꼭 필요한 구성요건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상고사(上古史)와 국조(國祖)의 부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만주를 지배했던 상고시대의 역사를 아예 쏙 빼버리고 국조인 단군과 그 윗대의 환웅과 환인 시대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시작을 '위만 조선'과 거짓으로 꾸며낸 '한사군'에 맞춤으로써 '고조선의 건국 이념'도 '국조'도 '장구한 역사'도 없애 버릴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소위 한사군 즉 중국 한족(漢族)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대에 역시 거짓으로 꾸며낸 일본 통치부(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상륙했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는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운 일도 없었고, 고유문화도 없었고, 한반도는 주인없는 미개지였던 것처럼 조작하여 침략자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압축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발해와 통일 신라가 양립했던 우리 민족의 남북조 시대를 대동강 이남으로만 줄여버리고,



 



대륙에서 흥망했던 고구려와 대진(大震,발해)의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사에서 아예 없애 버리고,



 



고구려와 대진(발해)의 뒤를 이은 대금, 대청을 말갈 또는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아닌 것처럼 꾸며내어 대금, 대청과 그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의 활동사에서 제거하려는 논리로, 우리 민족사를 대륙에 기반을 둔 강대국이 아닌 대동강 이남만의 반도내의 소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음모입니다.



 



셋째로 우리 민족은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병도의 전국유이민(戰國流移民)설)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예컨대 삼국사는 민족 분열, 동족 상잔의 역사이고, 고려사는 기강없는 음탕한 역사이고, 조선사는 탐관오리, 사색당쟁으로 일관한 망국의 역사로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뿌리도 임자도 없었던 근본부터가 중국, 한(漢)의 식민지였던 나라,



 



둘째, 반도 안에 움추린 채 기를 못폈던 약소국,



 



셋째, 예로부터 피정복민인 무능하고, 부패하고, 분열하고, 민족 상잔의 망국 근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스스로는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정체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미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할 능력도 없는 한갓 고깃덩어리가 열강의 침략 야욕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동양 평화를 유지할 사명을 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거나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이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행복도 증진시킬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일제 식민사관의 골자입니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은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첫단계로 역사 정복(식민사관),



둘째로 종교 정복(민족종교 탄압 신사참배 강요),



셋째로 국어와 한글 정복(일어를 강제로 사용케하고 한글을 못 쓰게 함),



 



넷째로 전통 정복(창씨 개명)을 총독부의 정책으로 강행했습니다.



대략 위와 같은 식민 통치 각본의 원전이 바로 다름아닌 식민사관으로 위조된 조선사입니다.



 







 







 







 







 







 







 







 



이 가짜 조선사는 모두 6편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하고 신라통일 시대를 제2편, 고려 시대를 제3편,



조선 시대를 제4, 5, 6편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 역사의 역점이 안팎으로 교묘한 짜임새를 보여 주고 있는데에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근세와 근대사의 중요성이라는 미명으로 조선 왕조사에 역점을 둔 것은 실상 반도 속에 움추려 기를 못 폈던 반도속방사관(半島屬邦史觀)을 주입시키려는 음모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병도씨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서 이러한 고대사 날조 작업의 주역으로 관여했던 사실은 우리 사학계가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사학계 현역 교수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하생들로 단단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 정예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일제의 식민 사관을 철저히 답습하였는데, 이병도의 진두 지휘하에 식민사관에 중독된 사람들을 하루 빨리 재교육시켜 진정한 민족 사학자로 재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최만주 선생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지비사神誌秘詞」를 통해 사마천이 『사기』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연나라 추장, 위만衛滿 이야기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위만은 단군조선의 중앙 진조선과 마조선, 번조선의 전체 강역을 다스린 역사가 아니라, 삼한관경제의 서쪽 변방인, 기준왕이 다스리던 번조선 강역을 탈취한 도적이다.



 



그런데 현 교과서에서는 번조선 말대의 역사를 단군조선의 전체 역사로 포장한 사마천의 『사기』를 기준으로 하여 대한민국에 국통맥의 중심으로 잡혀있다. 이것은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중화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이다.



 







 



 



현 중·고등 교과서는 중국인의 기록을 맹신한 소중화 교과서의 틀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전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교수의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중에서 -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나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학자는 홀로 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학자들의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 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학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논문이나 연구 저서를 출간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거나 잘못 전해왔던 것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바로 동조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오한 연구 결과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발표자가 그러한 결과를 내놓기까지는 깊고 오랜 연구를 거쳤기 때문에 그 결과에 동의하려면 그 발표자 정도의 이해 수준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한 뒤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연구를 많이 하는 학자일수록 홀로 서기는 계속된다. 그래서 학자는 외롭다.



심오한 연구를 계속하는 학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학자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낼 필요가 있다.



그를 안아주는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라도 그것을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난의 성격을 지녀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역사 연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역사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풍토가 아쉽다.



 



새로운 주장을 받아주는 아량이 부족하다.



학문을 벗어난 공격, 심지어는 인신 공격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 가운데 하나겠지만 이래가지고는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날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학교 입장이 난처하다면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가 할 일이 아니겠느냐면서 오히려 필자를 격려해 주었다.



 







 



그 뒤 어느 정보 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다 기억하는 바와 같이 1980년대는 그러한 곳에서 전화가 온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시대였다.



확인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곤란하다면서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 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본 것은 신채호, 장도빈, 정인보 선생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제기한 바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



 



필자가 제기한 견해는 중국 고대 문헌을 검토하면서 얻어낸 것으로서



고조선의 영토를 넓게 보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일치한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역사 연구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므로 그것이 사실과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과 일치한 연구 결과는 모두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필자가 우리 고대사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나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을 강단 사학자와 재야 사학자로 분류하고 필자를 재야 사학자에 포함시켰다.



 



그 기준은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주장은 비정통 역사학자의 주장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뜻을 담은 것 같다.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외국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도 했으며 현직이 대학 교수인데 필자를 강단 사학자에서 제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남을 칭찬은 하지만, 비방이나 비난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 쓰는 것도 삼간다.



올바른 서평을 쓰려면 비판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직 필자가 할 일만 충실하게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의 가치관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모두 독재 정권에 도움을 준 것처럼 매도하기도 한다.



독재 정권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정권 유지에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리 역사의 중요성을 말하면 모두 독재 정권에 협력한 것인가. 역사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고 그 중요성은 정권과 상관없이 강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모함을 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고대사 학자들을 민주화에 역행한 사람들인 것처럼 매도하여 새로운 고대사 연구나 그 결과에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으로 말하면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말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단체한테서 연구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혜택을 많이 받아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요즈음은 우리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 또는 민족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하면 세계화의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남북 통일을 위한 민족 동질성 회복의 차원에서나, 우리 문화와 외래 문화가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차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우리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우리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도에 필자는 한번도 변명을 하거나 반박을 해본 적이 없다.



묵묵히 연구 생활에만 정진하면서 논문과 저서를 통해 필자의 주장을 계속해 왔을 뿐이다.



 



필자가 그러한 자세를 취한 것은,



 



첫째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이요,



 



둘째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내 자신이 남을 모함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를 비방하거나 공격한 학자들에게 한마디 묻고 싶다.



 







 



필자가 고조선을 포함한 우리 고대사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기까지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리 고대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지난날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침묵만을 지켜왔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서 필자가 새로운 주장을 한 뒤에야 그대들도 기존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의 고대사 내용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지금 필자는 외롭지 않다.



 



그 동안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학자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필자를 매도했던 학자들까지도 요즘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넓게 보고 있으며 그 문화 수준도 지난날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의 역사에 대한 시각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필자는 매우 기쁘다.



우리 민족사를 바로잡는 데 조금은 이바지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필자가 이렇게 그 동안의 사정을 밝히는 것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필자의 체험으로 알림으로써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해주자는 뜻에서이다.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에서이다.



그래야만 우리 겨레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겠는가!



 



- 윤내현,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中 -



 







 







 







 







 





 





 



인류사의 여러 경전들을 돌이켜 보라.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지 않았는가.



 



주역(周易)은 태호 복희씨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덕경은 왕필이 덕경과 도경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동양의학의 성서인 황제내경은 황제 헌원을 가탁하여 전국시대를 거쳐 한 대에 성립되었고, 불교의 화엄경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합쳐진 것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다섯 권의 역사서가 천 년에 걸쳐 쓰인 사실과 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태백일사가 나온 지 400년이 지나 환단고기가 묶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입니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습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환단고기』를 전해준 분들이 대부분 절식(絶食)으로,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주의자들에게 잡혀서 사지가 잘리고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습니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李沂,1848~1909)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습니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유립 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 “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이유립 선생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지금 청주에 살고 있습니다.



 







 







 



양종현 선생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 『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 『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원본 분실에 대해 제자 양종현씨는 "이유립 선생이 1976년 의정부에 거주할 당시,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 친척이 운영하는 안과가 있던 군산에 5일간 머무른 적이 있었습니다. 집세를 5개월 정도 밀린 상태에서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 알고 책을 모두 팔아 버려 이때 초간본도 함께 분실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립 선생이 초간본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조병윤이 1979년 이유립의 허락 없이 교정이 안 된 오형기필사본을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하여 광오이해사에서 100부를 출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조병윤은 파문당하고 이유립은 『환단고기』가 이미 세상에 나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며 그해 10월 광오이해사본을 교정한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미루다가 1983년도에 배달의숙본을 발간합니다.



 







 







 







 



 







 



 







 







 







 



원래 다섯 분의 저자들이 쓴 원본이 무수한 전란과 외세의 사서 강탈을 무사히 피하여 전해졌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계연수 선생이 모은 다섯 권은 필사 과정에서 인물, 연대, 장소가 오착되기도 하고 부족한 내용에 가필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들과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민족의 국통 맥과 우리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가 전적으로 매도 될 수 는 없다.



『환단고기』를 읽어가면서 그 극적 클라이막스가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 선생이 쓴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이다. 단군세기 서문에 대해서도 위서론자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대한민국의 강단사학의 태두들이 자리 잡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너무 근대사의 술어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계만방이라는 말이 옛날에 쓰던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국유형(國猶形) 사유혼(史猶魂)”하니,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이게 박은식 선생의 한국 통사(韓國痛史)에 있는 얘기를 끌어다 썼다고 한다.



 



그런데 박은식 선생의 책 원본, 한자로 된 책을 보면 "내가 옛사람의 글을 인용해서 이런 얘기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박은식 선생이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보고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인용했다"는 한 구절을 빼고서 거꾸로 한국통사에 있는 내용을 단군세기에다 끌어다 썼다고, 그래서 이유립이가 조작을 했다고, 그런 것을 보면 위서론자들의 심성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행촌 이암이 국록을 먹은 사람이 몽고니, 고려니 이런 말을 직설적으로 쓸 수가 있느냐’라고 묻는다.



 







 



행촌 이암은 고려말 사람으로 여섯 명의 왕을 모신 사람이다.



 



지구촌의 3분의 1을 통일한 원나라 대제국이 고려를 쳐들어 왔을 때, 원나라의 시녀로 전락한 고려의 오잠吳潛, 유청신柳淸臣 같은 역적이 나와 가지고 고려란 나라 간판을 떼고서



 



전부 보따리 싸들고 원나라 조정으로 귀속해버리는 이런 역적들이 날뛸 때다.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행촌 이암 선생이 어린 시절 자기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 위에서 하늘에 맹세를 했다. 그 시詩에 제가 동방의 빛을 꼭 회복하겠나이다. 그런 젊은 날의 순정이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에 보면 너무도 명쾌한 논리로 정리 돼 있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태도부터가 잘못되었다.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꼬투리를 잡다보니 ‘잠청배(潛淸輩)’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잠청배(潛淸輩)”는 원래 행촌 이암(李?,1297~1364)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인데 원나라 간섭기 때 고려 인물로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위서론자들은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하여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 지식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낸 주장이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그들은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를 문제 삼는 것이다.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라는 『세조실록』의 기록은 보지 않고



 



그보다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한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몇 가지만 지적하더라도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양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동경대에서 나와 있는 1904년도 삼국유사본을 보면 거기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아주 뚜렷하게 나와 있다. 이마니시 류가 그걸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조작을 했는데, 우리나라에 여러 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야, 그것은 國 자나, 因 자나 그때 같이 그런 서체로 썼다고 한다. 조작한 게 아니라고 한다. 그걸 가만히 보면 심성이 잘못돼 있다.



 



지구촌 역사를 보더라도, 지구촌 수 많은 나라에서 하나님이 대한민국 땅에 오실 수 밖에 없는 이유?



 







 





 







 







 







 







 







 





 







 



인간은 무궁한 신성이 충만한 깨달음의 혼이 담긴 경전을 통해서 문화가 개발이 되고 창조되어 간다. 서양에 2천년 문명을 창조한 신약이 있고, 유대교의 구약이 있고, 인도에 베다가 있고, 중국에 유교 4서5경이 있고 도교의 도장경이 있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이 우리 문화 역사를 바탕으로 한 그런 경전인가? 사서오경이? 무슨 신구약이 그런가?



기존의 경전이라는 것은 상제 문화를, 뿌리를 뽑아버린 책들이다.



 



 



유교 사서오경이라는 게, 시경이 당대 그 시대 서민들이 부르는 노래, 그걸 모아놓은 책인데. 거기 보면 상제님에 대한 기록이 여러 개 있다. 그런데 논어, 맹자에는 그게 없다. 천天을 따지고? 천명(天命)을 얘기하고? 50에 지천명知天命 했다는 공자가 그런데 상제님은 어디로 가 버렸나?



 



불경 팔만 4천 법문을 얘기하지만, 팔만대장경. 화엄경이란 책이 미륵보살 마하살이다. 모든 부처의 종불(宗佛)이신 미륵불은 어디로 가 버렸나?



 



서교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외쳤는데 그분이 여호와인가? 여호와는 전쟁신이다. “씨도 남기지 말고 전멸시켜라”라고 하는.



전 인류 조상신 버리게 하고. 그 죄악을 한번 생각해 본다.



 



“우리 민족의 수치가 뭐냐면은 인류 문화에 내놓을 수 있는 대경전 책 하나가 없었다는 것이다. 혹자는“우리 민족에게 이미 경전이 있지 않는가? 『천부경(天?經)』이 있고, 『삼일신고(三一神誥)』가 있고, 『참전계경(參佺戒經)』이 있지 않는가?”라고 할수도 있다.



 







 







 







 



환국 시대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천부경(天?經)』, 여기에는 우주론을 바탕에 깔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일체관계에 대한 인성론의 문제가 담겨있고,



 



환국 다음에 배달국의 개창자 배달환웅이 열어주신 우리 한민족의 신관, 신학의 원전 『삼일신고(三一神誥)』가 있다그리고 고구려 재상 을파소를 통해 내려온 366가지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덕목을 기록한 『참전계경(參佺戒經)』 이것이 우리민족의 3대 소의경전이다.



 







 



그리고 근세에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다는 것을 선포한 역철학 분야의 김일부 선생 『정역(正易)』과 상제님이 직접 이 조선 땅에서 가장 성경신을 가진 구도자를 세워서 도통을 내려주고 내가 올 것을 선포하라고 했던.



 



그 주인공인 수운 최제우가 문 연 동학의 경전, 『동경대전(東經大全)』까지 고대와 근대 이 5대의 소의경전이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선천 인류의 모든 문화의 종교 정치 경제 역사 문화의 전 영역을 수용해서 지금 부딪치고 있는 인류의 총체적인 위기, 혼란한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해주고 동서 통일문명시대를 열 수 있는 그런 경전이 되기는 어렵다.



온 인류의 정치, 경제, 역사, 교육, 예술, 음악, 언어, 어린이 문화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전 영역을 총체적으로 새롭게 바꿀 수 있는 즉, 선천 인류문화의 전 영역을 수용하면서 인류의 새 문화를 창조 할 수 있는 신문화의 원전, 인간 역사를 총체적으로 새롭게 밝혀주는, 인사(人事,역사)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진리 원전은 한민족 6천년사를 넘어서 인류 전 역사를 걸쳐 통털어서 오직 이 도道의 원전原典, 『도전(道典)』밖에 없다.



 







 



『도전(道典)』처럼 재미있는 경전이 없다. 한국말로 쓰여있고, 지금도 답사가 진행되고 있고, 후손들이 지금도 다 살아 있고, 지난 100여년 동안 1천만명의 구도자들의 피나는 신앙의 혼을 다 전해주고서 가버린 것이다.



 







 







 







 







 







 







 







 



 







 



도道의 원전原典, 『도전(道典)』속에는



 



지구촌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어린이 문화까지 들어 있다. 이 『도전(道典)』 한권으로 지구촌 문화를 다 바꾸는, 새 우주 역사를 창조하는 문서다.



 



도道의 원전原典, 『도전(道典)』 한권으로 지구촌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이 『도전(道典)』이 상생문화의 원전이다.



 



유교의 공자께서 동방으로 하나님이 오신다는 제출호진(帝出乎震), 불교의 미륵경에서 하나님이 오시리라고 얘기한 그 하나님 기독교 계시록에서 장차 오실 것을 얘기한 그 하나님, 선천 성자들을 내려 보내신 하나님이 다녀가셨다.



 



인류 문화 속에서 『도전(道典)』은 불경이나 성경, 사서삼경처럼 경(經)이라는 언어를 붙일 수가 없다. 하나님의 본래 호칭이 상제님이다. 구한말 애국가에도 ‘상제는 우리 황상을 보호하사, 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제님은 이 도道의 주재자, 그 도道의 이상을 건설하시는 유일하신 우주의 절대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상제님의 진리 말씀을 성편한 책은 경(經)이라고 부를 수가 없고, 도경(道經)이라고 할 수도 없다. 도道의 원전原典, 『도전(道典)』이다.



 



 



『도전(道典)』은 하나님의 자서전이고, 하나님의 생활 기록부다. 이『도전(道典)』하나 나오려고 100년을 소모하고 다 희생해버렸다.



 







 







 







 



『도전(道典)』속에 인류문화의 진액이 다 들어 있다.



 



『도전(道典)』을 읽다보면 선천 각 문화의 모든 것을 다 깨달을 수 있다.



 



종교, 정치, 역사, 어떤 영역이 됐든, 그 근본을 다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 세상의 문화 실체에 대해서 『도전(道典)』을 통해 깨닫게 된다.



 



도道의 원전, 『도전(道典)』은 우주 통치자의 통치법전이다. 이 세계가, 지구촌 세계 정치가 어떻게 지금 전개되느냐 하는 이 지구촌 역사 통치 법전이다. 도道의 원전, 『도전(道典)』을 보면 이 세상의 내막을 다 알게되고. 지구촌 역사속에 정치,종교 문화가 됐던 경제가 되었던 지구촌의 인간 삶의 모든 분야가 총 망라되어 있다.



 



앞으로 한민족 문화 시대가 온다. 새 문화의 통일 대경전‘ 『도전(道典)』’이란 어떤 책인가?



 



『도전(道典)』’은 155년 전, 이 땅에 인간으로 강세하신 하나님께서 선천 성자들이 전혀 언급하지 못했던선천 종교의 진리 한계를 넘어서는 깨달음의 총결론, 궁극의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밝혀주신 진리의 원전이자, 신문명의 꿈의 새세계를 펼쳐주는 새 문화의 통일 대경전이다.



 



동서양의 종교 정치 경제 역사 문화의 전 영역을 아우르면서 인류 신문명의 놀라운 한 소식을 전해주는 진리, 통일 대경전이 『도전(道典)』이다.



 



서구에 신약이 있고, 중국에 사서오경과 소위 13경이 있고, 도교에는 도장이 있고, 인도에 베다가 있다면, 우리 한민족에게는 道의 원전(原典), 『도전(道典)』이 있다. 한민족의 유일한 문화 대경전, 『도전(道典)』이 세계문화를 포용해서 인류 문화를 통일하고, 인류의 새 역사를 통치해 나간다. 위기에 처한 오늘의 인류에게 앞으로 다가오는 대통일 문명권, 지구촌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새문화의 진리원전이 바로 『도전(道典)』이다.



 



 







 



 







 







 



새 세상의 문화 실체가 『도전(道典)』속에 들어 있다.



 



『도전(道典)』처럼 재미있는 경전이 없다. 한국말로 쓰여있고, 지금도 답사가 진행되고 있고, 후손들이 지금도 다 살아 있고,



 



지난 100년 동안 1천만명의 구도자들의 피나는 신앙의 혼을 다 전해주고서 가버린 것이다. 이 『도전(道典)』은 이 땅에 오신 조화주 하나님이 이 천지를 경영하시는 분이 조화를 부리신 것이다.



『도전(道典)』은 새천지의 프로그램이다. 새 역사의 시간표가 정리돼 있다.



 



이 새 역사의 비밀. 인류가 앞으로 새 세상을 맞이하는데 그 준비과정. 그리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개벽의 실제상황. 『도전(道典)』 7편을 보면 그런 말씀이 꽉 들어차 있다. 이『도전(道典)』을 모르면 이 세상 인간으로 태어나서 아무리 전생, 전전생에 무슨 제왕을 하고, 지구촌에 큰 부호로 명예를 누리는 사람으로 살았다 할지라도 헛사는 것이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이 진리의 원전. 이 우주의 도의 주권자, 주재자, 통치자의 원전, 도의 원전,『도전(道典)』을 모르면은 이 세상 인생으로서 완전히 헛살다 가는 것이다. 이『도전(道典)』은 바로 도의 원전, 진리의 원전이다. 이 세상 정치, 경제, 이 세상 사는 모든 문제의 결론적 해답이 이 『도전(道典)』에 있다.



 



이 한권만 제대로 읽으면 이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해서 성공의 열쇠를 쥐는 것이다. 한 인생으로서는 궁극의 열쇠, 성공의 열쇠를 쥐는 것이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살아서 행하신 그 모든 행적이 바로 『도전(道典)』속에 있다. 『도전(道典)』은 하나님의 조화권능의 이야기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우주의 조화권을 행사하셨다.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으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선천 성자들의 어떤 기적, 권능과도 경계가 비교될 수 없는, 비교 자체가 의미 없는, 하나님의 무궁한 신권을 『도전(道典)』을 통해 체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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