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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Liverp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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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9.1
이 세 영화를 이어서 보면 3D영화로 전달할 수 없는 날카로움과 감동이 공존한다. 말은 우리들의 낙원!이라 했지만, 실제로 우리에게도 자비를...이 정도 이야기다. 프랑스 헉명처럼 사회체제를 전복시키는 게 아니라 생존이 아닌 생활에 대한 문을 열어달라는 것. 영화들이 그리고 있는 세계는 현재가 아닌데도 뉴스 한 부분을 연이어서 보고 있는 듯 느껴지게 한다. 인간 내면의 가장 본질, 공평에 대한 정의를 영화가 말한다. 공정, 공평, 정의. 이런 단어로 말할 수 있는 감정이 있다. 부모가 경제적 약자여도 자녀는 부모가 꿈꿀 수 없는 세계에서 살 수 있고, 진통제 몇 알이나 주사 한 대로 통증을 완화시키는 대신 근본적인 치료를 받아서 불편함없이 살고 싶어한다. 열심히 일한 것만큼 나에게 그 몫의 가치가 돈이나 시간 혹은 자신이 필요한 것으로 돌아오는 세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어떤 의심도 없이 나에게 주어진 세상에서 그저 열심히 사는 사람과 '왜?'라는 의문을 품으로며, 기회를 만들든 우연한 기회를 잡든 무엇인가 해 보려는 사람. 보통은 전자의 생활처럼 산다. 생각할 힘이 필요하고 생각에 따라 행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영화 속의 기다림의 시간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세 영화 모두 90년대의 미국식 영화의 이야기를 뒤집는다. 영웅이 등장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사라지거나 영웅의 존재로 세계가 유지되는 00맨 시리즈 혹은 영웅의 타이틀 롤로 이름붙은 많은 영화들과는 다른 이야기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문제가 무엇인지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처럼 뚜렷하게 의식하고 철저하게 계산하거나 <엘리시움>의 맥스처럼 뇌간에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삶을 연장할 기회를 잡고 싶어 다른 사회로 진입하려 하거나 <인 타임>처럼 사회의 작동 기제인 시간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선과 악의 경계가 뚜렷한 과거보다 똑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내놓느냐 혹은 지키기 위해 다른 집단을 인식하지 못한 채 버려두느냐의 차이를 말한다. 아마도 신자유주의 이후에 양극화된 소득, 불평등한 경제시스템이 불공정한 소득분배로 이어지는 현상이 10년 이상 유지된 다음에 나온 이야기라 영화 메시지에 주목하게 된다.
상황 설정은 세 영화 모두 독특하며 가치있다. 계속해서 질주하는 열차 칸의 꼬리칸부터 앞으로 전진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담아낸 <설국열차>, 다양한 인종과 고아원의 개념으로 시작해서 버림받은 지구인들의 공간을 엘리시움 공간과 분리해서 삶의 질과 연관된 의료분야와 연계한 <엘리시움>, 사회의 불합리함을 깨뜨리기 위해 시간도둑이 된 계층이 다른 두 젊은 남녀를 그린 <인 타임>. <설국열차>가 한정된 공간안에서 일어나는 정치싸움(인간의 생존과 존엄권)을 칸의 이동에 따라 다양하게 영상에 담았다면, <엘리시움>은 세 주연 배우에 정치성을 담아 무지한 개인의 희생으로 가능한 의료가치의 확산과 무자비한 군인들(아마도 이라크와 아프간 이후 더 심해졌을 듯), 정치인들 내부의 민감한 움직임을 동시에 그린다. 이에 비하면 <인 타임>은 시간이 남아도는 자들(경제적 부유층) 몇 분의 시간에 허덕이는 사람들(경제적 약자층)을 대비하며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묘하게도 세 영화의 메시지는 비슷한데, 시간배분이 다르다. <설국열차>는 초반부터 꼬리칸의 긴장분위기를 보여주며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연결된 긴 통으로 보여주며 한 칸 한 칸 앞으로 내딛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어린 생명들의 희생이 필요한지, 그들이 불합리하게 당한 대우(바퀴벌레로 만든 식용젤리)가 편안한 삶을 보내는 사람들과 왜 달라야 했는지 배우들의 표정을 클로즈 업 하거나 러닝타임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보여준다. <엘리시움>은 중반까지 평범한 두 계층의 삶을 보여준다. 중간에 셔틀이 가기도 하지만, 그것은 집단 전체의 움직임과는 다르다. 격추당한 셔틀 2대에서 46명의 사망자, 그리고 한 대도 다시 지구로 귀환된 것은 무엇인가 해 보려는 노력정도로 보인다. 오히려 두 계층의 싸움이 아니라 정치권과 민간인, 그 사이에 있는 군인 사이의 대립을 보여준다. 군인 세력으로 동조한 정치인의 결말 역시 피로 물들고 민간인 맥스와 군인 크루거의 싸움은 그들이 몸에 두른 장치를 제거한다면 SF영화보다 어느 내전 지역의 국제기구 파견근무자와 반란군의 싸움과도 같다. 시간 지킴이들을 피해 시간을 탈취하는 모습의 <인 타임>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진다. 오히려 다른 두 계층의 사람들이 만났을 때 처음 대하는 그들의 시선이 흥미롭다.
그래서, <설국열차>는 train이 아니라 piercer로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영원히 어두컴컴한 꼬리칸에서 인생을 마감해야 할 것 같은 한계상황에서 다민족 사람들이 그들이 알지 못하는 더 좋은 세계로 전진하는 인상이 프랑스적인 사회사상가들의 이론과 그들의 소설과 겹쳐서 강하게 남는다. 그들에게 서서히 혹은 다른 방향으로는 없다. 오직 앞으로 급진적으로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목표 하나만이 존재한다. 이에 반해 <엘리시움>은 미래 시대가 현재의 모습으로 겹친다. 전과의 기록이 있어도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한 남자가 편견과 산업재해로 아무것도 모른 채 치료를 위해 엘리시움으로 가야해서 범죄집단과 엮인다. 넘치는 액션이 절대적 강자가 아니고 그가 몸에 두른 장치가 몸에 핏자국으로 남아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아프겠다...' 자신의 죽음과 오염된 지구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의료지원을 맞바꾼 것은 아마도 미국 혹은 사회복지 서비스가 없는 나라에서는 감기나 상처 하나에도 보험조항과 약관을 따져야 하고 보험없는 사람들이 겪는 인생의 어려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경쾌한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에서 의사 한 명만 바뀌어도 천식으로 고생하는 아들의 인생이 달라진 것처럼. <인 타임>은 화면이 적막할 정도로 공간이 광활하게 느껴진다. 두 다른 사회가 합쳐지거나 무엇인가 급격하게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다른 삶을 살지만, 최소한 사람을 움직이는 시스템인 시간으로 표현된 자본재는 무너져야 한다고 믿는 신념이 보인다.
2000년대 초반의 올리버 스톤 감독이었다면 직설적으로 보는 사람이 부담스럽게 이야기를 그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하나의 메시지를 SF로 세 감독이 말하는 방법은 다르다. 누가 어떻게 싸우는가, 왜 싸워야 하는가, 누가 살아남는가, 앞으로의 세상을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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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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