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으며

ena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4.5.30
지금은 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고등학교 생물(지금은 과목명도 바뀌었다. ‘생명과학’으로) 교과서에 진화의 증거로 여러 동물들의 배아 상태를 비교한 그림을 제시하고 있었다. 바로 발생학적 증거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것을 제시한 사람은 헤켈이었다.
그는 이를 “개체 발생(ontogeny)는 계통 발생(phylogeny)을 되풀이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즉, 인간이 거치는 발생 과정은 인간이 진화해온 단계들을 거쳐서 진행된다는 의미이다.
필립 볼의 『모양』에서는 그 에른스트 하인리히 필리프 아우구스트 헤켈의 작업에 대해 소상하게 쓰고 있다. 주로는 그가 묘사한 방선충 등에 대한 것이다.
헤켈의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꼼꼼하며 그림 실력이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을 보면서는 과연 그가 그린 것이 그가 본 것인지, 아니면 보고 싶어하던 것인지 헷갈린다. 필립 볼은 이렇게 쓰고 있다.
“헤켈은 특히 데생에 뛰어난 훌륭한 화가이기는 했지만 정말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그린 것일까, 아니면 저급하고 세속적인 실제 너머에서 그가 직감해서 봐야 한다는 생각한 이상화된 형태를 그린 것일까?” (65쪽)
필립 볼은 그가 그린 방선충 등의 패턴화된 모양들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있지만, 당연히 그의 가장 큰 스캔들이랄 수 있는 개체 발생과 계통 발생과의 관계도 빠뜨릴 수가 없다. 이런 발생에 관련한 그림 역시 그의 이상화된 관심을 반영한다고 보고 있다.
“헤켈은 그러한 모양을 자연의 형태에 관한 이론에 끼워 맞추는 데 더 많은 괌싱이 있었다. 헤켈은 자연의 무수한 형태 가운데서 질서를 찾는 과학자, 즉 원조 ‘형태학자’였다.” (69쪽)
나는 이 개체 발생과 계통 발생은 관련시킨 이 쪽에 훨씬 큰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필립 볼은 이런 이상화된 염원이 데이터의 왜곡까지 저지르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 때문에 헤켈은 데이터를 고친, 누가 보아도 명백한 사기꾼이라는 큰 불명예를 후대에 얻게 되었다.” (71쪽)
그 진화의 발생학적 증거를 예시하는 그 그림이 빠지게 된 사연이 바로 그런 것이다. 헤켈은 이론을 만들어놓고 그 이론에 맞추어 데이터를 ‘조금’ 왜곡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화론이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다. 헤켈이 타격을 입을 뿐. 즉,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하지 않을 뿐, 인간 배아에는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 동물들과 유연 관계를 갖는 기관들을 볼 수 있다. 그게 진화의 진짜 발생학적 증거다.)
그런데, 앞을 읽다 문득 펼쳐본 책의 뒤쪽에는 또 다시 헤켈이 등장한다. 거기서는 그 개체 발생과 계통 발생에 관한 헤켈의 스캔들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쓰고 있고, 그를 옹호하는 의견도 더불어 제시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헤켈의 생물 발생 법칙은 옳지 않은데, 성장하는 사람의 배아가 전 진화 역사에 걸친 인간 조상들의 다 자란 성인의 형태와 어떤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단계를 통과한다고 생각을 근거는 없고, 지금은 실제로 그런 생각을 부인할 엄청나게 많은 근거가 있다.” (348쪽)
그럼에도 (필립 볼의 표현에 의하면) 적어도 30년 동안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그만큼 과학적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희한한 것은, 어째서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그 그림이 버젓이 실려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얘기도 나온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것에 관해 쓰지 않았을 리 없고, 성실한 작가라면 스티븐 제이 굴드의 글을 통해 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 견해를 읽지 않았을 리 없다.)
“굴드는 헤켈 법칙의 종말은 그것이 가진 진정한 과학적 문제를 제기했던 유전학의 출현보다 발생학자들이 유추, 비교, 일반화에 의지하는 대신 실험적인 관점에서 형태 형성과 발생의 문제를 살펴보는 데 더 관심이 있게 된 과학 사조의 부침에 보다 많이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348쪽)
- 그냥 읽어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번역문을 다시 고쳐 읽으면, 굴드가 얘기한 것은, 헤켈의 이론이 끝장난 건 유전학적 분석 때문이 아니라, 발생학이 진짜 과학다운 과학이 되면서라는 얘기다. 즉, 이전의 발생학은 관찰을 통해 비교하고 유추해서 일반화하는 사변적인 것이었다면, 발전된 발생학은 실험적으로 형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면밀하게 확인하였기 때문에 헤켈의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립 볼이 굳이 다시 헤켈의 그림에 다시 얘기하는 것은, 과학에서 데이터의 수정이 어느 정도까지 인정되느냐는 문제 때문이다. 이게 더 관심이 가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접해왔던 여러 데이터 조작 스캔들 때문이기도 하고, 필립 볼이 그 유명한 Nature지의 편집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헤켈)는 과학자들이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 그림을 단지 그의 생각을 지지하는 증거로만 이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자기의 주장이 시각적 용어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348쪽)
그래서 헤켈은 다른 사람들이 현미경 관찰을 통해 만들어진 배아 그림들을 이용했는데, 그는 살짝 그것들을 수정했다. 이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이, 비평가들이 그림을 왜곡했다면 비난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데이터 조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립 볼은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변호하며 그 그림은 단지 계획도를 의미하며, 그 점에서 관찰자가 보려고 하는 부분을 강조하는 다른 과학적 그림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제안한다. 게다가 당시 과학자들은 시각적 데이터를 약간 ‘정돈하는 것’을 그렇게까지 금하지 않았다.” (349~350쪽)
그러나,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안 될 것이다. 이는 헤켈에 대한 옹호는 될 지 언정, 그가 제시했던 그림이 진화의 증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건 진실과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닭과 동일한 기원을 갖는 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닭의 단계를 거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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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