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가는 힘이 되는 책

nextwave7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8.10.31
『골든아워』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 서한
6월 초, 현충일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를 뵈러 대전으로 향했다. 중증외상센터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던 때였다. 대전으로 가는 내내 어머니는 차창 밖에 시선을 둔 채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 다. 나는 고요한 어머니를 태우고, 말없이 누워계신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417 묘역은 푸르렀다. 사방이 고요하고 전경은 선명했다. 하늘은 파랗고 잔디는 초록빛이었다. 늘어선 석비와 울긋불긋한 꽃들은 비현실적이었다. 아버지 함자가 새겨진 석비를 찾아 그 앞에 섰다. 주변의 잔디가 작년보다 촘촘해졌다. 나는 가지고 온 꽃바구니를 석비 옆에 내려놓았다. 초록 잔디에 흰 장미가 유독 눈에 띄었다. 챙겨온 음식은 단출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술을 꺼내 올렸다. 아마도 이 술 한 잔이 가장 반가우실 것이었다. 아버지 이름 앞에서 거수경례를 마치고 해군 정모(正帽)를 벗어 석비 위에 올렸다. 떨어지는 초여름 빛이 정모 테두리에 닿아 꺾였다.
어머니는 사과 한 알을 잘라 아버지에게 내드렸다. 손놀림이 더뎠다. 어머니는 잔디 아래 누운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지났다. 살아생전 없던 평안이 이제야 두 양반 사이에 있었다. 이만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인가……. 문득 말없이 마주한 두 사람에게 묻고 싶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
한국에서의 중증외상센터 사업은 침몰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복마전같이 얽힌 중증외상센터 사업을 뒤돌아보았다. 어쩌면 가용자원이 제한된 일개 지방 사립 의과대학을 기반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여왔는지도 모른다. 기존의 100년 된 의과대학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었다. 더욱이 대학의 부속 병원은 해군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다. 아니, 그렇게 움직일 필요조차 없는 기관이다. 윗선의 보직자들은 시기마다 자리를 달리하고, 일은 일관된 방향으로 추진되지 않는다. 각자 의견이 갈리고 편이 나뉘며, 조직 안에는 뒷말이 끊임없이 돈다. 이것은 한국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의료계는 사회의 일부일 뿐이니, 대학의 부속 병원은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중증외상센터는 고도의 단계적 뒷받침이 요구되는 사업이다. 한국 사회의 투명성 정도로는 의료계나 정부 모두 이런 사업을 감당할 수 없다. 15년간 나는 그 사실만을 확인한 것 같았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중증외상센터의 세계적인 표준을 한국에 심어보고 싶었다. 아주대학교병원 중증외상센터가 문을 닫고 한국의 중증외상센터 사업이 종료되고 나서도, 다음 세대 의사들 중 누군가가 다시 중증외상센터를 만들어보려 할 수도 있다. 그때를 위해 우리가 남겨놓은 진료 기록들이 화석같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우리의 기록들은 마치 내가 2002년 처음 외상외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았을 당시 찾았던, 한 한국계 미국인 외상외과 의사가 3년간 고군분투하다가 사라지며 남긴 기록과도 같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그 기록들을 들춰보며, 외상외과가 어떤 임상과인지를 더듬어갈 수 있었다.
이만하면 된 것 같았다. 세계적 표준을 따라가는 ‘최상위 중증 외상센터(Level 1 Trauma Center)’의 진료기록을 만들어 남기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 밀려왔다.
— 어차피 처음부터 지속가능성은 없던 일이었잖아요.
허 위원은 학교를 떠나기 전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 사회에 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시스템을 고수하기 위해 나와 함께 있는 소수의 팀원들의 희생과 허 위원의 보호 덕분에 간신히 버텨왔다. 이만하면 정말 많이 버텨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세형 비행대장은 헬리콥터의 비행 원리에 대해, 바람을 깎아 치고 올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헬리콥터는 바람과 함께 주위 모든 것들을 깎아내며 그 반동으로 솟아오르고, 앞으로 나아간다. 고정익 기체와 달리 글라이더 비행이 불가하므로 힘들어도 버텨서 항력을 얻지 못하면 곧장 추락한다. 어쩌면 나도 중증외상센터도 헬리콥터가 바람을 깎아 나아가듯, 내 동료들을 깎아가며 여기까지 밀어붙여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고, 힘들어도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았다. 간신히 구축해온 선진국 표준의 중증외상센터를 유지하기 위해 말없이 버티다 쓰러져나갔다.
결국 이 중증외상센터 바닥은 내 동료들의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언제까지나 이렇게 주위를 깎아내며 나아갈 수는 없다. 나는 이미 한참 전에 내가 하는 일의 옳고 그름과 방향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내 의도와 관계없이 급류에 휩쓸려 발버둥 치다 여기까지 떠밀려왔을 뿐이다. ‘훗날 정경원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 지금보다는 발전이 있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런 생각조차 환상이었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신기루 같은 것인데 내가 너무 오래 그것을 좇아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멈춰 서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내 인생을 휩쓸고 지나가버렸다.
석비에 새겨진 아버지의 함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손끝으로 석비 모퉁이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정모에 꺾여 닿은 볕이 뜨겁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버지는 답이 없었다. 그가 누운 자리는 평안해 보였다. 영면한 아버지의 자리가 부러웠다. 그러나 나의 끝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 서글프도록 허망하기는 했으나, 산 날들이 대개 온전하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환자를 제외하고 모두 실명이며, 나는 그들의 노고와 헌신, 살아온 궤적들을 다 표현할 수는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 사람들 역시 중증외상센터 설립에 생의 일부분을 뜯어내 바친 수많은 사람들 중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들 모두를 실어낼 수 없어 가슴이 아프다. 다시 한번 여태껏 환자들과, 선진국 수준의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위해 헌신해왔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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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